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의 현장조사가 예고되자 불안한 마음에 업무용 메신저 대화와 엑셀 파일을 지웠다가, 뒤늦게 증거인멸로 처벌받는 것 아니냐는 걱정에 잠을 못 이루는 직원이 적지 않습니다. 형법상 증거인멸죄는 '타인'의 사건에 관한 증거를 없앤 경우에만 성립하기 때문에, 오로지 자기 처벌을 피하려고 자기 사건의 증거를 지운 행위는 이 죄로 처벌되지 않는 것이 판례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이 원칙이 곧바로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운 자료가 회사나 상사의 사건 증거이기도 한 경우,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 지운 경우, 공정거래법의 조사방해 규정이 적용되는 경우에는 결론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 글에서는 자기 사건 증거인멸이 죄가 되지 않는 이유와 그 한계, 그리고 조사를 앞둔 직원이 실제로 확인해야 할 지점을 짚어보겠습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증거인멸죄의 구조 — 처벌 대상은 '타인의 사건' 증거
증거인멸죄를 규정한 형법 제155조 제1항은 "타인의 형사사건 또는 징계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 은닉, 위조 또는 변조하거나 위조 또는 변조한 증거를 사용한 자"를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합니다. 조문 문언부터 처벌 대상을 '타인의' 사건 증거로 한정하고 있다는 점이 출발점입니다. 여기서 증거를 '인멸'한다는 것은 증거의 존재나 효력을 없애거나 줄이는 모든 행위를 뜻하므로, 파일을 삭제하는 것은 물론 서류를 파쇄하거나 하드디스크를 초기화하고 휴대전화를 교체하는 것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또한 같은 조 제3항은 피고인, 피의자 또는 징계혐의자를 모해할 목적으로 범행한 경우 10년 이하의 징역으로 형을 무겁게 정하고, 제4항은 친족 또는 동거의 가족이 본인을 위하여 범한 때에는 처벌하지 않는다고 정합니다. 즉 이 조문 전체는 "남의 사건에 개입해 사법 작용을 방해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구조입니다. 직원이 공정위 조사를 앞두고 자료를 지웠다는 사실만으로는 죄가 정해지지 않고, 그 자료가 누구의 어떤 사건에 관한 증거인지를 먼저 따져야 합니다.
제155조 제1항 — 타인의 형사·징계사건 증거 인멸·은닉·위조·변조, 5년 이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 벌금.
제155조 제3항 — 피고인·피의자·징계혐의자를 모해할 목적이면 10년 이하 징역.
제155조 제4항 — 친족·동거가족이 본인을 위해 범한 때에는 처벌하지 않음.
증거인멸죄는 지운 행위 자체가 아니라, 지운 증거가 '타인의 사건'에 관한 것인지로 성립 여부가 갈린다.
자기 사건 증거를 지워도 죄가 안 되는 이유 — 기대가능성의 법리
범인이 자기 사건의 증거를 없애는 것은 처벌받지 않으려는 본능적 행동에 가깝다는 것이 판례와 통설의 설명입니다. 형사절차에서 피의자와 피고인에게는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고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스스로 제출할 의무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자기 불리한 증거를 그대로 보존하라고 강제하고 어기면 따로 처벌하는 것은, 법이 기대할 수 없는 행위를 요구하는 셈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형법은 자기 사건 증거인멸을 처벌 대상에서 아예 제외하고, 문언상으로도 '타인의' 사건이라는 표지를 두고 있습니다.
이 원칙은 자료의 종류와 상관없이 적용됩니다. 예컨대 담합 의혹으로 조사를 받게 된 영업팀 직원이 자기가 참여한 가격 협의 내용이 담긴 카카오톡 대화를 지웠고, 그 내용이 자기 처벌의 근거가 될 자료였다면, 그 삭제 행위만으로는 형법 제155조 제1항의 증거인멸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결론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의 처벌이나 징계를 피하려는 목적일 때에 해당한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삭제의 동기와 대상 자료가 누구의 사건에 연결되는지가 수사와 재판에서 집중적으로 다투어지는 이유입니다.
공정위 조사 단계에서 '형사사건'이 되는 시점
공정위 조사는 원칙적으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제81조에 따른 행정조사로 시작됩니다. 공정위는 제81조 제2항에 따라 사업장에 출입해 장부·서류·전산자료·음성녹음자료 등을 조사할 수 있고, 같은 조 제6항에 따라 자료의 제출을 명하거나 제출된 자료를 일시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단계의 증거는 아직 '형사사건'의 증거가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증거인멸죄에서 말하는 형사사건은 이미 수사가 시작되었거나 공소가 제기된 사건에 한정되지 않고, 장차 형사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사안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부당한 공동행위(담합)와 같이 공정거래법 제124조 제1항 제9호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억원 이하의 벌금으로 정한 행위는 조사 이후 고발되어 수사기관 수사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조사를 앞둔 시점의 자료도 장차 형사사건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직 형사사건이 아니니 지워도 된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동시에 "조사받는 중이니 반드시 증거인멸이다"라는 판단도 정확하지 않으며, 결국 자료가 누구의 사건에 관한 것인지, 삭제의 목적이 무엇인지로 나누어 보아야 합니다.
자기 사건과 회사·동료 사건이 겹칠 때 — 대법원 94도2608 판결
현실의 사건에서 자료는 한 사람만의 증거가 아닙니다. 담합 의혹이라면 직원 개인의 가담 사실을 보여주는 같은 대화방이 회사의 위반행위를 입증하는 증거이자 다른 직원들이 가담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대법원 1995. 9. 29. 선고 94도2608 판결은 핵심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피고인이 자신이 형사처분이나 징계처분을 받을 것을 우려해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증거를 없앴다면, 그 행위가 동시에 공범자의 사건 증거를 인멸한 결과가 되더라도 증거인멸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판결은 공범이 아닌 제3자의 사건 증거를 인멸한 결과가 된 경우에도 같은 법리가 적용된다고 보았습니다.
해당 사건에서는 여객선 정원초과 운항 확인서를 보관하던 공무원들이 형사처벌과 징계를 받을 것을 두려워해 서류를 소각하게 했는데, 대법원은 그 서류가 구속기소된 다른 사람의 선박안전법위반 사건 증거도 되었지만 자기 이익을 위한 행위인 이상 증거인멸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다만 서류 자체를 손상한 행위는 공용서류손상죄로 별도 판단되었습니다). 이 기준을 공정위 사건에 대입하면, 직원이 자기 가담 사실을 숨기려고 대화방을 지웠는데 그 결과 동료나 회사의 증거도 함께 사라졌다 하더라도 증거인멸죄로 곧바로 처벌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법원은 삭제 범위와 시점을 보고 진짜 목적이 자기 보호였는지 판단하므로, 자기와 무관한 자료까지 대량으로 지운 사정은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자기 처벌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지운 증거가 결과적으로 공범이나 제3자의 사건 증거까지 없앴더라도, 판례는 증거인멸죄로 처벌하지 않는다.
증거인멸죄가 성립하는 경우 — 회사 지시·타인 이익·교사
자기 사건 증거라는 이유로 보호받을 수 없는 유형도 분명히 있습니다. 첫째, 직원 본인은 사건과 무관하거나 책임이 없는데 상사나 대표의 사건을 덮어주려고 자료를 지운 경우입니다. 이때 삭제된 증거는 그 직원 입장에서 '타인의' 사건에 관한 증거이므로 제155조 제1항이 적용됩니다. 둘째, 회사가 조직적으로 지시해 여러 직원이 폐기 작업을 나눠 맡은 경우에도, 지시를 받은 직원의 동기가 자기 보호가 아니라 회사나 임원을 위한 것이라면 마찬가지입니다.
셋째, 자기 사건의 증거를 다른 사람에게 지우게 한 경우입니다. 증거를 직접 없앤 사람에게는 '타인의 사건'을 위한 인멸이 되므로 증거인멸죄가 성립하고, 이를 시킨 사람에게는 증거인멸교사죄가 문제 됩니다. 판례는 자기 사건의 증거인멸을 위해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는 원칙적으로 처벌하지 않되, 방어권의 남용으로 볼 수 있을 때에는 증거인멸교사죄로 처벌하는 입장입니다. 팀장이 부하 직원에게 "내 노트북 포맷해 달라"고 부탁한 경우를 예로 들면, 부탁을 받아 실행한 부하 직원은 증거인멸 책임을 피하기 어렵고, 지시한 팀장도 방어권 남용으로 평가되면 교사 책임을 집니다.
상사·대표·동료의 책임을 덮으려고 삭제 — 삭제자에게 '타인의 사건'이므로 성립.
회사의 조직적 폐기 지시에 따라 삭제 — 동기가 자기 보호가 아니면 성립 가능.
자기 사건 증거를 타인에게 시켜 삭제 — 실행자는 증거인멸, 지시자는 방어권 남용이면 증거인멸교사.
회사 법인 사건 증거를 임직원 입장에서 삭제 — 개인 이익이 아닌 법인 이익이면 별도 검토.
증거인멸죄가 안 돼도 남는 책임 — 공정거래법상 조사방해
자기 사건 증거인멸이 형법상 죄가 아니더라도 공정거래법의 별도 규정이 작동합니다. 공정거래법 제125조 제7호는 제81조 제2항에 따른 조사 시 자료의 은닉·폐기, 접근 거부 또는 위조·변조 등을 통해 조사를 거부·방해 또는 기피한 자를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 5천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합니다. 조사관이 현장에 도착한 뒤 직원이 삭제 버튼을 누르거나 서버 접근을 막는 행위가 대표적입니다. 이 규정은 '타인의 사건'을 요건으로 하지 않으므로 자기 이익을 위한 행위도 처벌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제124조 제1항 제13호는 현장조사 중 폭언·폭행, 고의적인 현장진입 저지·지연 등으로 조사를 거부·방해·기피한 자를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억원 이하의 벌금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자료제출명령에 거짓의 자료를 제출한 경우는 제125조 제6호가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 5천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합니다. 한편 조사가 실제로 시작되기 전에 사무실 밖에서 이루어진 삭제는 '조사 시'라는 문언에 곧바로 포섭되지 않을 수 있으나, 그 사실이 이후 포렌식으로 드러나면 조사 협조 여부와 고의를 보여주는 정황으로 불리하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결국 증거인멸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전하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형법 제155조가 비켜 가는 자기 사건 증거 삭제라도, 현장조사 중이라면 공정거래법 제125조 제7호의 조사방해로 처벌될 수 있다.
조사를 앞둔 직원의 대응 — 삭제 대신 보존과 소명
가장 현실적인 조언은 불안해서 지우고 싶더라도 지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장조사에서는 디지털 포렌식 장비로 삭제된 파일과 메신저 기록을 복구하는 일이 흔하고, 삭제 시각과 기기 이용 내역이 로그로 남기 때문입니다. 삭제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 원래 문제 된 위반행위와 별개로 '증거를 없애려 했다'는 불리한 정황이 더해져 수사와 심의 전반에서 신뢰를 잃게 됩니다. 담합 사건에서 자진신고(리니언시) 감면 제도가 있는 만큼, 자료를 지우는 것보다 보존하고 적극 협조하는 쪽이 회사와 개인에게 이익인 경우가 많습니다.
조사 통보를 받은 직원은 먼저 개인 휴대전화와 업무 PC의 자료를 그대로 두고, 회사로부터 폐기나 삭제를 지시받았다면 그 지시를 따르지 말고 지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이미 삭제했다면 어떤 자료를 언제 왜 지웠는지, 자기 사건 자료에 한정되는지를 정리해 변호인과 상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삭제 사실은 조사 과정에서 거의 드러나므로, 먼저 사실관계를 정리해 소명 방향을 세우는 것이 이후의 형사 책임과 징계 책임을 줄이는 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제 휴대전화 대화만 지웠는데 증거인멸죄로 처벌받나요?
A. 오로지 자기 처벌이나 징계를 피하려는 목적으로 자기 사건의 증거만 지웠다면, 형법 제155조 제1항의 증거인멸죄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다만 공정위 현장조사 중에 이루어진 삭제라면 공정거래법 제125조 제7호의 조사방해가 문제 될 수 있습니다.
Q. 팀장이 시켜서 지웠다면 어떻게 되나요?
A. 상사의 책임을 덮기 위해 지웠다면 직원에게는 '타인의 사건' 증거이므로 증거인멸죄가 문제 됩니다. 지시한 팀장에게는 증거인멸교사죄가 성립할 수 있고, 지시를 받은 사정은 양형에서 참작될 뿐 책임 자체를 없애주지는 않습니다.
Q. 같은 대화방에 동료 이야기도 있었는데 같이 지워졌다면요?
A. 대법원 94도2608 판결은 자기 이익을 위한 삭제가 결과적으로 공범이나 제3자의 증거까지 없앴더라도 증거인멸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자기와 무관한 자료까지 광범위하게 지웠다면 목적이 자기 보호였는지가 다투어질 수 있습니다.
Q. 조사 통보 전에 미리 지웠다면 공정거래법 위반은 아닌가요?
A. 제125조 제7호는 '제81조 제2항에 따른 조사 시' 은닉·폐기를 요건으로 하므로 조사 전 삭제는 문언상 곧바로 해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렌식으로 삭제 사실이 드러나면 조사 협조 의사가 없었다는 정황으로 평가될 수 있어 불이익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Q. 삭제한 사실이 드러나면 회사에서 징계를 받나요?
A. 형사처벌 여부와 별개로 취업규칙상 징계 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회사 지시에 따랐는지, 개인 판단이었는지에 따라 징계 수위와 다툴 여지가 달라지므로 지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Q. 이미 지운 뒤라면 지금 무엇부터 해야 하나요?
A. 추가 삭제나 기기 초기화를 멈추고, 지운 자료의 범위와 시점, 동기를 정리해 변호인과 상담해야 합니다. 삭제 기록은 포렌식으로 대부분 확인되므로 숨기기보다 사실관계를 먼저 정리해 소명 방향을 잡는 편이 유리합니다.
맺음말
자기 처벌을 피하려고 자기 사건의 증거를 지운 행위는 형법 제155조 제1항의 증거인멸죄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운 자료가 상사나 회사의 사건 증거인 경우, 누군가의 지시나 부탁이 있었던 경우, 현장조사 중 이루어진 경우에는 증거인멸죄나 공정거래법 제125조 제7호의 조사방해 책임이 문제 됩니다.
결국 핵심은 삭제의 목적과 대상, 그리고 시점입니다. 불안해서 지운 자료라도 조사 과정에서 대부분 복구되므로, 삭제하기 전에 자신의 지위와 자료의 성격부터 확인하시기를 권합니다. 이미 삭제한 경우라면 사실관계를 먼저 정리해 두는 것이 이후 대응의 출발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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