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글은 유죄가 확정된 사람이 아닌 피의자와 피고인의 기본권에 관한 글임을 밝혀둡니다.>
지난 17일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8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성여씨에 대한 재심 재판이었습니다.
윤성여씨는 1998. 9. 16. 경기도 화성군에서 당시 13세였던 박모양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제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항소, 상고하였으나 모두 기각되었었습니다.
그런데 진범인 이춘재가 이 사건이 자신의 범행임을 자백하였고, 결국 윤성여씨는 재심을 통해서 사건 발생 32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국가로부터 막대한 형사보상금을 받게 되겠지만, 그가 잃어버린 청춘을 돈으로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관련기사>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3049195
우리는 바로 여기서 피의자와 피고인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윤성여씨가 파렴치한 강간살인범으로 몰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불법 체포·감금한 상태에서 가혹행위를 통해 자백을 얻어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자들이 ‘진범으로 믿고 가혹행위를 한 것인지’,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여론과 실적의 압박에 못 이겨서 가혹행위를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헌법과 형사소송법 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문명국에서 형사절차의 기본원칙으로 삼고 있는 무죄추정의 원칙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피의자와 피고인의 기본적인 권리가 제대로 지켜졌다면 그와 같은 어이없는 수사와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국민참여재판을 진행하면서 제가 배심원들에게 반드시 물어보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열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죄인을 만들지 말라.’는 법언(法諺)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강간, 살인 등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서 한두 명 정도의 억울한 사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흉악범을 놓치더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라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 배심원들 모두가 “억울하게 처벌 받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답을 합니다.
그런데 막상 강력범죄에 대한 기사에 달린 댓글들은 위와 같은 태도와 사뭇 다릅니다. 재판을 통해서 유죄가 확정되기는커녕 아직 수사가 진행 중인 사건임에도 피의자 또는 피고인에 대해서 각종 잔인한 방법으로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댓글이 추천 수를 가장 많이 받은 댓글로 올라와 있습니다.
32년 전 윤성여씨가 화성연쇄살인사건 8차 사건의 범인으로 검거되었다는 기사에 국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기사가 나오는 순간부터 윤성여씨는 이미 13살 어린 소녀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자가 되어 쏟아지는 비난을 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만일 이 사건이 2020년에 발생하였다면 수많은 네티즌들이 이미 윤성여씨의 집이나 가족관계까지 알아내어 협박하고 비난하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서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를 찍어내는 기자들과 언론사의 책임도 매우 큽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수사기관에서 제대로 수사하고 법원에서 제대로 재판해서 혐의를 벗으면 되잖아.”라고 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윤성여씨와 같은 피해자가 또 나오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요? 그리고 무혐의 또는 무죄가 밝혀지면 그 피의자나 피고인은 다시 원래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제가 경험한 많은 형사사건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피의자에게 경찰관이 “그냥 인정하시면 벌금만 내고 아무 불이익 없이 끝나요.”라고 자백을 종용하여 결국 허위자백을 하는 경우, 길고 험난한 재판과정을 거쳐 무죄를 선고 받았음에도 이미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주변에서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경우 등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죄가 확정되지 않은 피의자나 피고인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피의자와 피고인이 가지는 기본권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비롯한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대원칙과 그로부터 유래하는 각종 절차적 보장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즉 유죄가 확정될 때까지는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 유리한 진술을 하고 자료를 확보하여 제출할 수 있는 권리, 변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 권리,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 피의사실이 함부로 공표당하지 않을 권리 등이 보장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충분한 절차 보장을 통해 자신의 방어권을 충분히 행사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명명백백하게 유죄가 인정된 경우라면 그 때 비로소 그에 대해 돌을 던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원님이 피의자를 향해 “네가 네 죄를 알렷다.”라고 외치던 봉건 시대를 탈피한 현대 법치주의 국가의 모습이 아닐는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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