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물건을 대신 팔아주고 판매대금을 받아 온 사업자가 그 돈을 운영자금이나 다른 거래대금으로 먼저 쓴 뒤 정산이 밀리는 일은 유통 현장에서 드물지 않습니다. 이때 위탁자 측에서 "내 돈을 마음대로 썼으니 횡령"이라며 형사고소를 예고하면, 정산 협상이던 문제가 하루아침에 수사 절차로 바뀝니다. 그러나 판매대금을 임의로 썼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횡령죄가 되는 것은 아니고, 두 사람이 대금 처분과 정산을 어떻게 정해 두었는지에 따라 결론이 정반대로 갈립니다. 고소를 당한 쪽이든 고소를 준비하는 쪽이든, 이 갈림길을 모른 채 진술부터 하면 되돌리기 어려운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먼저 전체를 짚어보겠습니다: 같은 대금 소비가 형사 횡령과 민사 정산분쟁으로 갈리는 지점
위탁판매는 물건의 소유자(위탁자)가 판매를 맡기고, 맡은 쪽(수탁자·위탁매매인)이 자기 이름으로 팔아 대금을 받아오는 구조입니다. 상법상 위탁매매인은 자기 명의로, 그러나 타인의 계산으로 매매를 하는 사람이므로, 팔린 물건의 경제적 결과는 위탁자에게 돌아가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래서 대금을 받아 놓고 넘기지 않으면 "남의 돈을 가로챈 것"이라는 직관이 먼저 생깁니다.
문제는 실제 계약의 모습입니다. 현장의 위탁판매·수탁판매·판매대행 계약은 대금을 받는 즉시 그대로 송금하는 형태보다, 판매수수료와 카드수수료·배송비·판촉비 등을 공제한 뒤 월 단위나 격주 단위로 정산해 지급하기로 정해 두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온라인 오픈마켓 셀러, 위탁 매장, 지역 총판, 중고·명품 위탁판매업체 모두 이런 형태입니다. 이 경우 수탁자는 대금을 자기 사업계좌로 받아 다른 자금과 섞어 운용하다가 정산일에 차액을 지급하게 됩니다.
여기서 결론이 갈립니다. 대금을 받는 즉시 위탁자에게 넘기거나 별도로 관리하기로 한 관계라면 그 돈을 쓴 순간 형사 문제가 되지만, 공제 후 정산 약정이 있는 관계라면 대금 소비 자체보다 "정산해 보니 위탁자에게 얼마가 귀속되는가"가 먼저 밝혀져야 합니다. 대법원이 이 두 유형을 오래전부터 구분해 왔음에도, 수사 초기에는 "대금을 받아 썼다"는 사실만 부각되어 업무상횡령으로 입건되는 사례가 반복됩니다.
그래서 이 사안의 첫 작업은 진술이 아니라 계약서에서 대금 처분 방식을 정한 문구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같은 "위탁판매"라는 제목의 계약서라도 그 한두 줄이 형사기록과 민사 정산소송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법은 이렇게 판단합니다: 위탁물 귀속 원칙과 대금처분 특약, 정산관계가 그은 선
횡령죄는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가 그 재물을 횡령하거나 반환을 거부할 때 성립합니다(형법 제355조 제1항,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 원 이하의 벌금). 판매를 업으로 하면서 저지른 경우에는 업무상횡령이 되어 형법 제356조에 따라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무거워집니다. 성립하려면 ① 그 돈이 타인의 재물일 것 ② 보관자 지위를 인정할 위탁관계가 있을 것 ③ 횡령행위가 있을 것 ④ 불법영득의사가 있을 것이 모두 충족되어야 하고, 이 중 하나만 빠져도 무죄입니다.
원칙 쪽 법리는 분명합니다. 상법 제103조는 위탁매매인이 위탁매매로 취득한 물건·유가증권 또는 채권을 위탁자와 위탁매매인 사이에서는 위탁자의 소유 또는 채권으로 본다고 규정합니다. 형사에서도 대법원은 위탁판매에서 위탁품의 소유권은 위탁자에게 있고 그 판매대금은 다른 특약이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를 수령함과 동시에 위탁자에게 귀속하므로, 위탁매매인이 이를 사용·소비하면 횡령죄가 성립한다고 판시해 왔습니다(대법원 1982. 2. 23. 선고 81도2619 판결, 같은 취지 대법원 1986. 6. 24. 선고 86도1000 판결).
그런데 위 판시는 스스로 "다른 특약이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 대법원은 그 단서가 적용되는 경우를 정면으로 밝혔습니다. 위탁판매인과 위탁자 사이에 판매대금에서 각종 비용이나 수수료 등을 공제한 이익을 분배하기로 하는 등 대금 처분에 관하여 특별한 약정이 있는 경우에는, 그 정산관계가 밝혀지지 않는 한 위탁물을 판매하여 이를 소비하거나 인도를 거부하였다 하여 곧바로 횡령죄가 성립한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대법원 1990. 3. 27. 선고 89도813 판결).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지가 실무의 핵심입니다. 공제 후 정산 약정은 "받은 돈을 그대로 봉해 두었다가 넘기라"는 뜻이 아니라 "네 자금으로 운용하되 정산일에 계산해서 차액을 지급하라"는 뜻입니다. 즉 당사자들이 애초에 금전의 개별적 보관이 아니라 정산에 따른 채권·채무 관계를 설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좌에 들어온 돈은 수탁자의 다른 자금과 섞여 특정성을 잃고, 위탁자가 가지는 것은 특정 현금에 대한 소유권이 아니라 정산금 지급을 구할 채권이 됩니다. 이 구조에서 대금을 사업에 돌려 쓴 행위는 약정이 예정한 운용이지, 남의 재물을 자기 것처럼 처분한 행위가 아닙니다.
대법원이 금전에 관한 횡령죄에서 위탁관계를 엄격하게 보는 흐름도 같은 방향입니다. 대법원 2022. 6. 23. 선고 2017도3829 전원합의체 판결은 지명채권 양도인이 양도 통지 전에 채무자로부터 변제받은 금전에 관하여, 그 돈의 소유권은 양도인에게 있고 양도인과 양수인은 통상의 계약에서와 같은 이익대립관계에 있을 뿐이어서 횡령죄로 보호할 만한 신임에 의한 위탁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보아, 이를 임의로 소비해도 횡령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종전 판례를 변경했습니다. 계약상 채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과 남의 재물을 영득한 것은 다르다는 취지입니다.
불법영득의사 단계에서도 같은 결론에 이릅니다. 횡령죄의 불법영득의사란 위탁의 취지에 반하여 정당한 권원 없이 스스로 소유자처럼 재물을 처분하는 의사를 말하므로, 반환을 거부했더라도 그 거부에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불법영득의사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반품·하자·미수금·판촉비 부담을 놓고 다툼이 있어 정산액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급을 미룬 것이라면, 그 자체가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정산 약정이 있다고 해서 언제나 무죄인 것은 아닙니다.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으면 결론이 다시 뒤집힙니다.
별도 관리·즉시 송금 약정 — 대금을 위탁자 명의 계좌나 지정된 전용 계좌로 받도록 하거나, 수령 즉시 전액을 송금하고 수수료는 따로 청구하기로 한 경우에는 특약 예외가 적용되지 않아 81도2619의 원칙대로 횡령죄가 성립할 수 있습니다.
정산관계가 이미 확정된 뒤의 소비 — 89도813은 "정산관계가 밝혀지지 않는 한"이라고 했을 뿐입니다. 정산서·세금계산서·확인서로 위탁자 몫이 특정된 뒤 그 금액을 개인 용도로 유용했다면 다시 형사 문제가 됩니다.
처음부터 정산할 의사나 능력이 없었던 경우 — 이미 채무초과 상태에서 판매를 계속 유치해 대금을 끌어다 돌려막았다면 횡령이 아니라 사기죄가 문제될 수 있습니다.
금액이 큰 경우의 가중 — 횡령으로 인정되고 이득액이 5억 원 이상이면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3조가 적용되어 3년 이상의 유기징역, 50억 원 이상이면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으로 법정형 자체가 달라집니다.
정리하면, 이 사안에서 실제로 다투는 것은 "돈을 썼느냐"가 아니라 "그 돈이 형사적으로 누구의 재물이었느냐"입니다. 그리고 그 답은 계약의 대금 처분 조항과 실제 자금 흐름에서 나옵니다.
김상훈 변호사의 대응, 이렇게: 계약서 문구부터 자금흐름·정산내역까지 다섯 단계
쟁점이 정리됐다면, 실제로는 다음 순서로 대응합니다.
계약서에서 대금 처분 조항부터 특정 — 가장 먼저 확인할 것은 "판매대금은 수수료를 공제하고 매월 말일 정산하여 지급한다"류의 문구입니다. 이 한 줄이 89도813의 특약에 해당하는지가 사건의 축입니다. 서면 계약이 없다면 거래 개시 무렵의 카카오톡·이메일, 매월 발송된 정산서 양식, 세금계산서 발행 형태(총액인지 수수료만인지)로 같은 내용을 증명합니다. 계약서 제목이 "위탁판매계약서"라도 실질이 물품을 매입해 되파는 형태였다면 애초에 소유권이 넘어와 횡령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매입 단가·재고 부담·반품 조건까지 함께 확인합니다.
자금 흐름으로 혼화 사실을 입증 — 대금이 전용 계좌가 아니라 일반 사업계좌로 들어와 임대료·급여·매입대금과 섞여 운용된 사실을 계좌 거래내역으로 정리해 제출합니다. 별도 관리 의무가 없었다는 점이 객관 자료로 드러나면 "보관자 지위"라는 요건 자체가 흔들립니다. 반대로 위탁자 측이라면 전용 계좌 지정 문구나 "입금 즉시 송금" 지시가 담긴 자료를 찾아내는 것이 그대로 유죄 방향의 핵심 증거가 됩니다.
정산관계가 미확정임을 수치로 제시 — "얼마인지 모른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정산이 왜 확정되지 않았는지를 항목별로 계산해 보여야 합니다. 미판매 재고 수량, 반품·교환 건수, 카드 승인취소분, 약정 수수료율, 위탁자가 부담하기로 한 판촉비·배송비, 그리고 위탁자에게 이미 선지급한 금액을 표로 대조하면 검사가 특정한 피해액이 왜 그대로 유지될 수 없는지가 드러납니다. 89도813은 정산관계가 밝혀지지 않는 한 곧바로 횡령이 되지 않는다고 했으므로, 이 대조표가 곧 방어의 실체입니다.
변제·공탁으로 사안을 민사 궤도로 되돌리기 — 정산금 채무 자체를 다투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조기에 지급하거나 변제공탁을 해 두는 것이 유리합니다. 채무불이행이 아니라 영득이라는 인상을 지우는 데 효과가 있고, 설령 일부 유죄가 인정되더라도 양형에서 크게 반영됩니다. 위탁자 측이라면 형사고소만 믿고 기다리지 말고 정산금 청구소송과 함께 예금·매출채권에 대한 가압류를 병행해야 실제 회수 가능성이 남습니다.
첫 조사 전에 진술 방향을 확정 — 경찰 조사에서 "제가 급해서 그 돈을 먼저 썼습니다"라고 인정해 버리면, 그 진술이 대금의 성격에 관한 자백처럼 취급되어 이후 계약 구조를 설명해도 뒤집기 어려워집니다. 조사 전에 대금 처분 약정, 자금 혼화, 정산 미확정이라는 세 축으로 진술을 정리하고, 확인되지 않은 금액은 추측으로 답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망설이는 사이, 시간은 불리해집니다: 첫 진술과 계좌 자료가 결론을 굳히기 전에
위탁판매 대금 사건은 법리가 이미 정리되어 있는 반면, 그 법리를 적용할 재료가 시간이 갈수록 사라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계좌 거래내역과 정산서, 반품 기록은 시간이 지나면 확보가 번거로워지고, 초기에 굳어진 진술은 나중에 계약 구조를 설명해도 좀처럼 되돌려지지 않습니다. 정산금 채권 역시 상행위로 생긴 채권이면 소멸시효 5년이 적용되므로 민사 회수도 마냥 미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판매대금 정산을 두고 형사고소가 오갈 상황이라면, 계약서의 대금 처분 조항이 어느 유형에 해당하는지부터 확인하시고, 자금 흐름과 정산 내역을 정리한 뒤에 대응 순서를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법률 문제는 초기 대응이 중요합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김상훈 변호사에게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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