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에 '위약벌'이라는 세 글자가 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이 자신의 손해를 한 푼도 밝히지 않은 채 수억 원을 청구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대로 위약벌을 청구했다가 "그래서 실제로 얼마를 손해 봤느냐"는 반박에 막혀 소송이 길어지기도 합니다. 위약벌은 손해배상액의 예정과 겉모습이 매우 비슷하지만, 손해를 입증해야 하는지, 법원이 액수를 깎아 줄 수 있는지에서 결론이 정반대로 갈립니다. 이 글에서는 위약벌이 인정되려면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지, 정말로 손해 발생 사실 없이도 청구가 받아들여지는지, 청구를 당한 쪽은 어떤 항변을 어떤 순서로 세워야 하는지를 차례로 정리합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변호사
위약벌과 손해배상액의 예정 — 명칭이 아니라 계약상 기능으로 갈립니다
위약금은 채무불이행이 있을 때 지급하기로 미리 정해 둔 돈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같은 위약금이라도 법적 성질은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는 손해배상액의 예정이고, 다른 하나는 위약벌입니다. 손해배상액의 예정은 실제 손해가 얼마이든 그 금액으로 배상을 갈음하기로 하는 약정이고, 위약벌은 채무의 이행을 심리적으로 강제하기 위해 별도로 부과하는 제재입니다. 성질이 다르니 청구할 때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지도, 법원이 액수에 개입할 수 있는지도 함께 달라집니다.
실무에서 가장 흔한 오해는 계약서에 '위약벌'이라고 적어 두면 위약벌이 되고 '손해배상액의 예정'이라고 적어 두면 예정이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법원은 조항의 이름에 구속되지 않습니다. 대법원 2022. 7. 21. 선고 2018다248855, 248862 전원합의체 판결은 위약금 약정이 손해배상액의 예정인지 위약벌인지는 계약서 등 처분문서의 내용과 계약 체결 경위, 당사자가 위약금을 약정한 주된 목적 등을 종합하여 구체적 사건마다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할 의사해석의 문제라고 밝혔습니다. 결국 조항의 제목이 아니라 그 조항이 계약 전체에서 실제로 수행하는 기능을 봅니다.
예를 들어 공사도급계약에 "수급인이 준공을 지체하면 1일당 계약금액의 0.1%를 지급한다"는 지체상금 조항 하나만 있다면, 이는 지연으로 인한 손해를 미리 정해 둔 것으로 읽히므로 손해배상액의 예정에 가깝습니다. 반면 "지체로 인한 손해는 실비로 별도 배상하고, 이와 별개로 계약을 위반하면 계약보증금 상당액을 위약벌로 몰취한다"처럼 실손해 배상 조항과 위약금 조항이 나란히 놓여 있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위 전원합의체 판결도 하나의 계약에 손해배상 예정 조항이나 실손해 배상을 전제로 하는 조항이 따로 있고 그와 별도로 위약금 조항을 두고 있어서, 그 위약금 조항을 예정으로 해석하면 이중배상이 되는 사정 등이 있을 때에는 그 위약금을 위약벌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계약을 검토할 때는 위약금 조항 하나만 떼어 읽지 말고, 그 계약 안에 손해배상에 관한 다른 조항이 함께 있는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그 배치가 성질을 결정하는 가장 강력한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조항의 명칭과 문구 — 출발점이기는 하나 결정적 기준은 아닙니다.
실손해 배상 조항이 따로 있는지 — 함께 있으면 이중배상 문제로 위약벌 해석의 여지가 커집니다.
위약금을 약정한 주된 목적 — 손해의 전보인지, 이행의 확보인지가 핵심입니다.
당사자의 경제적 지위와 교섭 과정 — 일방이 우월적 지위에서 밀어 넣은 조항인지 봅니다.
위약금액의 규모와 전체 채무액 대비 비율 — 예상 손해액의 크기와 견주어 평가됩니다.
위약금이 위약벌인지 손해배상액의 예정인지는 조항 제목이 아니라 계약 전체에서의 기능으로 정해지는 의사해석의 문제입니다.
민법 제398조 제4항의 추정 — 위약벌이라 주장하는 쪽이 뒤집어야 합니다
민법 제398조 제4항은 "위약금의 약정은 손해배상액의 예정으로 추정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법이 정해 둔 출발점이 예정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위약금 조항을 위약벌이라고 주장하려는 당사자는, 그 위약금이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손해의 배상이나 전보를 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특별한 사정을 스스로 주장하고 증명해야 합니다. 아무런 사정 없이 "계약서에 위약벌이라고 썼다"는 말만으로는 추정이 깨지지 않습니다.
이 증명책임의 배분은 소송의 승패를 좌우합니다. 위약벌을 청구하는 원고 입장에서는 위약벌로 인정받아야 감액을 피하고 실손해 배상까지 함께 구할 길이 열립니다. 반대로 청구를 당한 피고 입장에서는 추정을 그대로 유지시키기만 해도, 즉 상대방의 특별한 사정 증명을 무너뜨리기만 해도 손해배상액의 예정으로 남게 되어 감액을 다툴 문호가 열립니다. 그래서 위약벌 사건의 1차 전선은 언제나 성질 다툼에서 형성됩니다.
법원이 특별한 사정을 판단할 때 고려하는 요소는 폭넓습니다. 계약 체결 당시 위약금과 관련하여 사용한 명칭이나 문구, 계약 당사자의 경제적 지위, 계약 체결의 경위와 내용, 위약금 약정을 하게 된 경위와 교섭 과정, 당사자가 위약금을 약정한 주된 목적, 위약금을 통해 이행을 담보하려는 의무의 성격, 채무불이행이 발생한 경우에 위약금 이외에 별도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지 여부, 위약금액의 규모와 전체 채무액에 대한 비율, 예상되는 손해액의 크기, 그 당시의 거래관행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합니다. 어느 하나가 결정적이지 않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가령 대등한 두 기업이 오랜 협상 끝에 "본 계약 위반 시 위반 당사자는 상대방에게 위약벌 3억 원을 지급하고, 이와 별도로 상대방이 입은 손해를 배상한다"는 조항을 쌍방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도록 두었다면, 이행 확보 목적과 이중배상 구조가 함께 드러나므로 위약벌로 인정될 여지가 큽니다. 반면 사업자가 만들어 온 서식에 "위약벌 조항"이라는 제목만 붙어 있고 다른 손해배상 조항이 전혀 없다면, 그 위약금은 사실상 손해 전보의 기능을 하므로 예정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위약금은 손해배상액의 예정으로 추정되므로, 위약벌이라는 결론을 얻으려면 이중배상 구조 등 특별한 사정을 주장하고 증명해야 합니다.
손해 발생 사실을 증명하지 않아도 위약벌 청구가 인정될까
결론부터 말하면, 위약벌은 손해의 전보가 아니라 채무 이행의 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제재이므로, 채권자가 손해가 실제로 발생했다는 사실이나 그 손해액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채권자가 증명할 것은 위약벌 약정의 존재, 상대방의 채무불이행 사실, 그리고 그 채무불이행이 상대방의 귀책사유에 기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손해가 0원이라 하더라도 위약벌 청구 자체가 곧바로 기각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손해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점만 놓고 보면 손해배상액의 예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정이 있으면 채권자는 실제 손해액을 증명하지 않고 예정액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두 제도의 진짜 차이는 초과 손해에서 드러납니다. 손해배상액의 예정이라면 실제 손해액이 예정액을 넘더라도 그 초과분을 따로 청구할 수 없지만, 위약벌이라면 위약벌과 별개로 채무불이행에 따른 손해배상을 함께 청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때 별도로 청구하는 실손해 부분은 통상의 원칙대로 손해의 발생과 액수를 증명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그려 보면 이렇습니다. 위약금 5,000만 원 약정이 있고 실제 손해가 2억 원으로 입증되는 상황을 가정합니다. 이 조항이 손해배상액의 예정이라면 채권자가 받을 수 있는 돈은 5,000만 원에 그칩니다. 반면 위약벌이라면 위약벌 5,000만 원에 더해 증명된 손해 2억 원까지 청구할 수 있어 합계가 2억 5,000만 원이 됩니다. 반대로 실제 손해가 전혀 없다면, 예정에서는 그럼에도 5,000만 원을 청구할 수 있고 위약벌에서도 5,000만 원을 청구할 수 있어 결과는 같아집니다.
그렇다고 "손해가 없다"는 사정이 소송에서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뒤에서 볼 공서양속 위반 판단에서, 의무의 강제로 채권자가 얻는 이익과 약정된 벌의 무게를 견주는 국면에 이 사정이 다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손해가 거의 없는데 위약벌만 과중하다면 무효 주장의 설득력이 커집니다.
채권자가 증명할 것 — 위약벌 약정의 존재와 그 조항의 발동 요건 충족.
채권자가 증명할 것 — 상대방의 채무불이행 사실과 귀책사유.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 — 손해가 실제로 발생했다는 사실.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 — 그 손해가 얼마인지에 관한 구체적 액수.
다만 위약벌과 별도로 실손해 배상을 함께 구한다면, 그 실손해 부분은 발생과 액수를 모두 증명해야 합니다.
위약벌 청구에서 채권자는 손해의 발생과 액수를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증명 대상은 채무불이행 사실과 귀책사유입니다.
위약벌은 법원이 깎아 주지 않습니다 — 2018다248855 전원합의체
민법 제398조 제2항은 "손해배상의 예정액이 부당히 과다한 경우에는 법원은 적당히 감액할 수 있다"고 정합니다. 문언 그대로 이 감액 규정은 손해배상액의 예정에 관한 조항입니다. 그렇다면 위약벌이 지나치게 과다할 때에도 이 조항을 끌어와 감액할 수 있을지가 오랫동안 다투어졌습니다.
이 쟁점에 관하여 대법원 2022. 7. 21. 선고 2018다248855, 248862 전원합의체 판결은, 위약벌의 약정은 채무의 이행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하는 것으로서 손해배상액의 예정과 그 내용이 다르므로 손해배상액의 예정에 관한 민법 제398조 제2항을 유추적용하여 위약벌의 액수를 감액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종전 판례의 태도를 전원합의체 차원에서 다시 확인한 것입니다. 앞서 대법원 2016. 1. 28. 선고 2015다239324 판결, 대법원 2015. 12. 10. 선고 2014다14511 판결도 같은 취지에서 위약벌은 제398조 제2항의 유추적용으로 감액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실무적 함의는 분명합니다. 일단 어떤 위약금 조항이 위약벌로 성질이 확정되고 나면, "액수가 너무 크니 적당히 깎아 달라"는 감액 주장은 그 자체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법원이 재량으로 금액을 조절해 주는 완충장치가 없다는 뜻이고, 그만큼 결론이 전부 인정 또는 무효에 가까운 형태로 갈리기 쉽습니다. 반면 성질을 손해배상액의 예정으로 되돌리면 곧바로 감액이라는 유연한 구제 수단이 열립니다. 앞 장에서 성질 다툼이 1차 전선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만 예정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감액이 무제한 인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대법원 2023. 8. 18. 선고 2022다227619 판결은 제398조 제2항의 '부당히 과다한 경우'란 손해가 없다거나 손해액이 예정액보다 적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계약자의 경제적 지위, 계약의 목적, 손해배상액 예정의 경위와 거래관행 기타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예정액의 지급이 경제적 약자인 채무자에게 부당한 압박을 가하여 공정성을 잃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인정되는 경우를 뜻한다고 밝혔고, 예정액의 약 75%를 감액하여 원고의 투자금만을 손해배상액으로 인정한 원심 조치는 형평의 원칙에 비추어 현저히 불합리하다고 보았습니다.
위약벌로 성질이 확정되면 민법 제398조 제2항을 유추적용한 감액은 불가능합니다. 다툴 수 있는 것은 감액이 아니라 무효입니다.
과다한 위약벌 — 민법 제103조 공서양속에 따른 일부·전부 무효
감액이 막혔다고 해서 과도한 위약벌을 그대로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 대법원 2016. 1. 28. 선고 2015다239324 판결은 위약벌을 감액할 수는 없으나, 의무의 강제로 얻어지는 채권자의 이익에 비하여 약정된 벌이 과도하게 무거울 때에는 그 일부 또는 전부가 공서양속에 반하여 무효가 된다고 판시했습니다. 근거 조문은 반사회질서의 법률행위를 무효로 하는 민법 제103조입니다. 감액이 아니라 무효라는 점, 그리고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무효가 될 수 있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다만 법원은 이 통로를 좁게 씁니다. 같은 판결은 위약벌 약정과 같은 사적 자치의 영역을 공서양속이라는 일반조항으로 제한적으로 해석할 때에는 당사자의 지위, 계약의 체결 경위와 내용, 위약벌 약정을 하게 된 동기와 경위, 계약 위반 과정 등을 고려하는 등 신중을 기하여야 하고, 단순히 위약벌 액수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섣불리 무효라고 판단할 일은 아니라고 못 박았습니다. 즉 "금액이 크다"는 주장만으로는 무효 항변이 서지 않습니다.
실제로 무효가 인정된 사안을 보면 감이 잡힙니다. 대법원 2015. 12. 10. 선고 2014다14511 판결은 상장회사의 동업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주주간 계약에서 주식 매매대금 58억 원의 3배에 가까운 146억 원을 위약벌로 정한 사안에서, 약정된 벌이 과도하게 무거워 공서양속에 반한다는 취지로 원심을 파기환송했습니다. 반대로 2015다239324 사안에서는 위약벌 5억 원에 대하여, 채권자가 우월적 지위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위약벌 조항이 양 당사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며 채권자가 별도의 손해배상을 구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부당하게 무겁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두 사건을 나란히 놓으면, 결정적인 것은 금액의 절대치가 아니라 이행 확보로 얻는 이익과 벌의 무게 사이의 비례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계약금액 3억 원짜리 용역계약에서 위약벌을 3억 원으로 정했더라도, 그 의무가 영업비밀 유출 금지처럼 위반 시 회복이 극히 어려운 것이라면 무효로 보기 어렵습니다. 반면 단순한 서류 제출 지연에 계약금액 전액을 위약벌로 물리는 조항이라면 무효 주장의 여지가 커집니다.
당사자의 지위 — 독점적·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밀어 넣은 조항인지.
조항의 대칭성 — 위약벌이 쌍방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지, 한쪽에만 부과되는지.
담보하려는 의무의 성격 — 위반 시 회복이 어려운 의무일수록 무거운 벌이 정당화됩니다.
채권자가 별도의 실손해 배상까지 함께 구하고 있는지.
위약벌 액수와 계약금액·예상 손해액의 비율 — 배수 자체가 기준은 아니나 유력한 표지입니다.
과도한 위약벌은 민법 제103조에 따라 일부 또는 전부가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액수가 많다는 사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위약벌을 청구당했다면 — 항변을 세우는 순서
위약벌 청구를 받은 쪽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감액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질을 다투는 것입니다. 앞서 보았듯 위약벌로 확정되면 감액이라는 선택지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민법 제398조 제4항의 추정은 피고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므로, 피고는 상대방이 내세우는 특별한 사정을 하나씩 깨뜨리는 데 집중하면 됩니다. 계약서에 실손해 배상 조항이 따로 없다는 점, 위약금 조항이 사실상 손해 전보 기능을 한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두 번째 축은 채무불이행 자체와 귀책사유입니다. 민법 제390조는 채무자가 채무의 내용에 좇은 이행을 하지 아니한 때 채권자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단서에서 "채무자의 고의나 과실 없이 이행할 수 없게 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정합니다. 위약벌 역시 채무불이행에 대한 제재이므로, 애초에 채무불이행이 없었거나 그것이 채무자의 귀책사유에 기한 것이 아니라면 위약벌 청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조항이 정한 발동 요건, 예컨대 적법한 최고나 계약 해제 절차를 채권자가 거쳤는지도 함께 점검해야 합니다.
세 번째 축이 무효 주장입니다. 성질 다툼에서 밀려 위약벌로 인정될 경우를 대비하여 민법 제103조 위반에 따른 일부 무효를 예비적으로 주장해 둡니다. 이때는 "얼마를 넘는 부분이 무효인지"를 스스로 특정하고, 그 근거로 담보되는 의무의 성격, 조항의 비대칭성, 실제 예상 손해액과의 격차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합니다. 막연히 과다하다고만 하면 앞서 본 대로 배척되기 쉽습니다.
가령 매매대금 10억 원 계약에 위약벌 3억 원 조항이 있고 매도인의 실제 손해가 5,000만 원 정도로 추산되는 사안을 가정해 봅니다. 매수인은 우선 그 조항이 손해배상액의 예정이라고 다투어 제398조 제2항에 따른 감액의 길을 열려 할 것이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위약벌 3억 원 중 일정액을 초과하는 부분이 공서양속에 반하여 무효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두 주장은 양립할 수 있으므로 주위적·예비적으로 함께 세워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1단계 — 성질 다툼: 위약금은 손해배상액의 예정으로 추정된다는 점을 유지시킵니다.
2단계 — 채무불이행 부존재 또는 귀책사유 부존재를 다툽니다.
3단계 — 조항의 발동 요건(최고, 해제, 통지 등) 미충족을 지적합니다.
4단계 — 위약벌로 인정될 경우에 대비해 민법 제103조 일부 무효를 예비적으로 주장합니다.
5단계 — 그 조항이 약관이라면 약관규제법 위반이라는 별도의 무효 사유를 검토합니다.
감액 주장부터 꺼내면 위약벌이라는 상대방의 전제를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항변의 첫 단추는 언제나 성질 다툼입니다.
약관에 들어 있는 위약벌 — 약관규제법 제8조라는 또 다른 통로
위약금 조항이 개별 교섭의 산물이 아니라 사업자가 미리 마련해 둔 정형 서식에 들어 있다면, 민법과는 다른 길이 하나 더 열립니다.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 제8조는 "고객에게 부당하게 과중한 지연 손해금 등의 손해배상 의무를 부담시키는 약관 조항은 무효로 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성질이 위약벌인지 손해배상액의 예정인지를 먼저 가릴 필요 없이, 고객에게 부당하게 과중한 부담을 주는지만 따져 무효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판례로도 뒷받침됩니다. 대법원 2009. 8. 20. 선고 2009다20475, 20482 판결은 고객에게 부당하게 과중한 손해배상의무나 위약벌 등을 부담시키는 약관 조항은 약관규제법에 따라 무효라고 보았습니다. 위약금 약정이 약관에 담겨 있는 경우에는 그것이 손해배상액의 예정인지 위약벌인지 구분할 필요 없이, 고객에게 부당하게 과중한 부담을 주는 때에 약관규제법 위반으로 무효가 된다는 취지로 읽히는 판시입니다.
실무에서는 프랜차이즈 가맹계약의 중도 해지 위약금, 통신·정기구독 서비스의 약정 해지 위약금, 헬스장이나 학원의 회원약관에 붙은 위약금 조항 등이 여기에 해당하기 쉽습니다. 예컨대 잔여 약정기간의 이용요금 전액을 위약금으로 물리면서 사업자가 절감하게 되는 비용은 전혀 공제하지 않는 조항이라면, 고객에게 부당하게 과중한 손해배상 의무를 지우는 것으로 볼 여지가 있습니다.
다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개별적으로 교섭하여 문구까지 조정한 조항은 약관이 아니므로 이 통로를 쓸 수 없고, 앞서 본 민법 제103조로 돌아가야 합니다. 계약 협상 과정의 이메일이나 수정본 이력이 남아 있다면, 그 자체가 약관성 여부를 가르는 자료가 됩니다.
약관에 들어 있는 위약금이라면 위약벌인지 예정인지 가릴 것 없이, 과중성만으로 약관규제법 제8조에 따른 무효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계약서에 분명히 '위약벌'이라고 적었는데도 법원이 손해배상액의 예정으로 볼 수 있나요?
A. 가능합니다. 대법원 2022. 7. 21. 선고 2018다248855, 248862 전원합의체 판결은 위약금의 성질이 계약서 문언과 체결 경위, 약정의 주된 목적 등을 종합한 의사해석의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명칭은 여러 판단 요소 중 하나일 뿐입니다. 특히 계약에 실손해 배상에 관한 다른 조항이 전혀 없다면, '위약벌'이라는 표기에도 불구하고 민법 제398조 제4항의 추정이 유지되어 손해배상액의 예정으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Q. 위약벌을 청구하려면 실제로 손해를 입었다는 점을 증명해야 하나요?
A. 증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위약벌은 손해의 전보가 아니라 채무 이행을 확보하기 위한 제재이기 때문입니다. 채권자가 증명할 것은 위약벌 약정의 존재, 상대방의 채무불이행 사실, 그리고 그 불이행이 상대방의 귀책사유에 기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만 손해가 사실상 없다는 사정은 뒤에 공서양속 위반 여부를 판단할 때 채무자에게 유리한 자료로 다시 등장할 수 있습니다.
Q. 위약벌을 받으면서 실제 손해에 대한 배상도 따로 청구할 수 있나요?
A. 원칙적으로 가능합니다. 위약벌은 손해배상과 목적이 다르므로, 위약벌을 받고도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배상을 별도로 구할 수 있습니다. 반면 손해배상액의 예정이라면 실제 손해가 예정액을 초과하더라도 그 초과분은 청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위약벌과 함께 청구하는 실손해 부분은 통상의 원칙대로 손해의 발생과 액수를 모두 증명해야 합니다.
Q. 위약벌이 너무 과하면 법원이 적당히 깎아 줄 수 있나요?
A. 감액은 되지 않습니다. 대법원 2022. 7. 21. 선고 2018다248855, 248862 전원합의체 판결은 손해배상액의 예정에 관한 민법 제398조 제2항을 유추적용하여 위약벌을 감액할 수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대신 민법 제103조에 따라 그 위약벌 약정의 일부 또는 전부가 공서양속에 반하여 무효라고 다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무에서는 감액이 아니라 무효의 범위를 특정해 주장하는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Q. 위약금이 계약금액의 몇 배가 넘으면 무효인가요?
A. 몇 배라는 고정된 기준선은 없습니다. 대법원 2015. 12. 10. 선고 2014다14511 판결은 주식 매매대금 58억 원의 3배에 가까운 146억 원의 위약벌을 과도하게 무겁다고 보아 원심을 파기환송했지만, 대법원 2016. 1. 28. 선고 2015다239324 판결은 위약벌 5억 원에 대해 부당하게 무겁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기준은 배수가 아니라 이행 확보로 채권자가 얻는 이익과 벌의 무게 사이의 비례성이며, 액수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섣불리 무효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Q. 계약을 못 지킨 데 제 잘못이 없어도 위약벌을 물어야 하나요?
A.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민법 제390조 단서는 채무자의 고의나 과실 없이 이행할 수 없게 된 때에는 손해배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위약벌도 채무불이행에 대한 제재인 이상, 불이행에 채무자의 귀책사유가 없다면 청구가 인정되기 어렵습니다. 다만 계약에서 귀책사유를 묻지 않고 위약금을 물리기로 명확히 정했는지, 이행보조자의 과실이 개입했는지 등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계약 문언을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맺음말
위약벌 사건은 "얼마를 깎을 것인가"의 싸움이 아니라 "이 조항이 무엇인가"의 싸움입니다. 민법 제398조 제4항이 위약금을 손해배상액의 예정으로 추정하는 이상 출발점은 예정이고, 위약벌이라는 결론을 얻으려면 이중배상 구조 같은 특별한 사정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위약벌로 확정되면 대법원 2022. 7. 21. 선고 2018다248855, 248862 전원합의체 판결에 따라 민법 제398조 제2항을 유추적용한 감액은 불가능해집니다.
그 대신 남는 통로가 민법 제103조에 따른 일부 또는 전부 무효입니다. 다만 법원은 액수가 많다는 사정만으로 섣불리 무효를 인정하지 않고, 당사자의 지위와 조항의 대칭성, 담보하려는 의무의 성격, 예상 손해액과의 격차를 두루 살핍니다. 청구하는 쪽이라면 손해 발생과 액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을 살리되 조항의 발동 요건을 빠짐없이 갖추어야 하고, 청구당한 쪽이라면 성질 다툼과 귀책사유 부존재, 그리고 예비적 무효 주장을 층층이 세워야 합니다. 계약이 약관 형태라면 약관규제법 제8조라는 별도의 무효 통로도 함께 검토할 가치가 있습니다.
결국 승패는 계약서에 어떤 조항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는지, 협상 과정에서 어떤 문서가 오갔는지에서 갈립니다. 위약금 조항 하나만 들고 판단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수원과 경기 남부에서 계약 분쟁을 다루다 보면 조항의 이름만 믿고 대응 방향을 잘못 잡아 감액 기회를 놓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되니, 청구서나 내용증명을 받았다면 계약서 전문과 교섭 자료를 갖추어 이른 단계에 법률 검토를 받아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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