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피고인이 무죄를 증명하는 재판은 아니다
성범죄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면 많은 피고인이 자신의 무죄를 직접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형사재판의 구조는 그 반대입니다. 피고인이 무죄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검사가 공소사실을 증명해야 합니다.
형사소송법은 범죄사실을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로 증명하도록 요구합니다. 검사가 제출한 증거가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법원은 무죄를 선고해야 합니다. 피고인의 설명에 다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거나 유죄가 의심된다는 사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합리적 의심은 막연한 상상이나 추상적인 가능성이 아닙니다. 증거와 객관적 정황, 논리와 경험칙에 근거한 의문이어야 합니다.
형사재판은 모든 가능한 의심을 없애는 절차가 아니라,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절차입니다(이를 99%나 100% 같은 숫자로 환산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제가 집필한 『형사변호사가 소개하는 성범죄 방어 지침서』가 강조하는 증명책임도 여기서 출발합니다. 대법원은 오래전부터 공소사실에 대한 입증책임이 검사에게 있고, 증거가 없거나 부족해 의심이 남는다면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태도를 유지해 왔습니다.
성범죄 사건에서는 이 원칙이 더욱 세밀하게 다뤄집니다. 사건이 둘만 있는 공간에서 벌어졌거나 고소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 이뤄진 경우에는 피해자의 진술이 사실상 유일한 직접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진술 하나만으로도 그 내용이 구체적이고 일관되며 객관적 정황과 맞는다면 유죄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진술에 설명하기 어려운 변화가 있고 다른 자료와 충돌한다면, 그 진술만으로 피고인의 부인을 배척할 수 있는지 따져야 합니다.
형법 제13조는 고의가 필요한 범죄에서 행위자가 범죄의 성립요소를 인식했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따라서 검사는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뿐 아니라 해당 범죄에 필요한 고의도 증명해야 합니다. 다만 강제추행죄에서 말하는 고의는 반드시 성욕을 자극하거나 만족시키려는 특별한 목적을 뜻하지 않습니다. 추행에 해당하는 행위를 인식하고 실행했다면 고의가 인정될 수 있으므로, 단순히 성적인 목적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무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2. 성인지적 관점과 증명책임은 함께 적용된다
대법원은 2024년 1월 4일 선고한 2023도13081 판결에서 성범죄 사건의 증거를 판단하는 기준을 다시 정리했습니다. 법원은 사건이 발생한 맥락과 피해자가 처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며, 성 고정관념을 근거로 피해자의 진술을 쉽게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성인지적 관점입니다.
과거에는 피해자가 즉시 신고하지 않았다거나 사건 이후 피고인과 연락했다는 이유만으로 진술을 의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범죄 피해 이후의 반응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관계를 바로 끊지 못하거나 피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해 기존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특정한 행동을 피해자답지 않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성인지적 관점이 피해자 진술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원칙은 아닙니다. 대법원도 성인지적 관점이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제한 없이 인정하거나 공소사실을 곧바로 유죄로 판단하라는 뜻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계속 부인하고 피해자의 진술이 사실상 유일한 직접증거라면 법원은 진술 내용의 합리성과 일관성,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사실, 피고인이 제출한 자료, 사건 전후의 정황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피해자의 진술이 대체로 신빙성이 있다고 보더라도, 피고인의 설명을 배척할 만큼 충분한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여러 사정을 종합해 합리적인 의심이 남는다면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결국 성인지적 관점과 증명책임은 서로 충돌하는 원칙이 아닙니다. 성 고정관념 없이 피해자의 진술을 살피되, 검사가 제출한 증거가 형사재판의 증명 기준을 충족했는지는 엄격하게 따지는 것입니다.
3. 무죄 판결은 어떤 사정에서 나오는가
『방어 지침서』에 소개된 사례들을 보면 무죄는 피해자의 진술을 단순히 거짓말로 몰아붙인 결과가 아닙니다. 진술의 변화와 객관적 자료, 사건의 맥락을 함께 검토한 끝에 검사의 증명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첫 번째 사례에서는 피해자가 범행 일시를 처음에는 8월 중순이라고 진술했다가 나중에 8월 13일로 특정했습니다. 사건 당시 상황도 초기에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가 시간이 지난 뒤 상세히 설명했고, 법정에서는 다시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습니다. 법원은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이 오히려 또렷해지는 과정이 이례적이라고 보았습니다. 핵심 사실에 관한 진술이 반복해서 달라지고 이를 보완할 객관적 증거도 없다면 합리적인 의심이 남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진술의 사소한 차이가 곧 거짓 진술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날짜나 주변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할 수 있고, 조사 방식에 따라 설명의 정도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가 사건의 핵심에 관한 것인지, 변화한 이유가 자연스럽게 설명되는지, 다른 자료와 함께 볼 때도 납득할 수 있는지입니다.
두 번째 사례에서는 피해자가 사건 이후에도 피고인과 놀이공원과 미술관을 방문했고, 피고인이 피해자의 딸에게 휴대전화를 선물하고 요금을 납부한 사정이 확인됐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금전 관계도 있었으며, 피해자는 피고인의 고소가 이뤄진 뒤 강간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이런 사후 행동만으로 성범죄가 없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연락 내용과 만남의 경위, 당시 두 사람의 관계, 금전 분쟁과 고소 시점이 피해자의 설명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검토할 수 있습니다. 방어 측이 다퉈야 할 부분도 피해자다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막연한 주장이 아니라, 구체적인 객관적 정황이 공소사실과 양립할 수 있는지입니다.
세 번째 사례에서는 축사에서 일하던 피고인이 새끼 돼지가 깔린 상황을 알리려고 외국인 여성의 어깨를 잡고 엉덩이에 접촉한 사실이 문제 됐습니다. 법원은 긴박한 상황과 의사소통의 어려움, 접촉의 경위와 정도를 검토한 뒤 추행의 고의가 합리적인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행위 자체가 있었다고 해서 곧바로 범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부위에 어떻게 접촉했는지뿐 아니라 접촉이 발생한 이유와 당시 상황, 지속 시간, 전후 행동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다만 앞서 본 것처럼 강제추행죄는 특별한 성적 목적까지 요구하지 않으므로, 방어 논리는 단순히 성적인 의도가 없었다는 주장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문제의 접촉을 추행으로 인식하고 실행했다는 고의가 증명됐는지를 구체적으로 다퉈야 합니다.
4. 실제 재판에서는 증거의 연결 관계를 따져야 한다
성범죄 사건에서 방어의 출발점은 피해자 진술의 흠을 최대한 많이 찾는 것이 아닙니다. 공소사실의 각 부분을 검사가 어떤 증거로 뒷받침하는지 확인하고, 그 증거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지 살피는 일입니다.
먼저 피해자의 경찰, 검찰, 법정 진술을 나란히 비교해야 합니다. 사건 발생 일시와 장소, 구체적인 행위, 당시 대화, 사건 직후의 행동처럼 공소사실의 중심이 되는 부분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확인합니다. 진술에 변화가 있다면 그 변화가 기억의 자연스러운 보충인지, 핵심 내용을 바꿀 정도인지도 구분해야 합니다.
카카오톡 대화, 통화 기록, CCTV, 카드 결제 내역, 위치 기록 등은 진술과 객관적 정황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자료가 됩니다. 피해자가 강제로 특정 장소에 이동했다고 진술했는데 영상이나 이동 기록이 다른 상황을 보여주거나, 범행 시각에 피고인이 다른 장소에 있었다는 자료가 확인된다면 공소사실에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건 이후 주고받은 다정한 메시지 한두 개만으로 피해 사실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메시지가 작성된 맥락과 두 사람의 관계, 피해자가 처한 사정까지 함께 살펴야 합니다.
고소 시점과 동기도 검토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금전 분쟁이나 이별, 맞고소 같은 사정이 있었다면 관련 자료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근거 없이 피해자가 앙심을 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 허위 고소의 동기를 주장하려면 실제 분쟁 자료와 대화 내용, 시간적 선후관계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증거는 내용만큼 수집 과정도 중요합니다. 휴대전화나 계정에 무단으로 접근하거나 자료를 임의로 삭제·편집하면 별도의 법적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증거의 신뢰성도 떨어집니다. 원본 파일과 기기를 보존하고, 대화 내용은 날짜와 상대방 정보가 드러나는 상태로 확보해야 합니다. 어떤 자료를 어떤 방식으로 수집하고 제출할지는 사건 초기부터 변호사와 상의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피해자에 대한 반대신문도 진술을 공격적으로 몰아붙이는 절차가 아닙니다. 기존 진술과 법정 진술의 차이를 확인하고, 객관적 자료와 맞지 않는 부분을 차분하게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질문의 방식이 부적절하면 오히려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강화하거나 피고인에게 불리한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형사재판에서 무죄는 피해자가 거짓말을 했다는 선언과 같지 않습니다.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 공소사실이 합리적인 의심 없이 증명되지 않았다는 판단일 수 있습니다. 피해자의 진술을 존중하는 것과 피고인의 유죄를 엄격하게 증명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함께 지켜져야 합니다.
억울한 혐의를 받고 있다면 무리하게 해명부터 반복하기보다 현재 확보된 증거가 무엇인지, 공소사실과 맞지 않는 자료가 무엇인지부터 정리해야 합니다. 진술을 자주 바꾸거나 자료를 임의로 손대면 방어가 더 어려워집니다. 증명책임은 검사에게 있지만, 그 원칙이 실제 재판에서 작동하려면 피고인 측도 객관적 자료를 보존하고 일관된 설명을 준비해야 합니다. 개별 사건의 결론은 구체적인 증거와 적용 법조에 따라 달라지므로, 초기 대응부터 형사사건을 다루는 변호사의 검토를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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