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설계를 맡긴 건축사와 사이가 틀어져 계약이 깨졌는데, 그 사이 공사는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면 건축주는 막막해집니다. 건축사가 "계약이 끝났으니 내 도면은 쓰지 말라"고 나오면, 공사를 멈추고 설계를 처음부터 다시 받아야 하는지가 가장 큰 걱정이기 때문입니다. 설계도면은 건축저작물로 보호되는 저작물이어서, 계약이 해제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건축주가 도면을 계속 써도 되는지가 자동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는 건축설계계약이 깨진 뒤에도 건축주가 설계도면을 계속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 어느 선을 넘으면 저작권 침해 문제가 되는지 법원의 판단 기준을 따라 짚어보겠습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설계도면은 저작물이다 — 건축주가 받은 것은 소유권이 아니라 이용권
건축설계계약에서 건축사가 넘겨주는 결과물은 종이나 파일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설계 내용입니다. 저작권법 제4조 제1항 제5호는 건축물, 건축을 위한 모형 및 설계도서를 저작물의 한 종류로 예시하고 있어, 설계자가 그린 설계도서는 창작성이 인정되는 한 설계자의 저작물이 됩니다. 도면 파일의 물리적 소유와 도면에 담긴 설계의 저작권은 서로 다른 문제이므로, 건축주가 도면 사본을 손에 쥐고 있다고 해서 그 설계를 마음대로 쓸 권리까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조문이 복제의 정의입니다. 저작권법 제2조 제22호는 복제에 "건축물의 경우에는 그 건축을 위한 모형 또는 설계도서에 따라 이를 시공하는 것"을 포함시킵니다. 즉 설계도서를 보고 건물을 짓는 행위 자체가 저작물의 복제에 해당하므로, 건축주가 도면대로 시공하려면 설계자로부터 이용을 허락받아야 합니다. 건축설계계약을 맺고 설계비를 지급하는 것은 사실상 이 이용허락(저작권법 제46조)을 함께 받는 것이고, 대부분의 계약에서는 해당 건축물을 짓는 범위로 허락 범위가 정해집니다.
그래서 계약이 정상적으로 이어지는 동안에는 문제가 드러나지 않다가, 계약이 깨지는 순간 "그 허락도 같이 사라지느냐"가 쟁점이 됩니다. 건축사 입장에서는 계약이 끝났으니 이용허락도 끝났다고 주장하게 되고, 건축주 입장에서는 이미 설계비를 내고 공사까지 진행했으니 허락은 유지된다고 맞서게 됩니다.
도면에 따라 시공하는 것 자체가 저작권법상 복제다 — 건축주는 도면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도면대로 지을 이용권을 받은 것이다.
건축설계계약이 깨지는 경로 — 건축주 해제, 건축사 해제, 합의해지
계약이 끝나는 경로에 따라 정리해야 할 책임이 달라집니다. 먼저 건축주가 먼저 계약을 끝내는 경우입니다. 설계계약은 도급의 성격이 있어 민법 제673조에 따라 일이 완성되기 전이라면 도급인인 건축주가 손해를 배상하고 언제든 계약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이때 건축사가 입은 손해, 즉 이미 한 설계 작업의 대가와 해제 때문에 얻지 못한 이익이 배상 대상이 됩니다. 반대로 건축사가 설계를 지연하거나 품질이 계약에 미달해 건축주가 민법 제544조에 따라 이행을 최고한 뒤 해제하는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지고, 귀책이 건축사에게 있으면 건축주가 오히려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민법 제551조).
건축사가 먼저 계약을 끝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설계비 중도금이나 잔금이 지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건축사가 해제를 통지하는 방식이 가장 흔합니다. 이때 건축사는 "해제가 되었으니 이용허락도 소급해서 소멸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양 당사자가 합의해서 계약을 정리하는 합의해지는, 합의서에 도면 사용 여부를 따로 적어두지 않으면 나중에 분쟁이 재발하기 쉬운 유형입니다.
분쟁이 커지는 지점은 해제 사유의 정당성이 아니라 해제 이후에 도면을 계속 써도 되느냐입니다. 해제가 정당했는지와 도면 이용권이 남아 있는지는 별개의 판단 축이기 때문에, 건축사의 귀책으로 계약이 깨졌더라도 도면을 쓸 수 있는지는 다시 따로 따져야 합니다.
해제되면 도면 이용권도 소급해서 사라지나 — 대법원의 이용권 유보 법리
민법의 일반 원칙대로라면 해제는 계약을 처음부터 없던 것으로 돌리는 소급효가 있고(민법 제548조), 당사자는 서로 원상회복할 의무를 집니다. 이 원칙을 설계도면에 그대로 적용하면 건축주가 받은 이용허락도 소급해서 사라지고, 이미 올라간 건물은 허락 없이 도면을 복제해서 지은 결과가 됩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런 결론이 건축 현장에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보았습니다.
대법원 2000. 6. 13.자 99마7466 결정은 가분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진 건축설계계약이 해소된 경우에도,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일단 건축주에게 허여된 설계도서 등에 관한 이용권은 의연 건축주에게 유보된다"고 보았습니다. 이 사건에서는 설계도서가 건축주에게 교부되었고, 설계비 중 상당액이 이미 지급되었으며, 지하 공사가 끝나고 골조 공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법원은 계약이 건축주의 귀책사유로 해제되었더라도 건축사가 복제권자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이 법리는 건축도급에서 오래전부터 쓰여 온 대법원 1986. 9. 9. 선고 85다카1751 판결의 사고방식과 같은 뿌리입니다. 이 판결은 공사가 상당히 진척되어 원상회복이 사회적·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낳고 완성된 부분이 도급인에게 이익이 되는 경우, 해제의 효력을 미완성 부분에 한정하는 쪽으로 해석했습니다. 설계도면이 이미 건물 모양으로 땅 위에 올라가 있다면, 그 도면 사용 권한만 소급해서 없애는 것은 같은 이유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논리입니다.
해제로 계약은 끝나도, 이미 교부되어 상당히 시공된 설계도서의 이용권까지 자동으로 되돌려지는 것은 아니다 — 요건을 갖추면 이용권은 건축주에게 남는다.
이용권이 남기 위한 네 가지 요건 — 법원이 실제로 보는 것
법원이 이용권 유보를 인정할 때 확인하는 요소는 크게 네 가지로 정리됩니다. 어느 하나가 비어 있으면 건축주가 불리해지므로, 분쟁이 생기면 이 네 항목을 기준으로 자신의 상황을 점검해야 합니다.
설계도서의 완성·교부 — 건축사가 설계도서를 완성해 건축주에게 실제로 넘겼다는 사실. 교부 일자, 전달 방식(이메일·USB·출력본), 인수 확인 기록이 증거가 됨.
설계비의 상당 부분 지급 — 전액이 아니라 '상당 부분'. 계약서상 설계비 총액과 실제 이체내역을 대조해 지급 비율을 계산할 수 있어야 함.
공사의 상당한 진척 — 도면에 따른 공사가 기초·골조 등 의미 있는 단계까지 진행되었다는 사실. 감리 보고서, 공정표, 기성 확인서가 증거가 됨.
중단 시 중대한 손실과 완성 부분의 이익 — 공사를 멈추면 사회적·경제적 손실이 크고, 이미 지은 부분이 건축주에게 쓸모가 있다는 사정.
법원이 정해 둔 숫자 기준, 예컨대 공정률 몇 퍼센트 이상이면 이용권이 유보된다는 식의 기준선은 없습니다. 99마7466 결정에서는 지하 공사가 끝나고 골조 공사가 진행되던 단계에서 유보를 인정했고, 뒤에서 보는 2020다240304 판결에서는 공사가 약 95% 진행된 사안이었습니다. 착공 전이거나 터파기 정도만 진행된 단계라면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건물이 아직 형체가 없다면 중단에 따른 사회적·경제적 손실을 말하기 어렵고, 설계비도 대부분 지급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서 이용권이 건축사에게 되돌아갈 여지가 커집니다.
공사가 거의 끝난 뒤의 판단 — 대법원 2022. 5. 12. 선고 2020다240304 판결
이 법리를 다시 확인한 판결이 대법원 2022. 5. 12. 선고 2020다240304 판결입니다. 건축사가 건축주와 설계계약 및 시공관리계약을 맺고 설계도서를 작성해 이용을 허락했는데, 이후 계약이 파기되었습니다. 건축주는 건축사의 동의 없이 설계자와 감리자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고 기존 설계도서에 따라 공사를 마무리했고, 건축사는 저작재산권과 저작인격권 침해를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원심은 공사가 약 95% 진행된 상태였으므로 계약이 파기되었더라도 설계도서 이용권은 여전히 건축주에게 유보되어 있다고 보아 저작재산권 침해를 인정하지 않았고, 대법원도 이 결론을 유지했습니다. 건축사 교체 후 마무리 공사가 이어졌다는 사정만으로 침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건축주 입장에서는 건축사와 갈라서더라도 공사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범위에서는 기존 도면에 기대어 마무리할 수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작인격권 부분에서 대법원은 원심 판단에 다소 미흡한 점이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건축주 측이 건축사의 저작인격권을 침해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결론은 정당하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이 판결은 공사가 거의 끝난 사안이라는 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공사가 절반 정도만 진행된 상태에서 같은 결론이 나온다고 단정할 수는 없고, 이 경우에는 앞의 네 가지 요건을 사안별로 하나씩 입증해야 합니다.
이용권 유보로도 해결되지 않는 것 — 설계 변경, 다른 현장 재사용, 설계비 정산
이용권이 남는다는 말은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건축주가 보호받는 범위는 이미 허락된 용도, 즉 해당 건축물을 도면대로 완성하는 데 필요한 범위로 제한됩니다. 이 범위를 벗어나는 행위는 별도로 침해 책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다른 부지·다른 건물에 같은 도면 재사용 — 허락 범위를 벗어난 복제로 저작재산권 침해 가능성이 큼.
도면 내용을 바꿔 시공 — 저작권법 제13조의 동일성유지권 문제. 다만 같은 조 제2항 제2호는 건축물의 증축·개축 등 변형을 예외로 두므로 건축물 자체의 변경은 사안별 판단.
건축사 표시 삭제 — 성명표시권(저작권법 제12조) 문제가 될 수 있음.
설계비 미지급분 — 이용권 유보와 별개로 건축사의 보수 청구권은 남음.
특히 마지막 항목이 실무에서 자주 오해됩니다. 건축주가 이용권을 유지한다고 해서 설계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건축사는 이미 수행한 설계 업무에 대한 보수를 계약에 따라 청구할 수 있고, 계약이 건축사의 귀책 없이 끝났다면 민법 제673조와 제551조에 따라 손해배상 책임까지 건축주가 질 수 있습니다. 결국 건축주가 얻는 것은 '공사를 멈추지 않을 권한'이지, 정산 의무의 면제가 아닙니다.
이용권 유보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데도 건축주가 도면대로 공사를 이어가면, 건축사는 저작권법 제123조에 따라 침해의 정지를 청구하거나 제125조에 따라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고, 고의가 있다면 제136조 제1항에 따라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이 문제될 수 있습니다. 공사 중단 가처분이 신청되는 사례도 있어 공사 일정에 직접적인 타격이 될 수 있습니다.
분쟁에 대비한 증거와 계약 정리 — 건축주가 미리 챙길 것
이용권 유보는 결국 사실관계 입증의 문제입니다. 계약이 흔들리기 시작한 시점부터 다음 자료를 확보해 두면 분쟁 단계에서 큰 차이를 만듭니다. 먼저 설계도서가 언제 어떤 형태로 교부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이메일, 전송 기록, 인수증을 정리해야 합니다. 구두로 전달받았거나 건축사 사무실에서 열람만 한 경우에는 '교부' 요건을 다투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설계비 지급 기록입니다. 계약서의 대금 지급 조항, 실제 이체내역, 세금계산서를 맞춰 보고 총액 대비 지급 비율을 계산해 둡니다. 세 번째는 공사 진행 정도를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감리자의 공정 보고서, 시공사의 기성 청구서, 공사 현장 사진이 여기에 해당하고, 가능하면 해제 통지 전후의 상태를 날짜와 함께 기록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계약서의 이용허락 조항과 해제 조항을 점검합니다. "계약 종료 시 도면 사용을 중지한다" 같은 특약이 있으면 법원이 이용권 유보를 인정하기 어려워질 수 있고, 반대로 "계약이 종료되어도 기 지급분에 상응하는 도면은 건축주가 계속 사용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면 건축주에게 유리합니다. 해제를 통지할 때는 내용증명처럼 일자와 내용이 남는 방식을 쓰고, 통지문에 도면의 이용 범위와 정산 방법을 함께 정리해 두면 이후 협상에서 기준점이 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건축사가 설계계약을 해제하면 바로 도면을 쓸 수 없게 되나요?
A. 해제 통지만으로 이용권이 자동 소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면 교부, 설계비 상당 부분 지급, 공사 상당 진척, 중단 시 중대한 손실이라는 요건을 갖추면 대법원 99마7466 결정에 따라 이용권이 건축주에게 유보됩니다. 다만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건축사가 사용 중지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Q. 공사가 몇 퍼센트 이상 진행돼야 도면을 계속 쓸 수 있나요?
A. 법원이 정한 고정된 비율은 없습니다. 지하 공사가 끝나고 골조 공사가 진행 중이던 사안(99마7466)과 공사가 약 95% 진행된 사안(2020다240304)에서 이용권 유보가 인정되었을 뿐입니다. 착공 전이거나 초기 단계라면 인정되기 어렵고, 설계비 지급 비율과 함께 종합해서 판단됩니다.
Q. 설계비를 일부만 냈는데도 도면을 계속 쓸 수 있나요?
A. 요건은 전액 지급이 아니라 '상당 부분' 지급입니다. 다만 이용권이 유보된다고 해서 미지급 설계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며, 건축사는 남은 보수와 귀책에 따른 손해배상을 별도로 청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용권 문제와 설계비 정산은 따로 준비해야 합니다.
Q. 건축사를 바꿔서 같은 도면으로 공사를 마무리해도 침해가 아닌가요?
A. 대법원 2020다240304 판결에서는 건축주가 설계자와 감리자를 바꿔 약 95% 진행된 공사를 마무리한 행위가 저작재산권 침해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다만 이는 이용권이 유보되는 요건을 갖춘 사안이었으므로, 공사가 초기라면 같은 결론이 나온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Q. 그 도면을 다른 땅에 짓는 건물에 다시 써도 되나요?
A. 안 됩니다. 유보되는 이용권은 이미 허락된 건축물을 완성하는 범위로 한정되므로, 다른 부지의 다른 건물에 같은 설계를 쓰면 허락 범위를 벗어난 복제가 되어 저작권법 제123조, 제125조의 책임이 문제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건축사의 새로운 이용허락이 필요합니다.
Q. 건축사의 귀책으로 계약이 깨졌다면 도면 문제는 어떻게 되나요?
A. 건축사의 귀책이 있으면 건축주는 민법 제551조에 따라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고, 99마7466 결정은 건축주의 귀책사유로 계약이 해제된 경우에도 건축사가 복제권을 되찾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다만 이용권 유보 요건은 귀책 여부와 별개로 따져야 하므로 교부, 지급, 진척 자료를 함께 준비해야 합니다.
맺음말
건축설계계약이 깨졌다고 해서 건축주가 도면을 곧바로 쓸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도면을 계속 써도 된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설계도서가 교부되었는지, 설계비가 상당 부분 지급되었는지, 공사가 의미 있는 단계까지 진행되었는지, 그리고 중단 시 손실이 큰지가 이용권 유보를 가르는 기준입니다. 여기에 설계비 정산, 설계 변경, 다른 현장 재사용처럼 이용권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쟁점이 따로 남습니다.
설계자와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면 감정적으로 계약을 정리하기 전에 계약서의 이용허락 조항, 설계비 지급 현황, 공정 진행 자료부터 정리하시길 권합니다. 광교나 수지 일대에서 신축·증축 공사를 진행하다 설계자와 분쟁이 생긴 경우에도 같은 기준이 적용되므로, 해제 통지를 보내기 전에 한 번 점검해 보시길 권합니다.
조력이 필요하시면 강대현 대표변호사에게 연락주십시오. 신속히 도와드리겠습니다.
의뢰인을 위한 최선의 전략을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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