성인지 감수성, 성범죄 피해자 진술의 특별한 의미
언론을 통해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를 많이 접하셨으리라 생각하는데요. 안타깝게도 의뢰인 중에서는 피해자가 소위 돈을 노린 '꽃뱀'이 아니냐고 억울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범죄 피해자의 행동은 사회적 시선과 개인적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만약 성범죄로 조사를 받으시는 분은 반드시 피해자의 성인지 감수성을 충분히 고려한 바탕에서 피해자의 고소 동기를 파악해야 합니다. 수사기관에 통하지 않을 비상식적인 주장은 오히려 좋지 못한 인상만 남길 뿐입니다.
반드시 성인지 감수성을 통해 피해자의 행동을 이해하고, 왜 피해자가 고소를 했는지를 파악해야 논리 정연하게 사건을 대응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성인지 감수성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과거 성범죄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판단
성인지 감수성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진술의 신빙성이란, 쉽게 말해서 그 진술을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을 말하는데요.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기준 중에 그 진술이 사회통념에 반하는 경우 진술의 신빙성이 낮다고 판단됩니다. 즉, 사건발생 당시 및 직후 통상 피해자의 행동으로 보기에는 이례적인 행동을 한 경우,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낮게 보아, 무죄판결이 내려지게 됩니다.
과거 대법원의 판례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사안의 개요]
甲남은 가정주부인 乙녀와 전화통화를 주고받다, 서로 음담패설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를 기회로 甲남은 乙녀와의 통화를 녹음하고, 이를 통해 乙녀를 간음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甲남은 乙녀의 집으로 찾아가,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방으로 乙녀를 데려갔고,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여 치마를 벗기려고 하였는데, 乙녀는 "여기는 제청방이니, 이런 곳에서 이런 짓 하면 벌 받는다"고 甲남을 설득하였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시아버지가 전화가 왔음에도 적극적인 구조요청을 하지 않은채, 甲의 성기를 손으로 잡고 발기시켜 성관계를 가진 사안이었습니다.
[판시내용]
피고인과 피해자가 전화로 사귀어 오면서 음담패설을 주고받을 정도까지 되었고 당시 간음을 시도한 방에서 피해자가 "여기는 죽은 시어머니를 위한 제청방이니 이런 곳에서 이런 짓을 하면 벌 받는다"고 말하여 안방으로 장소를 옮기게 된 사정 등으로 미루어 본다면 강간피고사건의 피해자에게 가한 폭행 또는 협박이 그 반항을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까지 이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대법원 1991. 5. 28. 91도546 판결).
[비판점]
이 사건은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반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간의 구성요건인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협박을 인정할 수 없어 무죄판결을 선고한 사안입니다. 그러나 乙녀는 甲 남의 더욱 강력한 폭행, 협박이 두려워 애초부터 반항을 포기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할 것입니다. 피해자의 태도에 비춰볼 때, 통상적으로 강간의 피해자라면 사력을 다해 반항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렇지 않았다는 근거로 무죄판결이 난 본 사안에 여성계의 비판이 쏟아졌고, 대법원은 점차 변화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변화된 판례]
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한 가해자의 폭행, 협박이 있었는지 여부는 그 폭행, 협박의 내용과 정도는 물론 유형력을 행사하게 된 경위, 피해자와의 관계, 성교 당시와 그 후의 정황 등 모든사정을 종합하여 피해자가 성교 당시 처하였던 구체적인 상황을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하며, 사후적으로 보아 피해자가 성교 이전에 범행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거나 피해자가 사력을 다하여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가해자의 폭행, 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고 섣불리 단정하여서는 안된다(대법원 2005. 7. 28. 선고 2005도3071 판결).
과거 대법원은 성범죄 피해자로서 통상 취해야할 태도 즉, 일종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성범죄 피해자의 특수성을 의미하는 '성인지 감수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성범죄 피해자로서 응당 취해야 하는 고정관념속 피해자의 모습이 있었던 것입니다.
변화된 판결, 성인지 감수성
그러나 점차 성범죄 피해자의 사건 발생 당시 및 이후의 반응은 개인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고, 피해자에게 피해자 다움을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성인지 감수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서, 대법원에서도 이를 전면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래에서는 변화한 대법원 판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이 사건은 1심과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이 선고되었고, 피해자와 그의 남편이 함께 목숨을 끊어 비극적인 결말로 메스컴에서 떠들석했던 사건입니다.
[사안의 개요]
甲남은 무인호텔에서 고향친구 A의 아내인 乙녀와 성관계를 가졌고, 乙녀는 甲남으로부터 강간을 당하였다고 고소하였습니다. 甲남과 A는 조직폭력단체의 조직원으로 함께 활동한 전력이 있었고, 甲남은 A가 베트남으로 해외출장을 가자, 乙녀에게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A와 乙녀의 자녀에게 위해를 가할 것처럼 협박하여 강간을 하였다는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1심 및 항소심의 무죄판결의 근거]
형사재판에서 공소가 제기된 범죄사실은 검사가 입증하여야 하고, 법관은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진실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증거를 가지고 유죄로 인정하여야 하므로, 그와 같은 증거가 없다면 설령 피고인에게 유죄의 의심이 간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고, 피해자가 폭행당하였다고 주장하는 날과 강간당하였다고 주장하는 날 사이에 4번 정도 더 피고인을 만나면서 피해자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고, 강간당하였다고 주장하는 날 저녁경 피고인이 모텔에 가자고 하여 처음에는 거부하였으나, 맥주를 사서 차를 타고 함께 모텔에 간 사실이 있는데, 이때 무인텔 및 CCTV자료 사진과 영상에 의하면, 피해자가 겁을 먹은 것으로 보이는 사정은 없으며, 외포된 상태에 있었는지에 대하여 의문이 든다는 점. 그리고, 속옷을 벗기고 성관계를 하였다는 점에 관한 피해자의 진술이 정황상 양립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대법원 판시내용]
피해자 등의 진술은 그 진술 내용의 주요한 부분이 일관되며, 경험칙에 비추어 비합리적이거나 진술 자체로 모순되는 부분이 없고, 또한 허위로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만한 동기나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상, 그 진술의 신빙성을 특별한 이유 없이 함부로 배척해서는 아니 된다(대법원 2006. 11. 23. 선고 2006 5407 판결). 그리고 법원이 성폭행이나 성희롱 사건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한다(양성평등기본법 제5조 제1항 참조).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의 문화와 인식,구조 등으로 인하여 성폭행이나 성희롱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피해자가 부정적인 여론이나 불이익한 처우 및 신분 노출의 피해 등을 입기도 하여온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성폭행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및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별적, 구체적인 사건에서 성폭행 등의 피해자가 처하여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하여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대법원 2018. 10. 25. 선고 2018도7709 판결).
피고인은 피해자에게 강간 이전인 폭행 당시 흉기로 남편을 해칠 수 있다는 등으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하여 피해자에게 겁을 주고 폭행을 하였다. 그리고 강간 범행 전까지 3일동안 피해자에게 계속 전화하여 만남을 요구하였고, 피해자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피해자의 남편과 두 딸의 신변에도 위해를 가할 것처럼 말을 하였다. 피고인은 피해자에게 모텔에 가서 잠깐 쉬자는 말을 하여 피해자가 거절하였는데, 다시 위협적인 말을 하면서 다른 짓은 하지 않고 맥주만 마시고 나오겠다고 하여 그 말을 믿고 모텔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강간하였는데, 그 진술내용은 일관될 뿐만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다. 또한 위 진술이 경험칙에 비추어 비합리적이라거나 진술 자체로 모순되는 부분을 찾기 어렵다. 피고인의 진술과 피해자의 진술이 반드시 배치된다거나 양립불가능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고, 그럼에도 피해자의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하는 '성인지 감수성'을 결여한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 (중략) 그럼에도 원심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하기에 부족하거나 양립 가능한 사정만을 근거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하여 그 증명력을 배척하고 이 부분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하였으니 자유심증주의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였거나 채증법칙 위반으로 인하여 사실을 오인함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
결국 대법원은 '성인지 감수성'울 토대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였고, 피해자 부부의 억울함을 풀어주었습니다.
성인지 감수성은 기존 사회의 시선에 대한 반성적 고려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가끔 의뢰인은 저에게 "성범죄 피해자라면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행동할 수 있냐?"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저의 대답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입니다. 오히려 억지로 태연하게 행동하기도 합니다. 피해 당시의 충격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한 자기방어기제 등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성범죄 피해자는 충분히 태연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변호사는 의뢰인을 위해서라도 성범죄 사건을 담당함에 있어 '성인지 감수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성인지 감수성'에 어긋나는 주장은 오히려 의뢰인에게 해가 되는 주장에 불과합니다. 성범죄로 조사를 받게 되는 경우 반드시 변호사와의 상담을 통해 '성인지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진술전략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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