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주를 보류한다"는 말 한마디가 소송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거래 관계에서 흔히 오가는 말들이 있습니다.
"견적 한번 뽑아주세요."
"수량이 바뀔 것 같으니 잠깐 보류해주세요."
"최종 물량 나오면 다시 연락할게요."
이런 일상적인 협의 과정의 언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약 1억원짜리 소송의 증거로 제출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끝까지 원칙을 지켜 1심에 이어 항소심까지, 청구 전액 기각 판결을 이끌어냈습니다.
사건의 배경 — 견적 요청이 발주가 되어버린 순간
[사건 개요]
원고는 철구조물 제조·판매 업체입니다. 피고는 2024년 1월, 현장용 자재에 대한 견적 요청 메시지를 원고에게 보냈습니다. 원고는 이틀도 채 되지 않아 같은 날 두 개의 견적서를 발송했고, 며칠 후 피고가 "수량이 전체적으로 바뀌니 생산을 보류해달라"고 요청하자 원고는 "알겠다"고 답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피고가 해당 자재를 다른 업체로부터 납품받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한 원고는, "구두 발주가 있었다", "생산을 진행했으니 물품대금을 지급해야 한다"며 94,190,600원의 지급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나아가 원고는 예비적으로, 설령 매매계약이 성립하지 않았더라도 피고가 계약 교섭 단계에서 신의칙을 위반해 손해를 끼쳤으므로 동일한 금액을 손해배상으로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추가했습니다.
두 가지 법적 근거로 동일 금액을 청구하는, 쉽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쟁점의 핵심 — "발주 = 계약 성립"은 성립하지 않는다
원고 측 논리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피고가 '발주 보류'를 요청했다는 사실 자체가 발주(=계약)가 있었다는 증거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는 논리입니다. 보류할 발주가 없었다면, 보류를 요청할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저희는 판결문에 고스란히 담긴 다음의 핵심 논거로 이를 정면 반박했습니다.
첫째, 견적 요청은 청약의 유인(誘引)에 불과합니다.
피고의 견적 요청 메시지에는 품명·수량만 있었을 뿐, 매매대금은 전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대금까지 특정한 것은 원고가 보낸 견적서, 즉 원고의 청약(請約)이었습니다. 매매계약이 성립하려면 이에 대한 피고의 승낙이 있어야 하는데, 승낙의 존재를 입증할 증거가 전혀 없었습니다.
둘째, 원고는 피고의 승낙도 받기 전에 이미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원고 대표이사는 피고로부터 견적 요청을 받기 하루 전인 2024년 1월 8일, 이미 직원에게 "납기 1월 30일"이라는 생산 지시를 내린 상태였습니다. 원고 스스로 계약 성립 여부와 무관하게 선제적으로 생산을 진행한 것입니다.
셋째, 발주 보류 이후에도 원고는 수정 견적서를 재발송했습니다.
보류 요청을 받은 2024년 1월 15일 이후인 1월 18일, 원고는 금액이 달라진 세 번째 견적서를 다시 피고에게 보냈습니다. 원고 스스로도 당시 계약이 확정되지 않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강력한 방증이었습니다.
넷째, "발주"는 원고·피고 사이에서 각기 다른 의미로 쓰였습니다.
증거로 제출된 메시지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피고가 "발주"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는 '견적을 요청하는 행위' 자체를 가리키는 것임이 확인되었습니다. 법적 의미의 '계약 체결'을 뜻하는 용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법원은 이 네 가지 논거를 모두 받아들여, "매매목적물과 매매대금에 관한 의사의 합치가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명확히 판시했습니다.
예비적 청구까지 완벽히 차단 — 교섭 단계 신의칙 위반도 인정되지 않다
원고는 주위적 청구(물품대금)가 기각될 경우를 대비해, 항소심에서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을 예비적으로 추가 청구했습니다.
그 법리적 근거는 이른바 '계약 교섭 단계의 불법행위 책임'입니다. 계약이 확실히 체결되리라는 정당한 기대와 신뢰를 상대방에게 부여해 놓고, 아무런 이유 없이 계약 체결을 거부해 손해를 입혔다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불법행위가 된다는 법리입니다(대법원 99다40418 판결 참조).
그러나 법원은 이 예비적 청구 역시 기각했습니다.
피고가 견적을 요청하고 6일 만에 보류를 요청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그것만으로는 '계약이 확실하게 체결될 것이라는 정당한 신뢰'를 부여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습니다.
예비적 청구는 원고가 최후의 보루로 추가한 카드였습니다. 저희는 이 카드까지 완전히 막아냄으로써, 청구금액 94,190,600원 전액, 소송비용 전액을 원고가 부담하는 완전 승소를 달성했습니다.

이 사건이 주는 실무적 교훈 세 가지
1. 구두 합의와 계약 성립은 다릅니다
"구두로 발주를 받았다"는 주장은 분쟁이 생길 때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법원은 매매계약 성립을 위해 목적물과 대금에 관한 의사의 합치를 엄격히 요구합니다. 아무리 장기간 거래 관계를 유지했더라도, 그 자체가 개별 건의 계약 성립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2. 견적 요청은 청약이 아닙니다
견적 요청은 계약 협상의 출발점인 청약의 유인에 불과합니다. 견적서를 받고 구체적인 조건을 확인한 뒤 발주 확정 의사를 명시해야 비로소 계약이 성립합니다. 공급자 입장에서는 발주 확정을 서면으로 명확히 받아두는 습관이, 발주자 입장에서는 발주 전에 생산이 시작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3. 교섭 단계 행위에도 법적 책임이 따를 수 있습니다
다만, 교섭 단계에서 상대방에게 계약 체결을 강하게 확신시키는 행위, 예를 들어 상당한 선투자를 유도하거나 계약 완성을 반복적으로 확인해 주는 행위 등은 설령 최종 계약이 성립하지 않았더라도 신의칙 위반으로 불법행위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발주자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거래임을 상대방에게 명확히 전달하고, 공급자는 공식적인 발주 확정 전 대규모 생산을 개시하는 위험을 스스로 감수하지 않아야 합니다.
마치며 — 계약 분쟁, 초기 대응이 결과를 바꿉니다
이 사건은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 매우 복잡한 구조의 분쟁이었습니다.
2년 가까이 지속된 정상적인 거래 관계, 실제로 오간 수십 건의 메시지와 견적서들, "발주"라는 단어를 둘러싼 양측의 엇갈린 해석, 그리고 원고가 항소심에서 새롭게 추가한 예비적 청구까지.
저희는 방대한 증거를 하나하나 분석하여 원고 측 논거의 허점을 체계적으로 드러냈고, 1심부터 항소심까지 법원이 저희의 논거를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습니다.
기업 간 거래 분쟁은 계약서가 없어도 발생하고, 구두 합의나 관행만으로도 법적 책임이 문제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거래 상대방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청구를 받으셨거나, 반대로 계약 이행을 거부당해 손해를 입으신 경우라면, 초기 단계에서 법률 전문가의 조력을 받으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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