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해 보겠습니다. 결혼 15년째인 부부 중 남편이 3년 전 퇴직금 6,000만 원을 중간정산받았는데, 아내는 그 돈의 행방을 모릅니다. 이혼을 준비하며 통장을 열어 보니 잔액은 비어 있고, 남편은 "생활비로 다 썼다"고 합니다. 이미 쓴 돈은 원칙적으로 분할 대상이 아니지만, 가족을 위해 쓰지 않고 혼인이 틀어질 무렵 임의로 써 버린 돈이라면 법원이 아직 있는 재산처럼 계산에 넣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인지는 돈이 쓰인 시기와 용도, 그리고 그것을 자료로 보여 줄 수 있는지에서 갈립니다.
현존 재산이라는 출발선
재산분할은 이혼 시점에 실제로 남아 있는 재산을 나누는 제도입니다. 민법 제839조의2 제2항은 법원이 쌍방이 협력해 이룬 재산의 액수와 그 밖의 사정을 참작해 분할의 액수와 방법을 정하도록 하는데, 이것이 부부 재산을 나누는 근거입니다. 소송에서는 사실심 변론종결일 현재 남아 있는 재산이 대상이 되는 것이 기본 흐름입니다. 3년 전에 받아 이미 쓴 퇴직금은 그날 통장에도 부동산에도 없으니, 재산 목록에 오르지 않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그렇다고 "썼으니 끝"은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이 사건에서 정산일은 결론을 정하지 못하고, 돈이 어디로 갔는지가 결론을 정합니다. 같은 6,000만 원이 전셋집 보증금에 보태졌다면 그 보증금이 분할 대상이고, 가족 생활비로 소진됐다면 부부가 함께 쓴 셈이죠.
정산을 받은 때가 별거 이후였더라도 그 돈이 혼인 중 일한 대가라면 분할 대상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별거 뒤에 새로 번 소득처럼 상대의 협력과 무관하게 생긴 재산은 제외되거나 비중이 낮아질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인지는 돈이 생긴 원인이 혼인 중 협력이었는지로 따집니다.
퇴직금이라는 재산의 성격
퇴직금은 일한 기간에 대한 임금의 후불 성격이 있어, 혼인 중 근무한 몫은 부부가 함께 이룬 재산으로 다뤄집니다. 아직 받지 않은 퇴직금도 대법원이 2014년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장래의 퇴직급여채권을 분할 대상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본 뒤로 재산분할에서 다룹니다. 이미 받아 남아 있는 퇴직금은 더 분명한 대상입니다. 혼인 전부터 다닌 직장이라면 혼인 이전 근무분을 어떻게 볼지가 따로 쟁점이 됩니다.
받은 돈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도 따집니다. 예금이나 투자 계좌로 남았다면 그 계좌가, 부동산 구입 대금으로 쓰였다면 그 부동산이 현존 재산입니다. 퇴직금이라는 이름은 사라져도 돈이 형태를 바꿔 남아 있으면 분할 대상이라는 뜻이거든요.
중간정산은 아무 때나 되지 않습니다.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은 무주택자의 주택 구입이나 전세금 부담, 6개월 이상의 요양처럼 정해진 사유가 있을 때만 중간정산을 허용합니다. 그래서 회사에 낸 신청 사유가 소비 경위의 첫 단서가 됩니다. 사유가 '주택 구입'이었는데 새로 산 집이 없다면,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 물을 이유가 생깁니다.
쓴 돈이 되살아나는 경계
경계선은 용도와 시기입니다. 부부 공동생활에 쓴 돈은 이미 공동재산으로 소비된 것이어서 분할에 반영하지 않습니다. 생활비, 자녀 양육·교육비, 부부 공동 채무 변제가 여기에 들어갑니다.
반대로 혼인이 파탄에 이르렀거나 이혼소송이 시작된 뒤에 도박·유흥·제3자 지출처럼 가정 밖에서 쓴 돈은 다릅니다. 법원은 한쪽이 부당하게 처분한 재산을 분할 대상에 포함하고, 쓴 사람이 그만큼을 이미 가져간 것으로 보아 몫을 계산합니다. 현존하지 않는 돈이 분할에 반영되는 길이 바로 여기입니다. 다만 모든 소비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어서, 용도가 가정 밖이었는지와 상대방이 알거나 동의했는지가 함께 따져집니다.
"내 이름으로 번 돈이니 내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오해가 흔합니다. 명의가 한쪽이어도 혼인 중 번 소득과 퇴직금에는 상대의 가사·양육 기여가 반영되므로 이 논리는 통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쪽 부모의 병원비나 빚을 갚는 데 쓴 경우는 가정 밖 소비로 볼지가 사안마다 다릅니다.
소비 시점이 혼인 파탄과 얼마나 가까운지도 중요한 사정입니다. 정산 직후 부부 사이가 평온했다면 그 뒤의 지출을 부부 생활의 일부로 보는 쪽에 가깝고, 파탄 직전이거나 별거 뒤라면 사사로운 처분으로 볼 여지가 커집니다.
금액은 같아도 쓰인 자리에 따라 결론이 정반대가 되는 겁니다.
소비 경위를 밝히는 방법
쓴 쪽은 보통 "생활비로 썼다"고만 하고 세부를 내놓지 않죠. 이때 법원은 금융거래정보 제출명령과 사실조회로 퇴직금 입금일 전후의 계좌 흐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입금 직후 큰 금액이 제3자 계좌로 나갔는지, 며칠에 걸쳐 현금으로 빠졌는지가 드러나면 '생활비' 주장은 날짜와 금액으로 검증됩니다.
상대의 통장을 직접 들여다볼 방법이 없어 막막할 텐데요, 처음 필요한 것은 확정된 증거가 아니라 정산 시기와 금액이라는 단서입니다. 퇴직소득 원천징수영수증과 정산 전후의 통장 거래내역이 핵심이고, 둘 다 없어도 상담은 시작됩니다. 상대의 휴대폰이나 계정을 몰래 여는 방법은 그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어 쓰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상대의 대응은 대체로 두 갈래입니다. 하나는 "생활비와 대출 이자로 썼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도 알고 동의한 돈"이라는 주장입니다. 앞의 주장은 계좌 흐름과 가계 지출 내역으로, 뒤의 주장은 당시 오간 메시지와 부부의 형편으로 검증됩니다. 어느 쪽이든 말이 아니라 날짜가 붙은 자료가 판단의 재료가 됩니다.
상대가 정산 사실과 쓴 곳을 인정하고 금액에도 다툼이 없다면, 협의이혼 단계에서 그 금액을 반영한 합의서를 직접 작성해 정리해도 됩니다. 쓴 곳 자체를 두고 말이 엇갈리면 협의로는 끝나기 어렵고, 재판에서 소비 경위를 다투게 됩니다.
재판에서는 분할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쪽이 정산 사실과 함께 가정 밖 소비를 짐작하게 하는 단서를 내야 합니다. 쓴 쪽이 구체적 사용처를 설명하지 못하면 법원이 그 사정을 분할 비율에 참작할 수 있습니다.
숫자로 따라가는 반영
처음의 가정에 숫자를 넣어 보겠습니다. 현존 재산이 남편 명의 1억 원, 아내 명의 1억 원으로 합계 2억 원이고, 분할 비율은 5대5로 보며, 법원이 6,000만 원 가운데 3,000만 원은 생활비로, 나머지는 가정 밖 소비로 인정했다고 하겠습니다.
가정 밖 소비 3,000만 원은 남편이 이미 가져간 것으로 보아 대상 재산에 더합니다. 그러면 대상 재산은 2억 3,000만 원이고 각자 몫은 1억 1,500만 원입니다. 아내가 가진 재산이 1억 원이니 1,500만 원이 모자라, 남편이 이만큼을 지급하는 구조가 되는 겁니다. 생활비로 인정된 3,000만 원은 계산에서 빠지고, 가정 밖 소비만 더해집니다.
6,000만 원 전액이 생활비로 인정되면 대상 재산은 2억 원 그대로이고 지급액도 없습니다. 기여도 비율도 혼인 기간, 맞벌이 여부, 가사와 양육의 분담에 따라 달라지므로 5대5는 설명을 위한 가정일 뿐입니다. 비율이 달라지면 지급액도 달라집니다.
반대로 입증이 끝내 되지 않으면 법원은 그 돈을 계산에 넣지 않습니다. 정산 사실만 있고 가정 밖 소비를 보여 줄 단서가 없다면 현존하는 재산만 나누게 되므로, 계좌 흐름 같은 단서의 유무가 결과를 가릅니다.
청구 기한과 남은 수단
이미 이혼한 뒤라면 기한이 먼저입니다. 민법 제839조의2 제3항은 재산분할청구권을 이혼한 날부터 2년이 지나면 행사하지 못하도록 정하며, 협의이혼은 신고일, 재판상 이혼은 판결 확정일이 시작점입니다. 이혼소송에서 재산분할을 함께 청구했다면 이 기간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소송 중에 남은 재산마저 줄어들까 걱정된다면 재산분할청구권을 지키기 위한 가압류를 검토할 수 있습니다. 퇴직금 정산 때처럼 상대가 재산을 먼저 움직일 조짐이 보일 때 쓰는 수단입니다.
이미 합의서에 서명했다면 다시 다툴 수 있는지가 궁금할 텐데, 상대가 퇴직금 정산을 숨긴 채 합의를 이끌었다면 다툴 여지가 있습니다. 다만 합의서에 "이후 재산 문제로 서로 청구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있으면 길이 좁아지거든요. 합의 당시 상대가 무엇을 알렸는지가 판단에 들어갑니다.
첫 통화에서 변호사가 묻는 것은 세 가지 정도입니다. 퇴직금을 정산받은 시기와 대략의 금액, 그 뒤 돈이 어디에 쓰였다고 들었는지, 지금이 협의이혼 준비 중인지 소송 중인지 이미 이혼한 뒤인지입니다. 기억나는 대로 말씀하시면 되고, 흐린 부분은 흐린 대로 두셔도 됩니다. 필요한 자료는 그 통화가 끝난 뒤에 정해집니다.
로톡의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콘텐츠 내용에 대한 무단 복제 및 전재를 금지하며, 위반 시 민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