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펌 회의실에 갓 스무살이 된 여성이 앉아 있다. 검은색 긴 생머리에 핑크색 모자를 푹 눌러썼다.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두툼한 입술, 큰 눈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일 때문에 오신 건가요?”
“전 남자친구의 친구한테 강간을 당한거 같아서 고소하려고요”
“아 그리시군요. 사건 경위를 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저랑 전 남자친구랑 만나기로 했는데 갑자기 전 남자친구의 친구랑 같이 보게 되었어요. 술집에서 술을 먹고 저랑 전 남자친구는 모텔에 가서 성관계를 했어요. 저는 술을 많이 먹어서 거의 기억이 없었어요. 근데 눈을 떠보니 전 남자친구의 친구가 침대 옆에 누워 있었고, 또다시 눈을 떠보니 성기를 삽입하려고 했어요. 한참 뒤에 전 남자친구의 친구를 고소했는데, 수사관이 제 말을 안 믿어주는거 같아요”
“아이고 그러시군요. 고소장 접수하신걸 좀 볼 수 있을까요?”
접수된 고소장과 의뢰인의 사연을 좀 더 들어보니 전 남자친구의 친구는 강간, 전 남자친구는 친구의 강간을 도운 강간 방조로 보였다. 의뢰인은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고 있었다. 물론 정신과 치료도 받는 중이었다.
사랑했던 전 남자친구가 친구의 강간을 도왔다는 점, 그런 전 남자친구가 자신에게 어떠한 사과 한마디 없었다는 점, 고소를 했음에도 수사관이 본인이 말을 제대로 믿어주지 않는 점이 더 큰 상처로 다가왔다.
나는 우선 증거들을 정리했다. 다행히 의뢰인은 전 남자친구와 전 남자친구의 친구와의 전화 통화 내용을 모두 녹음하였다. 해당 녹취 파일을 녹취록으로 만들어 분석하고, 고소하지 않은 전 남자친구를 강간 방조로 추가로 고소했다. 그리고 의뢰인에게 성범죄 피해자에게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된 것이라 계속해서 강조했다.
고소보충의견서를 제출하고 2차 고소인 조사가 진행되었다. 다행히 여자 수사관이 우리 사건을 담당하였다. 아무래도 여자의 입장을 좀 더 잘 이해해주고 사건 처리가 수월할 거 같았다.
그러나 웬걸, 여자 수사관의 질문은 날카롭지 않았고 피해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조서 작성은 잘 되었으나 결국 여자 수사관는 전 남자친구를 강간 방조 혐의에 대해 불송치, 전 남자친구의 친구는 강강기수가 아닌 미수(기수와 미수의 차이는 결과 발생, 즉 성기의 삽입 여부로 결정된다)로 검찰에 송치했다.
믿을 수 없었다. 우리는 즉시 이의신청서를 제출했고 검찰은 보완수사를 요구했다.
다시 경찰서로 내려온 사건은 남자 수사관으로 담당이 변경되었다. 남자 수사관은 전에 사건을 담당했던 여자 수사관과는 달리, 우리의 말을 더 믿어주었다. 남자 수사관은 영장을 받아 피고소인들의 핸드폰을 압수한 뒤 포렌식을 진행했다.
포렌식을 진행하는데 의뢰인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다른 별건에 대한 증거들이 계속해서 나왔다. 특수준강간, 카메라등이용촬영, 반포, 카메라등이용촬영물소지 등 다른 성범죄 피해자들에 대한 증거가 무더기로 나온 것이다.
남자 수사관은 여러 차례 조사를 거쳐 전 남자친구는 강간 방조, 전 남자친구의 친구는 강간으로 구속영장청구를 신청하였고, 법원에서는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사건은 그대로 검찰에 송치되었고, 검찰은 이들을 구속기소하였다.
1심 첫 공판. 나는 이례적으로 피해자의 대리인으로 공판에 출석했다(보통 피해자의 대리인은 공판에 잘 출석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피고소인들의 얼굴을 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수의를 입고 있었고 담담한 표정으로 어깨를 다소 움츠리고 있었다.
전 남자친구는 혐의를 부인하였고, 전 남자친구의 친구는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전 남자친구의 친구는 의뢰인과의 합의도 진행했다. 그러나 전 남자친구는 항소심에 이르기까지도 혐의를 부인했다.
그리고 공판에서 법리 다툼도 하였다. 자신들의 핸드폰을 압수수색했을 때 추가 영장 없이 의뢰인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별건(다른 피해자)에 대한 정보도 압수수색했다는 것이다.
대법원 판례(대법원 2015. 7. 16.자 2011모1839 전원합의체 결정)는 다음과 같이 판시하고 있다.
………
전자정보에 대한 압수·수색이 종료되기 전에 혐의사실과 관련된 전자정보를 적법하게 탐색하는 과정에서 별도의 범죄혐의와 관련된 전자정보를 우연히 발견한 경우라면, 수사기관은 더 이상의 추가 탐색을 중단하고 법원에서 별도의 범죄혐의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은 경우에 한하여 그러한 정보에 대하여도 적법하게 압수·수색을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경우에도 별도의 압수·수색 절차는 최초의 압수·수색 절차와 구별되는 별개의 절차이고, 별도 범죄혐의와 관련된 전자정보는 최초의 압수·수색영장에 의한 압수·수색의 대상이 아니어서 저장매체의 원래 소재지에서 별도의 압수·수색영장에 기해 압수·수색을 진행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피압수·수색 당사자(이하 ‘피압수자’라 한다)는 최초의 압수·수색 이전부터 해당 전자정보를 관리하고 있던 자라 할 것이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피압수자에게 형사소송법 제219조, 제121조, 제129조에 따라 참여권을 보장하고 압수한 전자정보 목록을 교부하는 등 피압수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
그렇다. 원래 영장을 받았던 범위 외에 다른 범죄에 관한 전자정보를 압수수색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영장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전 남자친구는 남자 수사관이 별도의 압수수색 영장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으나 남자 수사관은 별도의 영장을 받아 집행했었다. 결국 이러한 법리 다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 남자친구 측은 의뢰인 사건과 함께 기소된 특수준강간에서, 피해자가 블랙 아웃(black out) 상태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필름이 끊긴 정도’라는 것이다. 준강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심실 상실 상태여야 하는데, 전 남자친구 측은 이를 다툰 것이다. 블랙아웃은 뇌 기억 장치에 오류가 생기긴 하였으나 행동은 가능한 상태이므로 준강간의 구성요건인 심실상실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준강간으로 기소된 경우 피고인은 보통 피해자가 블랙아웃 상태였다고 다투며 합의 하에 성관계를 하였다고 주장한다. 술에 취해 기억 없다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탄핵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를 다투어 준강간에 대해 무죄를 받은 판례도 여럿 있다.
블랙아웃과 비교되는 개념은 패싱아웃(passing out)인데, 패싱아웃은 의식 자체가 상실된 상태로, 기억도 못하지만 행동이나 반응도 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자세한 개념은 아래 대법원 판례(대법원 2021. 2. 4. 선고 2018도9781 판결)를 참조하기 바란다.
………
의학적 개념으로서의 ‘알코올 블랙아웃(black out)’은 중증도 이상의 알코올 혈중농도, 특히 단기간 폭음으로 알코올 혈중농도가 급격히 올라간 경우 그 알코올 성분이 외부 자극에 대하여 기록하고 해석하는 인코딩 과정(기억형성에 관여하는 뇌의 특정 기능)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행위자가 일정한 시점에 진행되었던 사실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는 것을 말한다.
알코올 블랙아웃은 인코딩 손상의 정도에 따라 단편적인 블랙아웃과 전면적인 블랙아웃이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알코올의 심각한 독성화와 전형적으로 결부된 형태로서의 의식상실의 상태, 즉 알코올의 최면진정작용으로 인하여 수면에 빠지는 의식상실(passing out)과 구별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음주 후 준강간 또는 준강제추행을 당하였음을 호소한 피해자의 경우, 범행 당시 알코올이 위의 기억형성의 실패만을 야기한 알코올 블랙아웃 상태였다면 피해자는 기억장애 외에 인지기능이나 의식 상태의 장애에 이르렀다고 인정하기 어렵지만, 이에 비하여 피해자가 술에 취해 수면상태에 빠지는 등 의식을 상실한 패싱아웃 상태였다면 심신상실의 상태에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
전 남자친구측은 열심히 법리 다툼을 하였으나 법원은 결국 이들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전 남자친구뿐 아니라 그 친구까지 모두 실형이 선고되었다. 의뢰인은 피고소인들 모두와 합의를 하였고 이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성범죄 피해자를 대리하여 처음 상담과 고소, 공판(1심, 2심)까지 담당하면서, 기소 전까지는 최대한 우리의 고소 내용이 기소되도록 노력하였고, 기소 후에는 피고인 측과 연락하여 피해자의 충분한 정신적 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다행히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로톡의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콘텐츠 내용에 대한 무단 복제 및 전재를 금지하며, 위반 시 민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