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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 대여 민사책임과 손해배상 청구 기각 사례 

유수빈 변호사

청구기각

통장을 빌려준 사람은 가해자인가, 또 다른 피해자인가

계좌 명의인에게 청구된 수천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 기각까지

형사와 민사의 경계에 선 사건, 검사 출신 변호사가 직접 겪은 이야기

"저는 그냥 아는 사람이 잠깐 써도 되냐고 해서 빌려줬을 뿐인데, 어떻게 제가 사기꾼이 됩니까?"

그가 내 앞에서 처음 꺼낸 말이었다.

손에는 수천만 원을 배상하라는 소장이 들려 있었다.

억울함보다 먼저 보인 것은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서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20년 넘게 한 분야에서 일해 온 A씨였다.

법정에 서 본 적도, 소장을 받아 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아는 사람이 잠깐 통장을 빌려달라고 했고, A씨는 빌려줬다.

그 계좌는 온라인 쇼핑몰 투자 사기의 피해금이 거쳐 가는 통로로 쓰였다.

피해자는 A씨를 포함한 계좌 명의인들을 상대로, 사기를 도운 책임이 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A씨 입장에서는 자신도 속아서 계좌를 내준 것이었다.

그런데 소장 안에서 그는 가해자로 적혀 있었다.

같은 행위가 두 개의 절차에서 다르게 다뤄진다

나는 A씨에게 먼저 이 사건의 구조부터 설명했다.

"통장을 빌려준 일 하나로 두 갈래의 책임이 따라옵니다.

하나는 형사입니다. 접근매체를 넘긴 행위 자체를 처벌하는 법이 있고, 여기서는 그 계좌가 무엇에 쓰였는지와 상관없이 넘긴 것만으로 문제가 됩니다.

다른 하나는 지금 받으신 민사입니다. 여기서는 질문이 다릅니다.

'그 계좌가 사기에 쓰일 것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배상 책임이 갈립니다."

A씨가 가장 혼란스러워한 지점이 여기였다.

법을 어겼다는 것과 피해액 전부를 물어내야 한다는 것이 자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민법은 불법행위를 도운 사람도 함께 책임지도록 하고 있고, 여기에는 과실로 도운 경우도 포함된다.

다만 과실로 도왔다고 하려면, 그 행위가 사기 피해로 이어질 것을 예견할 수 있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행위와 피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검사로 일하던 시절, 나는 계좌 명의인이 피의자로 올라오는 사건을 적지 않게 보았다.

그중에는 조직과 연결된 사람도 있었고, 정말로 속아서 계좌를 내준 사람도 있었다.

같은 죄명 아래 있어도 두 사람은 같지 않다. 그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이 사건의 전부였다.

다섯 갈래로 나누어 확인했다

법원은 계좌 명의인에게 예견가능성이 있었는지를 판단할 때 여러 사정을 종합한다.

나는 그 사정들을 항목으로 나누어 하나씩 확인했다.

첫째, 계좌를 넘기게 된 경위와 목적이다.

A씨는 사기 조직과 공모한 사실이 없었고, 이 사건과 관련해 형사처벌을 받지도 않았다.

둘째, 대가나 이익을 얻었는지다.

계좌를 넘긴 대가로 돈을 받거나 이익을 취득한 정황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 부분은 예견가능성 판단에서 특히 비중이 크다. 대가가 오갔다면 무언가 이상하다는 점을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셋째, 계좌를 받아 간 사람과의 관계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알고 지내던 사람의 부탁이었다는 점, 그 사람이 A씨를 속여 계좌를 받아 갔다는 점을 정리했다.

넷째, 계좌 제공이 피해 발생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다.

원고는 A씨의 계좌를 보고 속은 것이 아니었다. 이미 다른 경로로 기망당한 상태에서 송금이 이루어졌고, 그 계좌는 돈이 거쳐 간 통로였다.

다섯째, 계좌를 넘긴 뒤의 사정이다.

A씨가 계좌 사용 상황을 알면서 방치했다고 볼 만한 자료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이 다섯 가지를 자료와 함께 정리해 제출했다.

법원은 청구를 기각했다

법원은 A씨에 대한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계좌를 넘긴 사실은 인정되지만, 그 행위 당시 그 계좌가 사기 범행에 쓰일 것을 예견할 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취지였다.

다만 오해가 없도록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이 결과는 통장을 빌려주는 행위가 괜찮다는 뜻이 아니다.

민사 책임을 면했다는 것이지, 계좌를 넘긴 행위 자체가 문제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다.

같은 사안이라도 대가를 받았거나, 여러 개의 계좌를 넘겼거나, 상대방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넘긴 경우라면 판단은 달라진다.

실제로 이런 사건에서 계좌 명의인의 책임이 인정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A씨의 사건은 여러 사정이 겹쳐 책임이 인정되지 않은 경우로 읽는 것이 정확하다.

계좌 명의인으로 소장이나 조사 통보를 받았다면, 이것부터 확인하라

① 형사와 민사를 나누어 파악하라.

형사 절차와 손해배상 청구는 각각 따로 진행되고 판단 기준도 다르다.

어느 쪽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부터 정리해야 한다.

② 계좌를 넘기게 된 경위를 시간 순서로 정리하라.

누가, 언제, 어떤 말로 요청했는지가 핵심이다.

그 사람과 주고받은 메시지와 통화 기록을 지우지 말고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③ 대가를 받았는지 정확히 확인하라.

소액이라도 대가가 오갔다면 판단이 크게 달라진다.

받은 것이 있다면 숨기지 말고 처음부터 밝히는 편이 낫다.

④ 지금이라도 계좌를 정리하라.

이미 넘긴 계좌를 그대로 두거나 추가로 넘기면 상황이 훨씬 무거워진다.

거래 정지나 지급정지 여부도 함께 확인해야 한다.

⑤ 소장을 받았다면 답변 기간을 놓치지 마라.

기간 안에 답변서를 내지 않으면 상대방 주장대로 판결이 날 수 있다.

억울하다는 생각에 그냥 두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⑥ 앞으로 어떤 이유로도 통장을 빌려주지 마라.

사정이 딱해 보여도, 오래 알던 사이여도 마찬가지다.

빌려주는 순간 형사와 민사 양쪽의 절차가 시작될 수 있다.

속은 사람과 도운 사람 사이

이런 사건에서 계좌 명의인은 종종 두 자리 사이에 서게 된다.

자신도 속아서 계좌를 내준 사람인데, 절차 안에서는 피해를 키운 쪽으로 불린다.

그 간극이 억울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기억해야 한다.

이 사건의 진짜 피해자는 투자 사기로 돈을 잃은 사람이다.

그 사람이 계좌 명의인을 상대로 소송을 낸 것도, 정작 돈을 가져간 사람은 찾을 수 없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A씨가 책임을 면한 것은 다행이지만, 그 피해가 누구에게도 회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남는다.

통장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거절하는 것. 그것이 두 사람 모두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계좌 문제로 소장이나 조사 통보를 받았다면, 혼자 판단하지 말고 경위부터 정리해 상담받아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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