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성추행 사건은 단둘이 있는 공간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CCTV나 녹음 같은 객관적 증거가 없는 것이 원칙에 가깝고,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대법원은 피해자 진술만으로도 그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되며 경험칙에 부합하면 유죄를 인정할 수 있다는 법리를 확립해 두었습니다.
결국 이 싸움의 승패는 "증거가 있느냐"가 아니라 "피해자가 얼마나 빨리, 얼마나 잘 준비했느냐"에서 갈립니다. 검사로 10년 가까이 성폭력 사건을 수사하고 지금은 변호사로 피해자 곁에 서면서 확인한 결론입니다.
증거가 없는데 고소하면 정말 지는 싸움일까요?
형법은 제297조에서 강간을, 제298조에서 강제추행을 처벌하면서, CCTV나 녹음을 요건으로 두고 있지 않습니다.
대법원은 2018년 10월 2018도7709 판결에서 성폭력 사건을 심리하는 법원은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하고,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습니다. 또한, 대법원은 2020년 8월 2020도6965 판결에서 성폭행 피해자의 대처 방식은 성격이나 가해자와의 관계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마땅히 그래야 하는 피해자"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진술을 배척할 수 없다고 못 박았고, 같은 해 10월 2019도4047 판결에서도 이를 재확인했습니다.
다시 말해 법원은 이미 "객관적 증거가 없는 것이 성폭력 사건의 본질"이라는 점을 전제로 재판합니다. 문제는 그 피해자 진술을 신빙성 있게 만들어 줄 '정황'을 피해자 스스로 지워 버리는 경우입니다.
피해 직후 무엇을 해야 하나요?
1. 피해자는 피해 직후 씻거나 옷을 세탁하지 말고 가까운 해바라기센터를 찾아 증거 채취와 상담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신체 증거는 통상 72시간 안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2. 피해자는 그날 안으로 휴대폰 메모 앱에 시간·장소·가해자의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적어 두어야 합니다. 메모 앱은 작성 시각이 자동 기록되기 때문에 뒤에 "지어냈다"는 공격을 막는 가장 싼 증거가 됩니다.
3. 피해자는 가장 믿는 사람 한 명에게라도 즉시 피해 사실을 말하고 그 대화를 카카오톡이나 문자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검사 시절 제가 기소 여부를 판단할 때 가장 무겁게 본 것이 바로 "피해 직후 누구에게 무엇을 말했는가"였습니다.
4. 피해자는 가해자에게서 온 사과 문자, 회유 전화, "그날 미안했다"는 메시지를 절대 삭제하지 말고 화면 캡처와 함께 원본을 보존해야 합니다. 가해자의 사후 태도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핵심 간접증거입니다.
5. 피해자는 사건 현장 주변 상가·건물의 CCTV가 보통 30일 안에 덮어씌워진다는 점을 알고 즉시 경찰에 보존 요청을 해야 합니다. 방 안은 못 찍었어도 함께 들어가고 따로 나오는 장면, 시간대는 찍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뒤늦게 고소하면 어떤 어려움이 생기나요?
• 피해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흐려져 진술이 조금씩 달라지고, 가해자 측은 그 사소한 불일치를 '진술 번복'이라고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대법원이 피해자다움을 요구하지 말라고 했어도 진술 자체의 일관성은 여전히 심사 대상입니다.
• 피해자는 뒤늦게 고소할 경우 "왜 이제 와서 고소하느냐"는 질문에 답해야 하고, 가해자 측은 예외 없이 금전 목적이나 보복 목적을 주장하며 무고 고소로 맞불을 놓습니다.
• 피해자는 CCTV·출입기록·통화내역이 이미 삭제된 상태에서 진술만으로 싸워야 하고, 피해 직후 들었던 지인들의 기억도 함께 흐려져 참고인 진술의 힘이 떨어집니다.
• 피해자는 공소시효도 확인해야 합니다. 강간과 강제추행은 형사소송법 제249조에 따라 원칙적으로 10년이고, 성폭력처벌법 제21조에 따라 DNA 등 과학적 증거가 있으면 10년이 연장되며, 미성년 피해자는 성년이 될 때까지 시효가 정지되고, 13세 미만·장애인 대상 강간 등은 시효가 아예 배제됩니다. 시효가 남았다고 안심할 문제가 아니라, 시효 안에서도 하루하루 증거가 사라진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고소하면 피해자가 오히려 힘들어지지 않나요?
• 피해자는 2013년 6월 친고죄 규정이 폐지된 뒤로 합의 압박이나 고소 취하 요구에서 법적으로 자유로워졌고, 수사기관은 고소가 취하되어도 수사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 피해자는 성폭력처벌법 제27조에 따라 국선변호사를 선정받을 수 있고, 제34조에 따라 조사와 재판에 신뢰관계인을 동석시킬 수 있습니다.
• 피해자는 첫 경찰 진술 전에 반드시 변호사와 사실관계를 시간순으로 정리해 두어야 합니다. 첫 진술조서는 이후 모든 진술의 기준점이 되고, 여기서 생긴 오류는 재판 끝까지 따라다닙니다.
성폭력 사건에서 증거는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남기느냐, 사라지게 두느냐"의 문제입니다. 오늘 메모 한 줄, 문자 한 통, 병원 방문 한 번이 1년 뒤 법정에서 가해자의 변명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증거가 됩니다.
망설이는 동안 웃는 사람은 가해자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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