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합의서는 대개 한 장짜리 문서입니다. 그런데 그 한 장에 들어가는 문구 몇 개가 형사재판의 결론과 민사상 남은 청구권을 동시에 결정합니다. 가해자 쪽에서 쓸 때와 피해자 쪽에서 쓸 때 주의할 지점이 정반대이므로, 양쪽을 나누어 정리합니다.
가장 무거운 문구는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입니다. 폭행·협박 같은 반의사불벌죄에서 처벌불원 의사표시는 양형 자료에 그치지 않고 공소기각으로 직행하는 소송조건입니다. 그리고 한 번 표시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형사소송법 제232조는 고소 취소를 제1심 판결선고 전까지만 허용하고 취소한 자는 다시 고소할 수 없도록 하는데, 제3항이 이를 반의사불벌죄의 처벌희망 의사표시 철회에 준용합니다. 대법원은 처벌희망 의사표시를 철회한 뒤 다시 처벌을 원한다고 번복해도 효력이 없다고 하고(대법원 2013. 7. 11. 선고 2013도5268 판결), 그 시한도 제1심 판결선고 전까지여서 항소심에서는 철회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되돌릴 수 없다는 법리는 돈 문제와 만나면 이렇게 작동합니다. 피해자가 일부 합의금만 받고 합의서를 써 준 사안에서, 대법원은 피해자가 합의서를 작성·교부함으로써 가해자에게 처벌불원 의사를 수사기관에 표시할 권한을 준 것이므로, 가해자가 그 합의서를 제출한 이상 약속한 나머지 돈을 지급하지 않았더라도 처벌불원 의사는 철회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대법원 2001. 12. 14. 선고 2001도4283 판결). 남는 것은 민사상 합의금 청구권뿐입니다. 그래서 피해자 쪽의 원칙은 단순합니다. 전액 입금을 확인하기 전에는 합의서를 교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분할 지급을 받아야 하는 사정이 있다면 "합의금 전액이 지급된 때에 처벌불원의 효력이 발생한다"는 문구를 명시해야 하는데, 하급심은 그런 명시가 없으면 조건부 처벌불원으로 보지 않는 경향입니다. 반대로 가해자 쪽에서는 합의서 원본을 교부받아 직접 제출하는 것까지가 합의이고, "나중에 처벌불원서를 내주겠다"는 말만 믿고 송금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순서입니다.
'민·형사상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문구는 민사 쪽 지뢰입니다. 이 문구는 부제소 합의로서 원칙적으로 유효하여 이후의 손해배상 청구를 막습니다. 다만 대법원은 그 효력이 합의 당시 예상할 수 있었던 손해에만 미친다고 봅니다. 교통사고 직후 요추 염좌 진단만 있는 상태에서 부제소 합의를 했는데 뒤에 수핵탈출증이 드러난 사안에서, 합의 당시 예상할 수 없었던 손해에는 합의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며 추가 청구를 허용했습니다(대법원 1991. 12. 13. 선고 91다30057 판결). 판단 요소는 후발손해의 중대성과 예견 가능성, 그리고 합의금의 규모입니다. 피해자 쪽에서는 "본 합의는 현재까지 진단된 상해에 관한 것"이라는 한정 문구를 넣어 두면 후발손해 다툼에서 유리해지고, 가해자 쪽에서는 반대로 진단서상 상해 내용을 합의서에 특정해 두어야 "예상 범위"의 다툼을 줄일 수 있습니다.
피해자가 미성년자인 경우는 통념과 다릅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반의사불벌죄에서 의사능력이 있는 미성년 피해자는 법정대리인의 동의 없이 스스로 처벌희망 의사표시를 철회할 수 있다고 보았고(대법원 2009. 11. 19. 선고 2009도6058 전원합의체 판결), 거꾸로 피해자에게 의사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성년후견인이라도 명문의 규정 없이 피해자를 대신해 처벌불원 의사를 표시할 수 없다고 정리했습니다(대법원 2023. 7. 17. 선고 2021도11126 전원합의체 판결). 처벌불원은 피해자 본인의 진실한 의사에 기초해야 하는 일신전속적 의사표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성년자 사건에서 부모하고만 합의서를 쓰는 것도, 본인 서명만 받고 끝내는 것도 각각 위험이 있습니다. 실무적으로는 본인과 법정대리인의 서명을 함께 받아 두는 것이 다툼을 없애는 길입니다.
정리하면 형사합의서에는 서로 성질이 다른 세 개의 의사표시가 한 장에 섞여 있습니다. 처벌불원(형사), 청구권 포기·부제소(민사), 그리고 합의금 지급 약정(계약)입니다. 각각 완성되는 시점과 되돌릴 수 있는지가 다르므로, 항목을 분리해 쓰고 효력 발생 시점을 문구로 못 박는 것이 양쪽 모두에게 안전합니다. 서명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할 것은 세 가지 질문입니다. 돈은 언제 다 들어오는가, 처벌불원은 언제 효력이 생기는가, 이 합의가 덮는 손해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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