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사건에서 여러 개의 혐의가 함께 문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 혐의가 하나의 사건으로 묶여 있다고 해서, 각 혐의의 결론까지 하나로 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사건에서는 폭행과 재물손괴 혐의가 함께 문제되었습니다. 의뢰인이 새벽에 체포된 상태에서 시작된 사건이었고, 처음에는 두 혐의 모두 다툴 여지가 크지 않아 보였습니다.
실제로 오토바이가 넘어져 손상까지 발생하였는데, 어떤 이유로 불송치 결정이 이루어진 걸까요?
3줄 요약
사건: 폭행 및 재물손괴 혐의가 함께 문제된 형사 사건
쟁점: 폭행에 관한 처벌불원 의사, 재물손괴의 고의 인정 여부
결과: 두 혐의 모두 경찰 단계에서 불송치 결정
변호사의 핵심포인트
1) 하나의 사건에 여러 혐의가 함께 문제될 때에는, 사건 전체가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따지기보다 각 혐의가 어떤 요건을 갖추어야 성립하는지를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2) 합의가 갖는 의미는 혐의마다 다릅니다. 단순폭행죄는 반의사불벌죄이므로 피해자의 명시적인 처벌불원 의사가 확인되면 처벌할 수 없지만, 재물손괴죄는 반의사불벌죄가 아니어서 피해자와 합의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사건이 종결되지는 않습니다.
3) 의뢰인이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대응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때에는 의뢰인의 기억이 아니라 객관적인 자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새벽에 경찰서로 갔을 때 의뢰인은 사건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출근 준비를 하던 이른 아침에 연락을 받았습니다. 젊은 의뢰인이 새벽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있으니 곧바로 가봐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건 내용을 자세히 확인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경찰서로 향했습니다.
경찰서에 도착했을 때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습니다. 의뢰인은 만취한 상태에서 체포되었고, 새벽 동안 경찰서 안에서 한동안 소란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의뢰인의 상태였습니다. 제가 도착한 시점에도 의뢰인은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물을 마시게 하고 한참을 기다린 뒤, 겨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의뢰인은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변호인이 사건을 파악할 때 가장 먼저 듣게 되는 것은 의뢰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는 그 출발점이 아예 없었던 셈입니다. 당시 상황만 놓고 보면, 변호사의 입장에서도 사건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기억이 없다고 해서 사건을 다툴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의뢰인의 기억에 의존할 수 없다면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서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담당 수사관과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건 당시의 상황부터 다시 확인했습니다. 피해자가 어떤 내용으로 신고를 하였는지, 현장에서 무엇이 확인되었는지, 수사기관이 어느 부분을 문제 삼고 있는지를 하나씩 정리했습니다.
그렇게 확인된 사실관계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의뢰인이 피해자를 폭행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과정에서 피해자의 오토바이가 넘어져 손상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폭행 부분은 다툴 여지가 사실상 없었습니다. 피해자가 곧바로 신고를 하였고, 피해자의 진술과 당시의 정황이 서로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오토바이가 넘어져 손상되었다는 사실 역시 현장에서 확인된 이상 부인하기 어려웠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사건 전체가 불리해 보입니다. 그런데 형사사건에서는 '사건 전체가 유리한가, 불리한가'보다 먼저 각 혐의가 어떤 요건을 갖추어야 성립하는지를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의 사실관계로 보이는 일도 혐의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대응 방법이 달라질 수 있고, 유불리 역시 다르게 판단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에서도 폭행과 재물손괴는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법적으로는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폭행은 합의로 정리되었지만, 오토바이 문제는 합의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폭행 혐의에 관해서는 사실관계를 다투기보다 피해 회복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응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폭행죄는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히면 처벌할 수 없는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피해자가 원만하게 협조해 주었습니다. 피해 회복을 위한 금액을 지급한 뒤 피해자로부터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가 담긴 서면을 받아 경찰에 제출하였습니다. 폭행 혐의에 관해서는 피해자의 명시적인 처벌불원 의사가 확인되면서 형사절차상 중요한 문제가 정리되었습니다.
문제는 오토바이였습니다. 오토바이 수리에 필요한 비용까지 모두 지급하고, 피해자로부터 이 사건과 관련하여 더 이상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확인을 받았지만, 그것만으로 재물손괴 혐의가 정리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재물손괴죄는 폭행죄와 달리 반의사불벌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정은 참작 사유가 될 뿐이고, 그 자체로 사건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결국 재물손괴 혐의는 합의와 별개로 범죄가 성립하는지를 따로 판단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오토바이가 실제로 넘어졌다면, 재물손괴죄가 되는 것 아닐까요?
오토바이가 넘어져 손상이 발생한 것은 분명했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이 부분을 다툴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당시 현장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수사기관도 이 영상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고, CCTV 영상의 내용에 따라 재물손괴 혐의에 대한 결론이 달라질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의뢰인이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상,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영상뿐이기도 하였습니다.
영상에서 확인된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의뢰인은 오토바이에 기대어 통화를 하고 있었고, 통화 도중 휴대전화를 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이를 줍기 위해 팔을 뻗으며 몸을 숙이는 과정에서 오토바이가 넘어졌고, 그때 의뢰인 역시 오토바이와 함께 넘어졌습니다.
의뢰인이 오토바이를 밀어서 넘어뜨리려는 동작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하나의 질문이 남습니다. 오토바이가 실제로 넘어져 손상이 발생했다는 사실과, 그 손상에 대하여 형사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같은 문제일까요?
'손상이 발생했다'는 것만으로 재물손괴죄가 성립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재물손괴죄는 타인의 재물을 손괴하거나 은닉하는 등의 방법으로 그 효용을 해하는 범죄입니다(형법 제366조). 그런데 형법은 재물손괴에 관하여 과실범을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실수로 다른 사람의 물건을 망가뜨린 경우에는 그 사실만으로 재물손괴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손상이라는 결과가 발생하였는지와 별개로, 그 손상에 대한 고의가 있었는지를 따로 확인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에서 확인해야 할 것은 오토바이가 넘어졌는지가 아니었습니다. 영상에 담긴 의뢰인의 행동이 '오토바이를 손괴하는 행위'였는지, 아니면 다른 행동을 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손상이 발생한 것인지가 핵심이었습니다.
특히 ‘고의’ 부분에는 함께 살펴볼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의뢰인은 체포되어 경찰서에 온 이후에도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고, 그날 근무를 하던 경찰관들도 그 상태를 직접 보았습니다. 그런 상태였다면 휴대전화를 주우려고 몸을 숙이는 과정에서 오토바이와 함께 넘어지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만취 상태였다는 사정 자체가 고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건에서 의미가 있었던 것은 당시의 상태 자체보다, 그 상태에서 이루어진 구체적인 행동이 CCTV에 어떻게 나타났는지였습니다. 만취 상태라는 사정은 그 행동을 이해하는 하나의 정황으로 고려될 수 있었습니다.
오토바이의 손상이라는 결과만 놓고 보면 재물손괴 혐의를 쉽게 의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는 그 결과가 어떤 행동으로 발생했는지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사건에서는 만취하여 기억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던 의뢰인의 상태가 오히려 ‘고의’ 여부를 의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오토바이의 손상이 아니라 고의 여부로 초점이 옮겨지자 CCTV 영상도 고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처럼 형사사건에서 결과가 발생했다는 사실과 그 결과에 대한 고의가 있었다는 것은 구별해서 보아야 하고, 이를 통해 사건을 해석하는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결국 경찰은 폭행과 재물손괴를 각각 다르게 판단했습니다.
사건은 경찰 단계에서 불송치 결정으로 종결되었습니다. 폭행 혐의는 피해자의 처벌불원 의사가, 재물손괴 혐의는 고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점이 각각 그 이유가 되었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하나의 사건이었지만 두 혐의는 서로 다른 이유로 종결되었습니다. 합의만으로 사건이 정리되었다고 보았다면, 재물손괴 혐의는 별도의 판단을 받지 못한 채 남았을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혐의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각 혐의에 따라 필요한 대응을 나누어 접근한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겠습니다. 고의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과실로 다른 사람의 물건을 손상시킨 경우 형사처벌은 되지 않더라도 손해를 배상할 책임은 남습니다. 이 사건에서 오토바이 수리비를 모두 지급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불리해 보이는 사건이라도, 눈앞에 보이는 결과가 곧 결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결과가 어떤 혐의의 어떤 요건과 연결되는지를 나누어 보는 일에서, 형사사건의 대응은 시작됩니다.
꼭 알아두세요
1) 물건이 실제로 손상되었다고 하여 언제나 재물손괴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재물손괴죄에는 과실범 처벌 규정이 없기 때문에, 손괴의 고의가 있었는지를 별도로 살펴보아야 합니다(형법 제366조).
2) 합의가 갖는 의미는 혐의마다 다릅니다. 폭행죄는 반의사불벌죄이므로 피해자의 처벌불원 의사가 확인되면 처벌할 수 없지만(형법 제260조 제3항), 재물손괴죄는 반의사불벌죄가 아니어서 합의는 참작 사유에 그칩니다.
3) 형사책임이 인정되지 않더라도 민사상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과실로 다른 사람의 물건을 손상시킨 경우에는 형사처벌과 별개로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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