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처가 대금을 못 받았다며 갑자기 회사 앞으로 청구서를 보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작 그 거래는 회사가 직접 한 것이 아니라, 회사의 상호나 면허를 빌려 쓴 다른 업체가 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계열사나 대리점, 하도급업체에 상호·간판·면허 사용을 허락해준 적이 있다면, 그 업체가 진 채무를 회사가 대신 떠안게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영업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항변만으로는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정확히 어떤 채무까지 회사가 지는지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전체를 짚어보겠습니다: 회사가 명의대여자가 되는 대표적인 상황들
회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명의대여자가 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건설회사가 공사 실적이나 면허가 없는 업체에 자사 명의로 도급·하도급 계약을 맺도록 허락하는 경우, 프랜차이즈 본사나 유통회사가 대리점·가맹점에 자사 상호와 간판을 걸고 영업하도록 허락하는 경우, 계열사끼리 같은 브랜드나 상호를 함께 쓰도록 묵인하는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문제는 이런 허락이 반드시 정식 계약서로 명시돼 있어야만 책임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회사가 다른 업체의 명의 사용을 알면서도 특별히 제지하지 않고 묵인한 경우, 또는 면허나 상호 사용을 허락하면서 그 업체가 다시 하도급을 주거나 재위탁하는 것까지는 미처 신경 쓰지 않은 경우에도, 그 사실을 몰랐다는 사정만으로 책임에서 곧바로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결국 핵심은 회사가 실제로 그 영업을 했느냐가 아니라, 거래 상대방이 회사를 영업의 주체로 믿고 거래했느냐입니다. 이 오인이 인정되면 회사는 명의를 빌려준 업체가 진 채무를 대신, 또는 함께 갚아야 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더 곤란한 지점은 회사가 명의대여 사실 자체를 뒤늦게 인지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실제 영업자가 거래처를 여럿 두고 영업을 확장할수록 회사가 파악하지 못한 채무가 쌓이다가, 실제 영업자가 자력을 잃는 순간 거래처들의 청구가 한꺼번에 회사로 몰립니다. 청구를 받고 나서야 과거 어떤 경위로 명의 사용을 허락했는지 내부 기록부터 뒤져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법은 이렇게 판단합니다: 상법 제24조 성립요건과 채무 범위의 경계
이 문제를 규율하는 조문은 상법 제24조(명의대여자의 책임)입니다. 타인에게 자기의 성명 또는 상호를 사용하여 영업할 것을 허락한 자는, 그 타인과 거래한 상대방에 대하여 그 타인과 연대하여 변제할 책임을 집니다. 명의를 빌려준 회사를 영업주로 믿고 거래한 제3자의 신뢰를 보호하기 위한 규정입니다.
책임이 성립하려면 세 가지 요건이 갖춰져야 합니다. ①외관의 존재—명의차용자가 실제로 회사의 상호나 명의를 영업에 사용했을 것, ②귀책사유—회사가 그 사용을 허락했거나 알면서도 묵인했을 것, ③외관에 대한 신뢰—거래 상대방이 회사를 영업의 주체로 오인했고 그 오인에 중과실이 없을 것입니다. 이 세 요건이 모두 인정돼야 회사가 책임을 지며, 그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책임을 다툴 여지가 생깁니다.
요건이 충족되면 회사와 실제 영업자(명의차용자)는 부진정연대책임 관계에 놓입니다. 거래 상대방은 둘 중 누구에게든 채무 전액의 변제를 청구할 수 있고, 회사가 먼저 갚았다면 실제 영업자에게 그만큼을 구상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구상권은 어디까지나 사후 회수의 문제일 뿐, 상대방에 대한 지급 자체를 늦추거나 거부할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실무에서 가장 자주 다투는 지점은 어디까지가 회사가 지는 채무인가입니다. 판례는 명의차용자가 그 영업, 즉 상행위로 인해 부담한 채무—물품대금·공사대금·용역대금은 물론 그 거래 과정에서 발행·배서된 어음·수표금 채무까지—를 회사의 책임 범위로 봅니다. 반면 명의차용자나 그 직원이 저지른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은 상법 제24조만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오인과 손해 발생 사이에 직접적 인과관계가 없다는 이유입니다. 다만 회사와 명의차용자 사이에 실질적인 지휘·감독 관계가 객관적으로 인정된다면, 이때는 상법 제24조가 아니라 민법 제756조 사용자책임이 별도로 문제 될 수 있어 요건과 근거가 달라집니다.
이 법리가 가장 자주 등장하는 업종이 건설업입니다. 대법원은 건설업 면허를 대여한 자는 그 면허를 빌려 쓴 업체가 다시 하도급 거래를 하는 것까지 허락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대법원 2008. 10. 23. 선고 2008다46555 판결). 면허를 빌려준 회사를 영업주로 오인한 하수급인에 대해서도, 면허 대여자가 명의대여자로서 책임을 진다는 취지입니다. 재하도급 단계에서 회사가 직접 계약서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A건설이 시공 실적이 부족한 B업체에 자사 면허로 공사를 수주하도록 허락했고, B업체가 다시 A건설 명의로 자재상 C와 거래해 자재대금이 밀렸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C가 A건설을 실제 시공사로 믿고 거래했다면, A건설이 그 하도급 관계를 몰랐거나 대금 지급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더라도 C에 대한 자재대금 채무를 B업체와 함께 부담하게 됩니다. 반면 B업체 현장 직원의 부주의로 제3자가 다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상황이라면, 그 손해배상채무까지 A건설이 상법 제24조로 곧바로 떠안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회사가 책임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래 상대방이 실제 영업자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거나, 조금만 주의했어도 알 수 있었던 중과실이 인정되면 명의대여자 책임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계약서에 실제 시공사·운영자가 별도로 명시돼 있었거나, 현장에서 회사가 아닌 다른 상호로 거래가 이뤄졌다는 정황이 있다면 이 부분을 적극적으로 다퉈볼 수 있습니다.
김상훈 변호사의 대응, 이렇게: 채무 청구를 받았다면 확인할 다섯 가지
실제로 채무 이행을 요구받았다면, 다음 순서로 따져봅니다.
귀책사유(허락) 자체를 다툰다 — 회사가 명의 사용을 허락하거나 묵인한 사실이 있는지부터 확인합니다. 계약서·내부 결재문서·실제 사용 경위를 살펴 허락이 없었다는 근거를 찾으면, 애초에 세 요건 중 하나가 무너져 책임 자체를 다툴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악의·중과실 자료를 모은다 — 계약서상 실제 시공사·운영자 표기, 현장 간판, 명함, 대금 입금계좌 명의 등 상대방이 실제 영업자를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정황을 수집합니다. 이 정황이 뒷받침되면 오인 요건이 깨져 책임을 면할 수 있습니다.
채무의 종류를 나눠 본다 — 청구된 채무가 물품대금·공사대금 같은 영업상 채무인지, 아니면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인지 구분합니다. 후자라면 상법 제24조만으로는 책임 근거가 되지 못하므로, 청구 측이 민법 제756조 요건(실질적 지휘·감독 관계)까지 별도로 입증해야 합니다.
일단 지급했다면 구상권을 행사한다 — 부진정연대책임 구조상 회사가 먼저 갚아야 하는 상황이 불가피하다면, 지급 즉시 실제 영업자를 상대로 구상금 청구를 준비합니다. 실제 영업자의 재산 상태에 따라 가압류 등 보전조치를 함께 검토합니다.
재발 방지를 위한 명의 사용 정비 — 계열사·대리점·하도급업체가 회사 상호나 면허를 쓰고 있다면, 사용 범위를 계약서에 명확히 한정하고 현장 표시(간판·계약서·명함)에 실제 운영 주체를 병기하도록 정비해 향후 오인 소지 자체를 줄여야 합니다.
망설이는 사이, 시간은 불리해집니다: 초기 대응이 채무 범위를 가릅니다
명의대여자 책임은 요건 하나하나의 인정 여부에 따라 결과가 크게 갈리는 영역입니다. 허락 여부, 상대방의 악의·중과실, 채무의 성격을 초기에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따라 회사가 실제로 부담하는 금액과 범위가 달라집니다.
이름을 빌려준 사실이 있고 그로 인한 채무 청구를 받았다면, 요건별로 다툴 지점이 있는지부터 먼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법률 문제는 초기 대응이 중요합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김상훈 변호사에게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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