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단계에서 가끔 이런 요청을 받습니다.
"오늘 조사인데요, 변호사님 그냥 옆에만 좀 같이 가주시면 안 될까요?"
말하자면 '묵묵히 동석만 해달라'는 겁니다.
일정이 맞으면 그렇게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그런 식의 대응은 사건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수사는 밀행성을 원칙으로 합니다.
수사기록에 적힌 고소인의 주장, 수집된 증거, 수사관의 판단은 비밀이며 피의자에게 일절 공개되지 않습니다.
피의자가 본인의 일인데도 무엇 하나 모른 채 조사에 응해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수사기관만이 정답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정답지를 토대로, 겉보기엔 일상적인 질문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교하게 설계된 신문이 시작됩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피의자 본인은 ‘진실을 말하면 알아주겠지’라는 순진한 믿음을 품고 조사실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수사관은 이미 결론을 정해놓은 상태에서 그에 맞는 자백을 끌어내려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상황에서 단순히 변호사가 ‘옆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 어떤 효과를 기대하십니까?
영화처럼 변호사가 질문마다 손을 들고 “이의 있습니다”를 외치며 진술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실의 수사절차는 법정 드라마가 아닙니다.
수사단계에서 변호인은 진술을 대신할 수도 없고, 피의자가 직접 모든 진술을 해야 합니다.
변호사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진술을 듣고 조언을 메모하며, 위법하거나 압박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항의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수사관의 질문을 면밀히 분석하고, 그 속에 감춰진 상대방 주장과 증거를 추론해내는 일은 전혀 다릅니다. 이것이야말로 변호사의 본질적 역할입니다.
변호사는 수사관의 질문 하나하나를 분석하면서, 그 질문 뒤에 숨어 있는 고소인의 주장과 제출된 증거의 윤곽을 짐작합니다.
말하자면 상대가 어디까지 쥐고 있는지를 현장에서 감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향후 어떤 방향으로 반박해야 할지 전략을 세울 수 있고, 필요한 증거를 역추적해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피의자신문 이후, 즉 변호사 동행 이후의 전략과 대응에 필요한 것입니다.
수사는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존재하는 체계적인 절차입니다.
진술 하나 잘못하면, 의도와는 무관하게 범죄자로 낙인찍힐 수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전략 없이 조사에 임하는 것은 마치 상대는 총을 들고 있는데 맨몸으로 대화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 총이 장전된 상태인지, 총알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 말이죠.
경찰의 질문이 단순한 확인용인지, 자백을 유도하려는 덫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겠다’고 하면, 수사관 입장에서는 피의자 본인이 혐의를 입증해주는 셈이 됩니다.
경찰조사 단계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앞을 내다보는 전략’입니다. 수사관의 예상 질문에 대한 시뮬레이션, 핵심 쟁점 파악, 불필요한 진술 방지, 필요한 반박 자료 수집,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변호인 의견서입니다.
변호인 의견서는 단순한 형식적 서류가 아닙니다.
경찰이 의도적으로 간과했거나, 고소인의 진술과 충돌하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지적하는 강력한 반격 수단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수사기관의 일방적인 ‘정답지 작성’을 견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문서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불송치이유서나 불기소이유서에 기재되는 내용의 출처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사에만 같이 가달라’는 식의 접근을 한다면, 이 모든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접근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자명합니다.
사건 파악은커녕 피의자의 입장조차 제대로 정리할 시간 없이 조사실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전략을 세우고, 무슨 조언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분들 중 일부는 사후에 “변호사가 도움이 안 됐다”고 말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부터 ‘변호’를 요청한 게 아니라 ‘방청’을 요청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의료로 비유하자면, 심장 수술을 하면서 외과의사를 그냥 수술실에만 데려가달라고 한 셈입니다. 수술 계획도 공유하지 않고, 진단도 없이 말입니다.
국선변호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의견서도 안 써주고, 합의도 안 도와준다"고 말합니다.
당연합니다.
국선변호는 공익적 성격이 강하고, 정해진 보수와 시간 내에서 돌아가는 시스템입니다.
수십 건의 사건을 병렬로 처리해야 하며, 한 사람에게 쏟을 수 있는 정성은 구조적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사건을, 당신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필요하다면, 당신 스스로가 비용과 노력을 들여 선택해야 할 문제입니다.
성범죄 혐의는 절대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유죄 확정 시 신상정보 등록, 취업제한, 보호관찰 등 법적 제재는 물론이고, 사실상 인생의 궤도가 완전히 바뀔 수 있습니다.
기소유예나 무혐의 같은 결과는, 아무런 준비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분석된 전략, 체계적인 대응, 그리고 전문적인 조력이 있어야 가능한 결과입니다.
결국 경찰조사 동행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그 시작을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전략 없이 동행만 요청한다면, 시작부터 방향을 잃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면, 이후의 모든 절차는 벗어나기 어려운 굴레가 됩니다.
수사는 진실을 묻는 자리가 아닙니다.
수사는 진술을 채집하는 곳이며, 그 진술이 유죄의 조각으로 쓰일지 무혐의의 반증이 될지는 당신이 아닌 수사기관이 판단합니다.
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혼자 잘해보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허황된지는 사건이 끝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진짜 변호가 필요한 시점은 조사 당일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당신의 운명이 결정되기 전에 누군가의 전략이 개입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사관의 손 안에서 당신은 단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완성해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피의자는 수사기관과 '정보의 비대칭'이라는 근본적인 불리함을 안고 시작합니다.
수사기관은 기록을 전부 들여다본 상태에서 질문을 던지지만, 피의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무장해제를 당한 상태에서 진술을 해야 하는 구조입니다.
이처럼 일방적이고 불공정한 게임에서 살아남으려면, 누군가는 룰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변호인은 그 룰을 아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수사는 비공개지만, 수사관의 언행을 통해 사건의 흐름을 짚어내고 진실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플레이어입니다.
결국 수사 초기부터 변호인을 대동한다는 것은, 단순히 법적 조력을 받는 차원을 넘어 정보 비대칭 상황에서 스스로를 방어하는 최소한의 생존 전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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