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상대방이 자신을 누군가의 대리인이라고 소개해 계약을 맺었는데, 정작 그 본인이 나중에 계약을 추인하지 않겠다고 하면 상대방은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계약 자체는 본인에게 효력이 미치지 않아 무효로 확정되지만, 그렇다고 계약을 체결한 대리인이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민법은 대리권 없이 계약을 맺은 사람에게 상대방을 보호하기 위한 별도의 개인적 책임을 지우고 있고, 이 책임은 대리인에게 잘못이 있었는지와 무관하게 인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글에서는 본인이 추인을 거절한 무권대리 계약에서 상대방이 대리인 개인에게 이행이나 손해배상을 청구하려면 어떤 요건을 갖춰야 하는지, 이행과 배상 중 무엇을 선택할 수 있고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짚어보겠습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무권대리 계약, 추인 거절이 확정되기까지
민법 제130조는 "대리권없는 자가 타인의 대리인으로 한 계약은 본인이 이를 추인하지 아니하면 본인에 대하여 효력이 없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즉 대리권 없는 사람이 체결한 계약은 처음부터 확정적으로 무효인 것이 아니라, 본인이 추인하면 계약 당시로 소급해 유효해지고 추인을 거절하면 그때 비로소 본인에 대한 관계에서 무효로 확정되는 유동적인 상태에 놓입니다. 이 소급효 때문에 상대방 입장에서는 본인이 추인할지 거절할지가 정해지기 전까지는 계약 관계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이 불안정한 상태가 끝나는 경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본인이 명시적으로 추인을 거절하는 의사표시를 하는 경우로, 민법 제132조에 따라 그 의사표시가 상대방에게 도달해야(또는 상대방이 그 사실을 안 때) 상대방에게 대항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상대방이 민법 제131조의 최고권을 행사해 본인에게 상당한 기간을 정해 추인 여부의 확답을 요구했는데도 본인이 그 기간 내에 확답하지 않은 경우로, 이때는 법률상 추인을 거절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어느 경로든 일단 거절이 확정되면 계약이 본인에게 무효라는 결론 자체는 그 후 본인이 마음을 바꾸더라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계약이 본인에게 무효로 확정됐다고 해서 상대방이 입은 손해나 기대했던 이익이 그냥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민법은 이런 상황을 대비해 계약을 체결한 대리인 개인에게 별도의 책임을 지우는 규정을 두고 있고, 이것이 바로 다음 항목에서 살펴볼 민법 제135조입니다.
본인의 추인 거절이 확정되는 순간 계약이 본인에게 무효라는 결론 자체는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그 계약을 체결한 대리인에게는 별도의 법정 책임, 즉 민법 제135조의 무권대리인 책임이 남는다.
대리인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근거 — 민법 제135조의 무과실책임
민법 제135조 제1항은 "다른 자의 대리인으로서 계약을 맺은 자가 그 대리권을 증명하지 못하고 또 본인의 추인을 받지 못한 경우에는 그는 상대방의 선택에 따라 계약을 이행할 책임 또는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규정합니다. 대법원은 이 조문의 취지에 대해, 대리권의 유무는 대리인과 본인 사이의 내부적 관계에 불과해 상대방으로서는 그 존부를 쉽게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대리권이 있다고 믿었던 상대방을 보호해 거래의 동적 안전을 지키려는 규정이라고 설명합니다(대법원 1962. 4. 12. 선고 4294민상1021 판결).
이 책임의 가장 큰 특징은 무과실책임이라는 점입니다. 대법원 2014. 2. 27. 선고 2013다213038 판결은 무권대리인의 상대방에 대한 책임이 대리권 흠결에 관하여 대리인에게 과실 등의 귀책사유가 있어야만 인정되는 것이 아니고, 무권대리행위가 제3자의 기망이나 문서위조 등 위법행위로 야기되었다고 하더라도 책임이 부정되지 않는다고 판시했습니다. 즉 대리인 자신이 위조된 위임장에 속아 계약을 체결한 피해자였다고 하더라도, 상대방과의 관계에서는 그 사정만으로 책임을 면하지 못하며, 대리인은 이후 자신을 속인 사람을 상대로 별도로 구상하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문제로 남습니다.
이 점에서 제135조 책임은 표현대리가 성립하는지와도 별개입니다. 표현대리가 인정되면 애초에 계약 자체가 본인에게 효력을 갖게 되지만, 표현대리 요건을 갖추지 못해 계약이 본인에게 확정적으로 무효가 된 순수한 무권대리 상황에서, 상대방을 구제하는 마지막 수단으로 기능하는 것이 바로 이 조문입니다.
대리인 개인책임이 성립하는 요건
대리인 개인에게 이행이나 배상을 청구하려면 다음 요건이 함께 갖춰져야 합니다.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제135조에 따른 책임을 물을 수 없으므로, 청구에 앞서 하나씩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리인이 본인을 위한 것임을 표시하고(현명) 계약을 체결했을 것 — 자신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누구의 대리인"으로서 행위했어야 한다.
그 사람이 자신에게 대리권이 있었음을 증명하지 못할 것 — 위임장이나 본인의 확인 등으로 대리권을 입증하면 애초에 무권대리가 아니다.
본인의 추인을 받지 못했을 것 — 명시적 거절(제132조)이든 최고기간 도과에 따른 거절 간주(제131조)든, 추인이 확정적으로 없는 상태여야 한다.
상대방이 계약 당시 대리권 없음을 몰랐고, 몰랐던 데 과실도 없을 것(선의·무과실) — 알았거나 알 수 있었다면 제135조 책임이 배제된다.
대리인으로 행위한 사람이 제한능력자가 아닐 것 — 미성년자 등 제한능력자였다면 그 보호가 우선해 이 책임이 적용되지 않는다.
대리행위의 표시, 대리권 증명 실패, 추인 거절의 확정, 상대방의 선의·무과실, 대리인의 행위능력 — 이 다섯 가지가 모두 갖춰져야 대리인 개인에게 이행이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상대방의 선의·무과실, 입증책임은 누구 몫인가
민법 제135조 제2항은 "대리인으로서 계약을 맺은 자에게 대리권이 없다는 사실을 상대방이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 또는 대리인으로서 계약을 맺은 사람이 제한능력자일 때에는 제1항을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정합니다. 상대방을 보호하려는 제1항의 취지에 비추어, 대리권 없음을 이미 알았거나 조금만 주의했다면 알 수 있었던 상대방까지 보호할 필요는 없다는 예외 규정입니다.
그런데 이 예외 사유는 상대방이 아니라 무권대리인 쪽에서 주장하고 증명해야 합니다. 대법원 1962. 1. 11. 선고 4294민상202 판결과 1962. 4. 12. 선고 4294민상1021 판결이 이 법리를 확립했고, 대법원 2018. 6. 28. 선고 2018다210775 판결도 "제2항은 무권대리인의 무과실책임 원칙 규정인 제1항에 대한 예외 규정이므로 상대방이 대리권 없음을 알았다는 사실 또는 알 수 있었는데도 알지 못하였다는 사실에 관한 주장·증명책임은 무권대리인에게 있다"고 다시 확인했습니다.
실무에서 자주 벌어지는 오해는, 상대방이 계약 당시 위임장이나 인감증명을 꼼꼼히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곧바로 상대방에게 과실이 있다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4294민상202 판결의 원심은 상대방이 대리권 유무를 더 확인하지 않고 계약서에 날인했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과실을 인정했으나, 대법원은 그런 확인 소홀 정도의 사정만으로는 부족하고 대리권 없음을 알 수 있었던 구체적 정황을 무권대리인 쪽에서 입증해야 한다며 이 판단을 파기했습니다.
이행을 선택하면 무엇을 받을 수 있나 — 대리인이 곧 계약당사자가 된다
상대방이 이행을 선택하면 그 효과가 어디까지 미치는지가 실무에서 자주 다퉈집니다. 대법원 2018. 6. 28. 선고 2018다210775 판결은 이 점을 명확히 정리했는데, 상대방이 계약의 이행을 선택한 경우 무권대리인은 "그 계약이 본인에게 효력이 발생하였더라면 본인이 상대방에게 부담하였을 것과 같은 내용의 채무를 이행할 책임"이 있고, 무권대리인은 마치 자신이 계약의 당사자가 된 것처럼 계약에서 정한 채무를 이행할 책임을 진다고 판시했습니다.
다만 이행선택이 항상 실효적인 것은 아닙니다. 계약의 목적물이 대리인 소유가 아닌 특정 부동산의 소유권 이전처럼 대체가 불가능한 급부라면, 대리인 개인이 그 소유권을 넘겨줄 방법 자체가 없어 이행 자체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안에서는 이행선택의 실익이 떨어지고 결국 손해배상 쪽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반대로 급부가 대체 가능한 금전채무라면 이행선택이 실질적 의미를 가집니다. 위 2018다210775 판결의 사안이 바로 이런 경우로, 매수인 측에서 형제들의 대리인을 자칭한 사람이 부동산 매매계약을 체결했으나 대리권이 없었고 추인도 받지 못했던 사안에서, 매도인은 매매대금 지급이라는 금전채무의 이행이나 그 불이행에 따른 손해배상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습니다.
손해배상을 선택하면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 이행이익과 위약금 조항
손해배상을 선택했을 때 그 범위는 원칙적으로 이행이익, 즉 계약이 본인에게 유효했다면 상대방이 얻었을 이익 상당입니다. 이행책임과 나란히 상대방의 선택에 맡겨진 구조 자체가, 손해배상 역시 계약이 이행됐을 때와 같은 경제적 지위를 회복시켜 주는 손해로 파악해야 함을 뒷받침합니다.
계약서에 채무불이행에 대비한 손해배상액의 예정(위약금) 조항이 있었다면 이 조항은 무권대리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2018다210775 판결은 무권대리인이 계약에서 정한 채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채무불이행에 따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을 지고, 계약에 손해배상액 예정 조항을 둔 때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조항에 따라 산정한 손해액을 지급해야 하며, 이때도 민법 제398조의 손해배상액 예정 감액 규정이 그대로 적용된다고 밝혔습니다.
실제 이 판결의 사실관계를 보면, 매수인 측 대리인은 계약금 잔금조차 지급하지 않은 채 대리권이 없어 매매계약이 무효라고 통보하며 이미 낸 계약금 일부의 반환을 요구했고, 대법원은 이를 매매대금 지급의무의 이행거절 의사표시로 평가했습니다. 계약서에는 계약금 3억 원을 손해배상액 기준으로 삼는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원심은 이 예정액이 부당히 과다하다고 보아 그 10퍼센트 상당인 3천만 원으로 감액했고 대법원도 이 판단을 그대로 수긍했습니다.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쪽에서는 계약서에 이런 예정 조항이 있는지부터 확인하되, 예정액이 실제 손해에 비해 지나치게 크다면 감액 여지가 있다는 점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실무에서 자주 놓치는 지점 — 소멸시효는 언제부터 흐르나
계약의 이행기가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청구권이 시효로 소멸했다고 단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정확한 이해가 아닙니다. 대법원 1963. 8. 22. 선고 63다323 판결은 무권대리인이 대리권을 증명하지 못하고 본인의 추인도 얻지 못한 경우 상대방의 계약이행청구권이나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는 원래 계약의 이행기가 아니라 상대방이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때부터 진행한다고 판시했습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대리권 증명 실패와 추인 거절이 확정되어야 비로소 상대방이 제135조상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므로, 계약의 원래 이행기가 수년 전이라도 추인 거절 확정 시점이 최근이라면 곧바로 시효 도과를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추인 거절이 언제 확정됐는지가 애매하면 그 시점을 둘러싼 다툼의 소지가 남으므로, 본인의 태도가 불분명할 때는 민법 제131조의 최고권을 서면으로 행사해 확답 기한을 명확히 못박아 두는 편이 이후 시효 기산점을 다투는 상황을 줄이는 데 유리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대리인이 자신도 속아서 위임장을 위조당한 피해자라면 책임을 면할 수 있나요?
A. 아니요. 민법 제135조의 책임은 무과실책임이어서 대리권 흠결에 대리인의 고의·과실이 있었는지는 따지지 않습니다. 판례도 제3자의 기망이나 문서위조로 무권대리행위가 이루어졌더라도 상대방에 대한 책임은 부정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다만 그 대리인은 자신을 속인 제3자를 상대로 별도로 구상하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Q. 계약 체결 당시 상대방이 위임장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그것만으로 대리인 책임이 면제되나요?
A. 단순히 위임장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곧바로 과실이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이 대리권 없음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다는 사실은 대리인 쪽에서 주장·증명해야 하므로, 확인 소홀 정도로는 부족하고 구체적인 정황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Q. 대리인으로 계약을 맺은 사람이 미성년자라면 어떻게 되나요?
A. 대리인으로 계약을 맺은 사람이 제한능력자였던 경우에는 민법 제135조 제1항의 책임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거래 안전보다 제한능력자 보호를 우선한 예외 규정이므로, 이 경우 상대방은 대리인 개인에게 이행이나 배상을 청구할 수 없습니다.
Q. 이행과 손해배상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누가 정하나요?
A. 민법 제135조 제1항은 선택권을 상대방에게 부여하고 있어, 계약대로 이행받을지 손해배상을 받을지는 상대방이 정합니다. 다만 목적물이 대리인 소유가 아니어서 이행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한 사안이라면 손해배상만이 실질적인 선택지가 됩니다.
Q. 계약서에 위약금 조항이 있으면 그 금액을 그대로 다 받을 수 있나요?
A. 위약금·손해배상액 예정 조항은 무권대리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 예정액이 부당하게 과다하면 법원이 민법 제398조에 따라 적당히 감액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대법원도 예정된 위약금을 상당 부분 줄인 원심 판단을 그대로 인정한 사례가 있습니다.
Q. 추인 거절이 확정된 지 시간이 많이 지났으면 청구권이 시효로 소멸하나요?
A. 이행청구권이나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는 원래 계약의 이행기가 아니라 상대방이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때, 즉 대리권 증명 실패와 추인 거절이 확정된 시점부터 진행합니다. 계약 이행기가 오래전이라도 추인 거절 확정이 최근이라면 곧바로 시효 도과를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맺음말
본인이 추인을 거절해 계약이 무효로 확정됐다고 해서 상대방이 아무 구제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민법 제135조에 따라 상대방은 대리인 개인을 상대로 이행이나 손해배상 중 하나를 선택해 청구할 수 있고, 이는 대리인의 고의·과실을 따지지 않는 무과실책임이라는 점에서 상대방에게 유리한 구제수단입니다. 다만 상대방이 대리권 없음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경우, 대리인이 제한능력자였던 경우라는 두 가지 예외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실무적으로는 계약 체결 당시의 정황, 즉 위임장이나 본인 확인 절차를 어떻게 거쳤는지를 기록해 두고, 추인 여부가 불분명하다면 최고권을 서면으로 행사해 시효 기산점을 둘러싼 다툼을 줄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해배상을 선택할 때는 계약서에 위약금 조항이 있는지, 그 금액이 실제 손해에 비해 과다하지는 않은지도 함께 따져봐야 합니다.
특히 광교를 비롯한 수원 지역의 고액 부동산 매매계약에서는 가족이나 지인에게 계약을 대신 맡겼다가 대리권 범위를 둘러싼 분쟁으로 번지는 사례가 드물지 않습니다. 계약이 무효로 확정된 뒤에도 대리인 개인을 상대로 한 청구가 남아 있는 만큼, 상황을 정리하기 전에 법률 조력을 받아보시길 권합니다.
의뢰인을 위한 최선의 전략을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로톡의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콘텐츠 내용에 대한 무단 복제 및 전재를 금지하며, 위반 시 민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