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행 중에 뒤따르던 차가 자신을 피하려다 사고가 났는데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른 채 계속 운전해 갔고, 한참 지나서야 다른 운전자가 "당신 때문에 사고가 났다"고 알려와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런데 며칠 뒤, 사고를 내고 그대로 달아났다는 이유로 뺑소니, 곧 도주치상으로 입건됩니다. 이런 사건에서 의뢰인이 가장 억울해하는 부분은 한결같습니다. "저는 사고가 난 줄도 몰랐는데 뺑소니라니요." 결론부터 말하면, 도주치상이 성립하려면 운전자가 사고를 '인식'했어야 하고, 바로 그 인식을 다툴 수 있는지가 사건의 핵심입니다. 사고를 인식하지 못한 채 현장을 지나쳤다면 도주치상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1. 뺑소니(도주치상)는 왜 그렇게 무거운가
사람을 다치게 한 교통사고는 보통 교통사고처리특례법으로 다루어지고, 종합보험에 가입돼 있으면 처벌을 피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고를 내고 구호조치 없이 달아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도주치상으로 가중되어, 일반 교통사고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겁게 처벌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건에서는 '도주'가 인정되느냐 아니냐가 결과를 가르는 분수령이 됩니다.
2. 도주치상은 세 단계가 모두 충족되어야 한다
도주치상이 성립하려면, 운전자가 사고로 사람이 다친 사실을 인식하고, 그럼에도 구호조치를 하지 않은 채, 현장을 이탈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순서대로 갖추어져야 비로소 '도주의 고의'가 인정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이 순서입니다. 사고 발생 사실의 인식이 현장 이탈보다 시간적으로 앞서야 합니다. 사고를 인식하지 못한 채 현장을 지나쳐 떠났다면, 설령 결과적으로 사고가 있었더라도 도주치상으로 처벌할 수 없습니다.
3. 핵심은 '사고를 인식했는가'
그래서 도주치상 사건의 거의 모든 다툼은 "운전자가 사고를 인식했는가"로 모입니다. 운전자가 끝까지 몰랐다고 하면, 법원은 사고의 경위와 운전자의 행동, 도주할 동기가 있었는지 같은 여러 객관적 사정을 종합해 인식 여부를 판단합니다. 그런데 이 판단은 어디까지나 객관적 증거에 기초해야 하고,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확해야 합니다. 간접적인 정황을 모아 "인식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정도에 그친다면, 그것만으로 유죄를 인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인식을 다툴 수 있는 정황은 사건마다 다릅니다. 두 차량이 직접 부딪힌 것이 아니라 상대 차량이 회피하다 스스로 부딪힌 경우라면 운전자 차량에 충격이나 진동이 전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고음을 듣기 어려운 상황, 이를테면 소음이 차단되었거나 거리가 떨어져 있었던 경우도 있습니다. 사이드미러로 멀리 있는 차량을 한 번 본 것은 '차량을 보았다'는 것일 뿐 '사고를 인식했다'는 것과는 구별됩니다. 또 옆에서 지켜본 목격자가 사고를 알아챘다고 해서, 전방을 주시하며 운전하던 당사자도 같은 순간에 사고를 인식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사정들을 하나씩 드러내, 검사가 제출한 정황만으로는 사고 인식이 증명되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하는 것이 변론의 출발점입니다.
4. 떠난 뒤에 전해 들었다면
사고 사실을 현장이 아니라 한참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에게 전해 들어 비로소 알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는 앞서 본 순서가 결정적입니다. 인식이 이탈보다 앞서야 도주치상이 성립하는데, 이미 현장을 벗어난 뒤에 사후적으로 전해 들었다면 '현장에서 인식하고도 떠났다'는 구조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전해 들은 정보가 객관적 근거 없는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고, 그 말을 들은 지점이 사고 현장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어 돌아가 확인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면, 그 말을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도주의 고의를 인정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5. 도주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도주의 고의를 따질 때 동기의 유무도 함께 살핍니다. 음주 상태가 아니었고 운전면허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면, 단속이나 법적 불이익을 피하려 굳이 도주할 이유가 없습니다. 대낮에 CCTV가 곳곳에 설치된 도로에서 사고를 숨기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오히려 더 큰 위험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도주할 동기가 전혀 없었다는 점은, 운전자가 사고를 인식하고도 달아난 것이 아니라 인식하지 못한 채 평소처럼 주행했을 뿐이라는 판단을 뒷받침합니다.
6. '도주'가 깨지면 사건 전체가 달라진다
도주의 고의를 다투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도주가 인정되지 않으면 사건의 성격 자체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도주치상이 아니라 일반 교통사고가 되면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이 적용되는데, 신호위반이나 중앙선 침범, 제한속도 20킬로미터 초과 같은 이른바 12대 중과실에 해당하지 않고 종합보험에 가입되어 있다면, 원칙적으로 공소를 제기할 수 없어 처벌을 면할 수 있습니다(피해자가 크게 다친 중상해 등 다른 예외가 없는 한). 그래서 도주치상 사건에서는 '도주'라는 한 겹을 벗겨내는 것이 결과를 통째로 바꾸는 열쇠가 됩니다.
7. 그래도 유죄가 인정된다면
도주의 고의가 인정되어 유죄로 가는 경우라도 다툴 여지는 남습니다. 사고 발생에 피해자 측의 과실, 이를테면 과속이나 차량 정비 불량 같은 사정이 함께 작용했다면 양형에서 참작될 수 있습니다. 또 보험을 통한 치료비 지급이나 합의 시도처럼 피해 회복을 위해 성실히 노력한 사정도 형을 정하는 데 고려됩니다. 합의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더라도, 진지하게 회복을 시도한 경위를 정리해 두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8. 섣불리 인정하기 전에
뺑소니, 곧 도주치상은 "사고를 내고 달아났다"는 한마디로 단정되기 쉽지만, 정작 그 핵심은 운전자가 사고를 인식했는지에 있습니다. 직접 충돌이었는지, 충격이나 소리를 인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사고 사실을 언제 어디서 알게 되었는지, 도주할 동기가 있었는지에 따라 결론은 크게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 다툼의 자료 대부분은 사고 직후의 정황과 초기 진술에서 만들어지므로, 시간이 지나기 전에 정리해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고가 난 줄 몰랐는데 뺑소니로 입건되어 막막하시다면, 사고를 인식했는지를 비롯해 다툴 수 있는 지점이 있는지부터 사건 기록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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