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 지급정지로 통장이 묶였을 때 먼저 밟을 절차 — 이의제기와 수사 대응 — 는 앞선 글에서 정리했습니다. 남는 질문은 소송입니다. 피해자를 상대로 채무부존재확인을 구하는 이 소송은 2026년 상반기에만 인용, 기각, 각하가 모두 선고될 만큼 결론이 갈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안이 이기고 어떤 사안이 지는지, 실제 판결을 놓고 짚어 보겠습니다.
이 소송은 처음부터 열려 있던 길이 아닙니다. 통신사기피해환급법은 제정 당시 지급정지된 계좌에 관한 소송 제기를 일괄 금지했다가, 정당한 상거래 대금을 받고도 계좌가 묶이는 부작용이 잇따르자 2018. 3. 13. 개정으로 명의인이 피해자를 상대로 채무부존재확인소송을 낼 수 있는 근거를 신설했습니다(제4조의2 제2항). 다만 소송이 계속 중인 동안에는 그 부분 지급정지가 해제되지 않으므로(제5조 제1항 제5호), 소송은 계좌를 빨리 푸는 수단이 아니라 법원의 판단으로 채권소멸절차를 끝내는 수단이라는 점을 먼저 계산에 넣어야 합니다.
지는 사안의 전형이 2차 계좌 사건입니다. 자동차 수출업체가 수출대금 명목으로 2,200여만 원을 입금받았는데, 알고 보니 랜덤채팅 사기 피해금이 세탁 단계를 거쳐 들어온 돈이었고 피해자의 구제신청으로 연쇄 지급정지가 걸린 사안에서, 법원은 업체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인천지방법원 2026. 6. 10. 선고 2025가단218625 판결). 결론보다 눈여겨볼 것은 그 이유입니다. 이 판결은 채무부존재확인의 소가 피해자 보호라는 입법 목적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제한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전제한 뒤, 이의제기 사유 — 정당한 권원으로 취득했다는 사실 — 의 증명책임을 명의인이 부담한다고 보았습니다. 범인과 피해금 이동경로가 수사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피해자에게 증명을 떠넘기면 법의 취지가 몰각된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거래 상대방과 대금의 경위를 자료로 재구성해 내면 같은 법리 아래에서도 결론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판결의 원고가 진 것은 2차 계좌여서가 아니라 그 재구성을 하지 못해서입니다.
이기는 사안은 이렇게 다릅니다. 지인에게 빌려준 돈 500만 원을 변제 명목으로 송금받았다가 계좌가 묶인 사안에서, 법원은 확인의 이익을 인정하고 청구를 인용했습니다(청주지방법원 충주지원 2026. 6. 16. 선고 2025가단21509 판결). 갈림길이 된 것은 두 가지입니다. 명의인이 편취금인 사정을 알았거나 중대한 과실로 몰랐다고 볼 증거가 없었고, 법원의 경찰서 사실조회에서 명의인이 관련 형사사건의 피의자도 참고인도 아니라는 점이 확인되었습니다. 형사 쪽에서 깨끗하다는 객관적 확인이 민사 승소의 결정적 자료가 된 셈입니다. 소송비용은 각자 부담으로 정해졌지만, 계좌의 지급정지와 채권소멸절차의 불이익을 법원의 판단으로 확정적으로 끝냈다는 것이 이 판결의 실익입니다.
도박자금이 얽힌 경우도 풀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 유형이야말로 소송의 실익이 분명한 쪽입니다. 지급정지의 전제는 그 계좌가 전기통신금융사기의 피해금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인데, 입금된 돈이 도박 사이트의 게임머니 환전대금처럼 피해금과 무관한 돈이라면 피해자에게 반환할 채무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경위를 소명해 인용받은 하급심 판결이 여럿 축적되어 있습니다. 채무자인 명의인이 채무 발생 원인을 부정하면 채권의 존재는 피해자 쪽에서 증명해야 한다는 민사의 일반 법리가 적용되는 데다, 이 유형에서는 피해자가 답변서를 내지 않거나 불출석하는 경우가 많아 무변론으로 조기에 끝난 사안도 있습니다. 관건은 소송의 설계입니다. 최근 확인의 이익을 좁게 보아 소를 각하한 재판부도 있어 제기 전에 관할의 경향을 확인할 필요가 있고, 도박 이용 사실을 어느 범위에서 어떻게 소명할지는 형사 문제와 맞물리므로 진술의 수위와 순서를 정해 놓고 들어가야 합니다. 단순 이용 수준이라면 이 형사 변수는 대부분 관리 가능한 범위에 있고, 묶인 계좌와 사기 연루 의심을 해소하는 실익이 그보다 큰 경우가 많습니다. 소명 자료가 진실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전제입니다 — 꾸며낸 자료로 낸 소송이 형사 입건으로 돌아간 사례가 있습니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23. 10. 10. 선고 2022고단5039 등 판결). 거꾸로 도박자금을 보내 놓고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며 허위로 피해구제를 신청해 계좌를 묶은 상대방에게 손해배상 책임과 형사처벌이 따른다는 점은 계좌 지급정지 해제에 관한 글에서 정리해 두었습니다.
결국 이 소송은 소장을 내기 전에 결과가 거의 정해집니다. 입금 경위를 객관적 자료 — 기존 거래관계, 계약·채권의 존재, 대화 내역, 형사절차에서의 무혐의 확인 — 로 재구성할 수 있는 사안이라면 인용 가능성이 실재하고, 돈의 성격이 밝히기 조심스러운 것이어도 길이 닫히는 것은 아닙니다 — 무엇을 어디까지 소명할지의 설계가 달라질 뿐입니다. 계좌가 묶였다면 입금 내역과 그 돈의 경위를 정리해 내 사안이 어느 유형인지부터 확인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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