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부터 2022년 상반기까지, 수도권 지식산업센터 분양 시장은 아주 뜨거웠습니다(사실 모든 자산 시장이 뜨거웠죠).
아파트에 집중된 규제를 피해 투자 수요가 몰렸고, "계약금만 걸어두면 프리미엄이 붙는다"는 말이 공공연히 돌 정도였습니다. 금리가 가파르게 오르자 시장은 빠르게 식었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사건은 정확히 그 변곡점 위에서 벌어진 분쟁입니다. 투자 활황기 이후에 으레 그렇듯 누군가는 빠져나가고, 누군가는 물렸는데, 그 물린 사람이 소송을 제기하고는 "그 계약은 전부 무효였습니다."라고 주장을 한 것이죠.
5억 5,000만 원이 여섯 개의 분양권이 되기까지
2022년 6월 초, 투자자 A씨는 지식산업센터 분양대행 업무 등을 하던 컨설팅업체 C사에 5억 5,000만 원을 빌려주었습니다. 이자는 연 20%, 변제기는 약 한 달 뒤였습니다.
변제기가 다가오자 A씨는 C사에 요청했습니다. 원금 중 4억 6,000만 원은 현금으로 돌려주는 대신, 수도권의 한 지식산업센터 호실들의 계약금으로 지급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A씨는 해당 지식산업센터 같은 층의 호실 여섯 개를 확보했습니다. 두 개는 시행사 측과 직접 분양계약을 체결했고, 네 개는 이미 그 호실들을 분양받아 두었던 개인 B씨로부터 분양권을 사들이는 방식이었습니다. C사로부터 약정 이자와 나머지 원금 일부는 현금으로 돌려받았고, 수분양자 명의변경 절차까지 마쳤습니다.
몇 달 뒤인 2022년 가을, A씨는 B씨에게서 사들인 네 개 호실 가운데 두 개를 전매하였고, 그 때는 마침 시장이 식어가던 시점이었습니다. 문제는 남은 네 개였습니다.
"그 계약들은 전부 무효였습니다"
2024년, A씨는 시행사 측과 B씨를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시행사 측에는 분양계약 계약금 약 1억 3,700만 원을, B씨에게는 분양권 매매대금 약 1억 3,700만 원을 각 반환하고, B씨는 수분양자 명의변경의 말소 절차까지 이행하라는 청구였습니다. 합계 2억 7,500만 원가량이 걸린 싸움이 되었죠.
A씨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① 지식산업센터에는 제조업·지식산업·정보통신산업 등 법이 정한 업종의 시설만 입주할 수 있는데(산업집적활성화 및 공장설립에 관한 법률, 이하 '산업집적법'), 자신은 실제로 사업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자격 없는 자가 체결한 계약으로서 무효라는 것이었습니다.
② 설령 그 규정이 계약을 곧바로 무효로 만드는 '효력규정'이 아니라 하더라도, C사와 서로 짜고(통정하여) 법을 위반한 계약이니 반사회질서 법률행위(민법 제103조)로서 무효라는 것이었습니다.
③ 항소심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이 계약들은 애초에 전매 차익을 노린 '명의대여형 금전투자계약'이었을 뿐 진짜 분양계약이 아니었다는, 이른바 통정허위표시(민법 제108조) 주장을 개진하였습니다. 자신의 사업자등록조차 "계약을 위해 형식만 갖춘 허위 등록이었다"고 했습니다.
요컨대, 자기 손으로 체결한 계약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위법을 먼저 고백한 것입니다. 흔치 않아 보이지만, 소위 '시장이 꺾일 때마다' 법원에 적지 않게 등장하는 유형이기도 합니다.
1심: 회사들은 이겼지만, B씨는 싸워보지도 못한 채 졌습니다.
2025년 9월 선고된 1심 판결에서 시행사 측이 승소했습니다. 법원은 산업집적법의 입주자격 관련 규정이 계약의 효력까지 좌우하는 '효력규정'이 아니라고 보았고, 통정하여 법을 위반했다는 점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B씨에 대한 결론은 정반대였는데, B씨가 소송에 전혀 대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민사소송에서 상대방의 주장 사실을 다투지 않으면 그 사실을 자백한 것으로 간주됩니다(민사소송법 제150조 제3항). 결국 재판부는 A씨가 주장한 사실관계를 그대로 인정하여, B씨에게 1억 3,700여만 원과 연 12%의 지연이자를 지급하고 명의변경까지 말소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금전 지급 부분에는 가집행 선고도 붙었고요.
항소심: B씨가 승소하였습니다.
B씨는 항소심에 이르러 비로소 저를 대리인으로 선임하고 본격적으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짚어둘 점 하나는, 자백간주로 인정된 '사실'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법 체계에서 항소심은 사실관계와 법리를 처음부터 다시 심리하는 구조(속심)의 성격도 있기 때문에, 항소심에서 다투면 1심의 자백간주는 더 이상 유지되지 않게 됩니다. 항소심에서는 금융기관에 대한 금융거래정보 제출명령으로 돈의 흐름이 계좌 단위로 복원되었고, C사 관계자에 대한 증인신문까지 이뤄졌습니다.
2026년 5월 항소심 판결이 선고되었고, 그 판단 내용은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법원은 지식산업센터 분양계약을 체결하는 시점부터 입주대상 업종에 종사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입주할 때까지 자격을 갖추면 된다고 보았습니다. 실제로 A씨는 계약 후 정보통신업 등을 업종으로 사업자등록을 마쳐 입주자격을 갖추었습니다. 나아가 산업집적법은 '입주대상 시설이 아닌 용도로 활용하려는 자에게' 양도·임대하는 행위를 금지할 뿐이므로, 그 반대해석상 자격을 갖추어 활용하려는 사람에게 분양권을 넘기는 것 자체는 막혀 있지 않습니다. "실입주하지 않을 사람의 분양·전매는 원천적으로 금지된다"는 A씨 주장의 전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죠.
2. 법을 위반하면 계약은 무효일까요? 의외로 많은 분들이 "위법 = 계약 무효"로 직결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법률 규정에는 위반 시 계약의 사법상 효력까지 부정되는 '효력규정'과, 행정제재나 형사처벌로 위반행위를 억제할 뿐 일단 체결된 계약의 효력은 건드리지 않는 '단속규정'이 있습니다. 산업집적법은 입주자격이나 처분제한을 위반한 행위에 대해 시정명령, 형사처벌 같은 제재만 정해 두었을 뿐, 그에 위반하여 체결된 계약이 무효라는 규정은 두고 있지 않습니다. 1심과 항소심 모두 이들 규정을 단속규정으로 보았고, 항소심에서도 이어진 전매제한 규정 위반 주장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핵심 논거는 거래의 안전입니다. 위반 계약을 일률적으로 무효라고 해 버리면, 매도인이든 매수인이든 시장 상황이 자기에게 불리해질 때마다 언제든 "그 계약은 무효"라고 외칠 수 있게 되버리죠. 바로 이 사건에서 벌어진 일처럼 말입니다.
3. '가짜 계약'이 되려면 양쪽 모두가 가짜라는 데 합의했어야 합니다. 이른바 통정허위표시(민법 제108조)는 한쪽의 속마음만으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표시된 의사가 진의와 다르다는 점에 관하여 상대방과 사이에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복원된 자금 흐름은 A씨 주장과 정반대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A씨는 변제기에 원금을 현금으로 전부 돌려받을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먼저 "그 돈으로 계약금을 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법원은 이를 두고, A씨가 자신의 의사에 따라 변제기에 반환받을 대여금 중 일부로 계약금을 납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남의 투자 구조에 이름만 빌려준 것이 아니라, 자기 돈으로 자기 계약을 한 것이라는 의미이죠. A씨가 스스로 내세운 '전매 차익 목적'이라는 것도 호실에 대한 권리를 실제로 취득하는 것을 전제로 해야 성립하는 개념이고, 분양계약서에는 분양권 전매에 관한 조항까지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변론 과정의 증인신문 등에서 드러난 사정 하나가 이 사건의 성격을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A씨가 같은 시기, 같은 경위, 같은 구조로 취득한 여섯 개 호실 가운데 두 개는 이미 전매로 이익을 실현했는데, A씨는 그 두 개에 대해서는 아무런 무효 주장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즉, 이익이 난 계약은 유효한 거래이고, 손실이 난 계약은 짜고 친 가짜라는 것인데, 무효라는 법리는 그렇게 골라 쓸 수 있는 도구가 아닙니다. 만약 A씨 주장대로 이 거래 구조 전체가 무효라면, 이익을 보고 빠져나온 두 개 호실의 거래 역시 무효가 되어야 한다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항소심은 1심 판결 중 B씨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A씨의 B씨에 대한 청구를 기각했으며, 시행사 측에 대한 A씨의 항소도 모두 기각했습니다. 소송 총비용은 A씨가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남기는 것
1. '무효' 주장은 투자 손실의 출구가 아닙니다. 법원은 계약이 유효하게 성립했는지를 따질 뿐, 계약 이후 시장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가지고 계약의 운명을 정해 주지 않습니다. 도장을 찍던 날의 "나"와 시장이 식은 뒤의 "나"는 같은 사람이고, 법은 그 둘을 구별해 주지 않는 것이죠.
2. 법 위반이 곧 계약 무효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효력규정과 단속규정의 구분은 일반인에게 낯선 개념이지만, 실제로 이런 유형의 분쟁에서 승패를 가르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어떤 규제를 위반했다는 사정만으로 "그러니 계약은 무효이고 돈은 돌려받는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따라 나오지 않습니다.
3. 속마음은 계약을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사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내심의 사정은, 상대방과 '가짜'라는 점에 관한 합의가 객관적으로 입증되지 않는 한 법적으로 무력합니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허위 사업자등록 같은 자신의 위법을 스스로 자인하는 부담만 떠안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습니다.
4. 어쩌면 가장 실용적인 교훈인데요, 소장을 받았다면 반드시 대응해야 합니다. B씨는 1심에서 단 한 번도 다투지 않아 자백간주로 패소했고(개인적인 사정이 있기는 했습니다), 가집행 선고가 붙은 1억 4,000만 원 가까운 지급 판결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제가 도와드려 항소심에서 바로 잡기는 했습니다만, 그것은 항소심이 사실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심리하는 구조인 데다 다툴 증거가 남아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죠. 물론, 법리적으로 애초에 무리한 소송이기도 했고요. 그 사이의 시간, 비용, 강제집행 위험은 고스란히 본인의 몫이 되고 맙니다. 법정에서 가장 비싼 선택은 침묵이라고나 할까요.
※ 저는 이 사건 항소심에서 B씨를 대리하였습니다. 당사자 보호를 위해 인적사항은 모두 익명 처리하고 일부 사실관계는 단순화하였으며, 본문 중 '여섯 개 호실 중 두 개의 전매' 등 일부 사정은 판결문이 아닌 변론 과정(증인신문 및 사실확인서 등)에서 확인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이 글은 일반적인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구체적 사안에 대한 법률 자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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