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사고와 12대 중과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사고와 12대 중과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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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도주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사고와 12대 중과실 

이희범 변호사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사고, 12대 중과실이 될까

교통사고 상담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신호등도 없는 횡단보도에서 사고가 났는데 이것도 12대 중과실이냐는 것입니다. 운전자분들은 신호가 없었으니 책임이 가볍겠거니 기대하고 오시는 경우가 많은데, 라미에서 실제로 자문해 보면 그 기대와 결론이 어긋나는 일이 잦습니다. 미리 답을 드리면, 신호가 없는 횡단보도라도 보행자 보호의무를 어겼다면 12대 중과실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만 신호가 있는 경우와는 판단 구조가 다르고, 같은 횡단보도 사고라도 구체적 사정에 따라 갈립니다. 왜 그런지 차근차근 풀어 보겠습니다.

 

12대 중과실이라는 장벽

교통사고는 원칙적으로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운전자를 기소할 수 없습니다. 종합보험에 들어 있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은 이 원칙을 깨는 예외 열두 가지를 두고 있습니다. 이 열두 가지에 해당하면 합의나 보험 가입과 무관하게 형사처벌의 길이 열립니다. 신호위반, 중앙선 침범, 제한속도 시속 20킬로미터 초과 같은 익숙한 항목들이 여기 들어가는데, 그중 여섯 번째가 바로 횡단보도에서의 보행자 보호의무 위반입니다. 핵심 쟁점은 이 보호의무가 신호 없는 횡단보도에도 그대로 적용되느냐입니다.

 

보호의무에 신호의 유무는 없다

도로교통법 제27조 제1항은 모든 차의 운전자에게,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통행하고 있을 때 그 앞에서 일시정지해 횡단을 방해하거나 위험을 주지 않도록 할 의무를 지웁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조문이 신호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로 나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라도 보행자가 건너고 있다면 운전자는 멈춰 설 의무를 집니다.

대법원도 같은 입장입니다. 운전자가 보행자보다 먼저 횡단보도에 진입했더라도, 신호기가 설치되지 않은 횡단보도에서 차를 일시정지하는 등으로 보행자의 통행이 방해되지 않게 할 의무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어겨 사람을 다치게 했다면 보험 가입이나 피해자 의사와 상관없이 처벌 대상이 된다는 점도 분명히 했습니다. 먼저 들어갔으니 내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더 무거운 경우도 있습니다. 어린이 보호구역 안에 있는 신호 없는 횡단보도 앞에서는, 보행자가 있든 없든 무조건 일시정지해야 합니다. 건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일단 멈춰야 한다는, 한층 강화된 의무입니다.

 

어디까지 횡단보도 사고로 볼까

문제는 경계에 선 상황들입니다. 몇 가지 자주 부딪히는 사례를 짚어 보겠습니다.

신호기가 고장 나 등화가 꺼져 있는 상태라도 그곳은 여전히 횡단보도입니다. 하루쯤 신호가 점멸하지 않고 멈춰 있어도 보호의무의 대상이 되는 횡단보도로 인정됩니다.

보행 신호가 깜빡이는 녹색 점멸 중에 건너는 보행자도 보호 대상입니다. 점멸 신호는 보행자가 지켜야 할 안내일 뿐, 운전자가 지는 보호의무에는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신호가 바뀐 뒤에도 미처 다 건너지 못한 보행자 역시 보호받습니다. 신호 시간이 도로 폭에 비해 짧아 끝까지 건너지 못하는 일이 흔한 현실에서, 신호가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보호를 거둘 수는 없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입니다.

사고가 횡단보도를 살짝 벗어난 지점에서 났더라도, 그 원인이 횡단보도를 건너던 과정에 있었다면 횡단보도 사고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법원은 행위와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봅니다.

신호가 있을 때와 무엇이 다른가

신호 있는 횡단보도에서는 운전자가 진행 신호를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대법원도 간선도로에서 보행 신호가 적색일 때, 보행자가 신호를 무시하고 갑자기 뛰어들 것까지 예견할 의무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신호가 없는 곳에서는 그런 신뢰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사람과 차의 통행이 잦은 곳이라면 무단횡단이 흔하다는 점을 운전자도 쉽게 예상할 수 있으므로, 좌우를 살피고 서행하며 언제든 멈출 태세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 판례의 태도입니다.

형사책임과 민사 과실은 다른 트랙이다

여기서 운전자분들이 자주 혼동하는 지점을 짚어야겠습니다. 보행자에게도 잘못이 있으면 운전자 책임이 사라지지 않느냐는 물음입니다.

예를 들어 가로등도 없는 밤 열 시 무렵, 편도 3차선의 넓은 도로에 신호 없는 횡단보도가 있고 보행자가 차량 쪽 안전을 살피지 않은 채 건넜다면, 법원은 손해배상액을 정할 때 보행자의 부주의를 참작합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민사상 손해배상액을 깎는 과실상계의 문제입니다. 형사상 12대 중과실에 해당하느냐는 이와 별개로 판단됩니다. 즉 민사에서 보행자 과실이 인정되더라도, 형사에서는 보행자 보호의무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두 절차가 다른 트랙 위를 달린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전거나 킥보드를 타고 건넜다면

마지막으로 탈것 이야기입니다. 자전거를 탄 채 횡단보도를 건너다 사고가 나면, 보행자로서 보호받기 어렵습니다. 도로교통법은 자전거를 타고 건널 때 내려서 끌거나 들고 통행하도록 하고 있어, 이를 어기고 탄 채로 건넌 경우 오히려 자전거 운전자의 과실이 크게 잡힐 수 있습니다. 전동킥보드나 전동휠도 마찬가지여서, 2020년 12월 개정 이후로는 이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을 보행자로 보지 않습니다.

 

운전자가 가져갈 한 가지

신호 없는 횡단보도 사고는 가벼운 접촉사고로 끝나지 않고 12대 중과실로 처리될 수 있습니다. 운전석에서 단 하나만 체화하신다면 이것입니다. 횡단보도 앞에서는 신호의 유무를 따지기 전에 일단 속도를 줄이고 멈출 준비를 한다. 이 습관 하나가 사고도, 그 뒤에 따라올 무거운 형사책임도 막아 줍니다. 다만 이미 사고가 벌어졌다면 사안마다 횡단보도 인정 여부, 보행자의 동선, 사고 지점 같은 변수에 따라 결론이 크게 달라지므로, 혼자 판단하기보다 사실관계를 정리해 전문가의 검토를 받아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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