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준 것인지, 처음부터 갚을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연인 관계에서 벌어진 수억 원대 사기, 피해자 대리로 징역 3년 선고까지
"민사 아니냐"는 말을 넘어서기까지, 검사 출신 변호사가 직접 겪은 이야기
"변호사님, 제가 바보인 건 알아요. 그냥 그 사람을 믿었던 거예요."
그녀가 내 앞에서 처음 꺼낸 말이었다.
두 손은 꼭 쥐어져 있었고, 말하는 내내 자신을 탓했다.
피해를 말하러 온 사람이 가해자보다 먼저 자기 잘못을 꺼내는 일은, 이런 사건에서 드물지 않다.
그녀는 30대 초반의 직장인 H씨였다.
피해 금액은 수억 원이었다. 오래 모은 적금과, 대부업체에서 빌린 대출금까지 합친 돈이었다.
상대는 수년간 연인 관계였던 K씨였다.
나는 서류를 펼치고 경위를 처음부터 들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면 갚겠다"는 말이 있었다.
"사업이 잘되면 전부 돌려주겠다"는 말도 있었다.
H씨는 그 말들을 믿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차용증이 아니라, 그때 그 사람의 사정을 보아야 한다
H씨가 가장 걱정한 것은 이것이었다.
"연인 사이에 빌려준 돈인데, 민사 아닌가요?"
상담에서 수없이 듣는 질문이다.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한 것만으로는 범죄가 되지 않습니다. 사업이 안 돼서 못 갚는 일은 얼마든지 있어요.
갈림길은 돈을 받아 가던 그 시점에 있습니다.
그때 갚을 생각과 갚을 형편이 있었다면 민사 문제입니다.
그때 이미 갚을 수 없는 상태였고 그 사실을 숨긴 채 받아 갔다면, 그때는 형사사건이 됩니다."
사기죄에서 문제 되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돈을 받아 가던 순간의 상태다.
그리고 그 속마음은 본인이 인정하지 않는 한 직접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법원은 당시의 재산 상태, 돈을 빌린 경위, 실제로 그 돈을 어디에 썼는지, 그 뒤의 태도 같은 객관적인 사정을 모아서 판단한다.
검사로 일하던 시절, 나는 사기 고소장을 적지 않게 읽었다.
민사와 형사의 경계에 있는 사건에서 결론을 가르는 것은 피해자의 억울함의 크기가 아니었다.
그 시점의 사정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느냐 없느냐였다.
세 가지 사정을 순서대로 정리했다
나는 H씨를 대리해 고소를 진행하면서, 수사기관에 세 가지를 정리해 제출했다.
첫째, 빌린다고 말한 용도와 실제로 쓴 곳이 달랐다는 점이다.
K씨는 구체적인 용도를 대며 돈을 받아 갔다.
그러나 그 돈은 그 용도로 쓰이지 않았다.
말한 용도와 실제 사용처가 다르다는 것은, 처음부터 그 말이 돈을 받아 내기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사정이 된다.
둘째, 이미 빌려준 돈을 지렛대로 삼았다는 점이다.
K씨는 연인 관계가 끝난 뒤에도 돈을 요구했다.
"이번에 안 빌려주면 지난번 돈도 못 갚는다"는 식이었다.
H씨는 이미 건넨 돈이 있었기 때문에 거절하기 어려웠다.
한 번의 거래가 아니라, 앞의 채무를 인질로 삼아 이어진 요구였다.
셋째, 처음부터 갚을 형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K씨는 당시 이미 빚이 재산을 넘어선 상태였고, 본인 명의로는 정상적인 금융거래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스스로 대출을 받을 수 없게 되자, H씨에게 대부업체 대출을 받게 해 그 돈을 받아 갔다.
갚을 생각이 있는 사람이 상대방을 새로운 빚의 통로로 쓰지는 않는다.
나는 이 사정들을 시점 순서대로 정리했다.
돈이 오간 날짜, 그때 K씨가 한 말, 그 무렵 K씨의 재산 상태, 그 돈이 실제로 흘러간 곳을 한 줄에 놓고 보이도록 했다.
고소장을 내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고소장을 제출하면 사건이 알아서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실제로는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연인 사이의 금전 거래는 수사기관에서도 민사 분쟁으로 보이기 쉽다.
차용증이 없고, 이체 내역에 아무 설명이 없고, 대화에는 애정 표현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해자를 대리하는 일의 상당 부분은, 이 사건이 왜 단순한 대여금 분쟁이 아닌지를 자료로 보여주는 일이다.
나는 보충의견서를 통해 K씨의 당시 재산 상태, 돈의 실제 사용처, 돈을 요구할 때 한 말의 내용과 시점, 관계가 끝난 뒤에도 이어진 요구를 순서대로 정리해 제출했다.
자료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각 자료가 어떤 요건을 뒷받침하는지를 함께 적었다.
K씨는 기소되었고, 법원은 징역 3년을 선고했다.
다만 유죄 판결이 곧 돈을 돌려받는 것은 아니다.
피해 회복은 별도의 절차로 진행해야 하고, 상대방에게 재산이 남아 있는지에 따라 현실적인 결과가 달라진다.
이 점은 처음부터 H씨에게 분명히 말씀드렸다.
연인에게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면, 이것부터 확인하라
① 자책부터 하지 마라.
가까운 사람의 말을 믿은 것은 잘못이 아니다.
상대방이 그 신뢰를 이용했는지가 문제다.
② 지금 남아 있는 기록부터 보존하라.
메신저 대화, 문자, 통화 녹음, 이체 내역을 그대로 저장해 두어야 한다.
"갚겠다", "사업이 잘되면 돌려주겠다"는 말이 오간 대목이 특히 중요하다.
관계가 정리되었다는 이유로 대화방을 삭제하면 되돌리기 어렵다.
③ 돈이 오간 시점을 기준으로 정리하라.
언제, 얼마를, 어떤 말을 듣고 건넸는지를 날짜별로 표처럼 정리해 두면 이후 절차가 훨씬 수월해진다.
여러 차례에 걸쳐 있었다면 건별로 나누어 정리해야 한다.
④ 상대방의 당시 형편을 보여주는 자료를 찾아라.
다른 채무, 신용 문제, 계좌 사용 제한 같은 사정은 돈을 받아 가던 시점의 상태를 보여준다.
다만 상대방의 금융정보를 직접 조회하거나 몰래 알아내는 것은 별도의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확보 방법은 변호인과 상의해야 한다.
⑤ 형사와 민사를 함께 검토하라.
형사고소만으로 돈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상대방의 재산을 미리 확보하는 조치가 필요한 경우가 있고, 시기를 놓치면 실익이 줄어든다.
⑥ 상대방과 직접 협상하려 하지 마라.
감정이 얽힌 관계에서는 대화가 다른 분쟁으로 번지기 쉽다.
연락은 기록이 남는 방식으로만 하고, 교섭은 대리인을 통하는 편이 안전하다.
침묵이 가장 먼저 보호하는 것
선고 뒤 H씨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저는 괜찮아요. 이제 진짜로."
연인 사이의 사기는 피해자가 가장 오래 말하지 못하는 사건이다.
고소하는 일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H씨도 사무실에 오기까지 몇 달을 혼자 버텼다. 자신을 탓하면서.
그러나 법은 누가 더 어리석었는지를 따지지 않는다.
돈을 받아 가던 그 시점에 갚을 생각이 있었는지를 따진다.
그 사이 침묵이 지켜주는 것은 피해자가 아니다.
연인에게 빌려준 돈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면, 혼자 판단하지 말고 남아 있는 기록부터 정리해 상담받아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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