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할 변제 합의서는 그저 약속에 불과
분할 변제라는 약속의 본질에 있었습니다. 합의서에 분할 지급 조건이 적혀 있었지만, 그 합의서는 단지 두 사람 사이의 약속을 적은 종이일 뿐입니다. 가해자가 지키면 다행이고, 지키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받지 못한 돈을 회수하려면 다시 법원에 가서 민사소송을 제기하고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그 사이 몇 달이 흐르고 소송비용과 변호사 비용이 또 듭니다. 더 큰 문제는 그 몇 달 동안 가해자가 자기 명의의 재산을 처분하거나 숨겨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정증서로 작성하였다면?
합의시 자주 등장하는 것이 공정증서입니다. 공증인이 작성한 공정증서에 채무자가 강제집행을 승낙한다는 취지가 적혀 있으면, 그 문서 자체가 민사집행법 제56조 제4호에 따라 집행권원이 됩니다. 풀어 말하면, 굳이 민사소송을 거치지 않고도 곧장 가해자의 재산에 강제집행을 신청할 수 있는 판결문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 문서이기에 상대방이 합의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민사소송 절차 없이 바로 강제집행은 가능합니다.
공정증서도 만능은 아니다
다만 공정증서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강제집행이 가능하다는 말은 채무자에게 재산이 있을 때 그것을 가져올 수 있다는 뜻이지, 빈손인 사람에게서 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해자에게 압류할 만한 통장 잔고도, 차량도, 부동산도 없다면 가장 강한 집행권원을 손에 쥐고 있어도 결과는 같습니다.
게다가 공정증서 작성 이후 따로 합의로 집행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거나,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대리로 작성했는데 그 대리권에 문제가 있었거나, 표시된 채무 자체가 실제로는 없었던 경우라면 청구이의 소송을 통해 집행이 막힐 수도 있습니다.
가족의 약속은 서면으로 남겨야
가해자에게 마땅한 재산이 없다면 시야를 가족으로 넓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의뢰인의 사건에서도 가해자의 어머니가 합의 자리에 함께 와서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습니다.
가족이 변제를 떠안겠다고 할 때 가장 위험한 것이 이 구두 약속입니다. 법적 구속력이 없으니 마음이 바뀌면 그만이고, 막상 그 가족도 실제로 갚을 능력이 없을 수 있습니다. 가족의 약속을 의미 있게 만들려면 그 가족 명의로도 공정증서를 작성하거나, 가족이 지급을 보증하거나 연대해 의무를 진다는 내용으로 공정증서나 합의서 등을 서면으로 남길 필요가 있습니다.
부동산이 있다면 근저당권까지
가해자나 가족 명의의 부동산이 있다면 한 걸음 더 나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부동산에 근저당권을 설정해 두는 것입니다. 민법에서 근저당권은 담보할 채무의 최고액을 정해 두고 그 한도에서 우선 변제받을 권리를 미리 확보해 두는 담보권입니다. 합의금 채무를 위해 근저당권을 설정한 사례는 실제로도 적지 않습니다.
다만 그 부동산에 이미 다른 채권자의 선순위 근저당이 잡혀 있다면, 경매가 진행되어도 그쪽에 먼저 배당된 뒤에야 내 차례가 옵니다. 등기부등본을 열어 선순위가 얼마나 잡혀 있는지, 부동산 시세에서 그것을 뺀 나머지가 내 합의금 채권을 감당할 만한지 미리 가늠해야 합니다.
결국 가장 안전한 길은 일시 지급입니다.
이 모든 도구가 가리키는 결론은 단순합니다. 분할 변제도, 공정증서도, 근저당권도 결국은 돈을 나중에 받기 위한 장치라는 점입니다. 장치가 정교할수록 회수 가능성이 올라가지만, 어느 장치를 쓰든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변수는 생깁니다.
그래서 형사합의에서 가장 안전한 길은 처음부터 단순합니다. 합의금 전액을 받는 그 순간에 합의서에 서명하는 것입니다. 가해자가 한 번에 낼 능력이 없다면 그다음 안전한 길이 공정증서이고, 그다음이 가족 명의 공정증서와 근저당권 같은 보강책입니다. 분할 변제 합의서 한 장만 받고 손을 떼는 것은 형사합의에서 가장 위험한 결정입니다. 특히 사기 범죄의 경우라면, 이미 거짓말로 고액을 편취한 사기꾼이 또 다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합의는 두 번 오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서 어디까지 받고 무엇으로 보장받을지를 한 번에 정해야 합니다. 합의서 한 장의 무게가 결국 그 뒤로 이어질 몇 년의 시간을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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