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현장에서 굴삭기나 크레인을 직접 사서 쓰는 대신, 기사가 딸린 채로 건설기계를 통째로 빌려 쓰는 방식은 이제 관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가 작업 중 실수로 다른 근로자를 다치게 하면, 근로복지공단은 재해근로자에게 먼저 보험급여를 지급한 뒤 그 기사와 장비업체를 상대로 구상금을 청구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대법원이 이 구상권의 판단 기준을 바꾸면서, 상당수의 사건에서 공단이 장비업체에 구상금을 받아내지 못하는 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왜 이런 변화가 생겼는지, 어떤 경우에 장비업체가 책임을 면하고 어떤 경우에는 여전히 책임을 지는지 짚어보겠습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산재보험법 제87조의 구상권 — 근로복지공단이 장비업체에 소송을 거는 이유
사업장에서 업무상 재해가 발생하면 근로복지공단이 먼저 재해근로자에게 요양급여·휴업급여·장해급여 등 보험급여를 지급합니다. 그런데 그 재해가 재해근로자 소속 사업주 자신의 과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위로 발생한 경우, 공단은 이미 지급한 급여액 한도에서 재해근로자가 그 사람에게 가질 손해배상청구권을 대신 행사할 수 있습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87조 제1항은 "공단은 제3자의 행위에 따른 재해로 보험급여를 지급한 경우에는 그 급여액의 한도 안에서 급여를 받은 사람의 제3자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대위한다"고 정해 이 구상권의 근거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건설현장에서는 이 조항이 특히 자주 문제됩니다. 원수급인이 자기 근로자에게 직접 건설기계를 운전시키지 않고, 장비업체로부터 기사가 딸린 굴삭기·크레인을 통째로 임차해 투입하는 방식이 널리 쓰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장비업체 소속 기사, 또는 개인사업자 형태로 등록된 지입기사가 작업 중 실수로 다른 근로자를 다치게 하면, 공단은 그 사고를 "제3자의 행위로 인한 재해"로 보아 장비업체나 기사 개인을 상대로 구상금을 청구해 왔습니다. 다만 같은 조 제1항 단서는 "보험가입자인 둘 이상의 사업주가 같은 장소에서 하나의 사업을 분할하여 각각 행하다가 그 중 사업주를 달리하는 근로자의 행위로 재해가 발생하면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정해, 애초부터 같은 사업을 나누어 하는 관계에는 구상권을 제한해 왔습니다. 문제는 기사 딸린 건설기계 임대처럼 이 단서에 문언 그대로 들어맞지 않는 사례를 어떻게 볼 것인가였습니다.
산재보험법 제87조 제1항은 재해근로자를 두텁게 보호하되 최종 책임은 실제 가해자인 '제3자'에게 돌리려는 조항이다 — 관건은 기사 딸린 건설기계 임대업체가 이 '제3자'에 해당하는지다.
'제3자'인지가 왜 애매한가 — 계약은 별도지만 지휘는 원수급인이 하는 구조
기사 딸린 굴삭기·크레인 임대는 법적 성격이 애매한 지점에 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원수급인(또는 하수급인)과 장비업체 사이에 임대차계약이나 도급계약이 체결될 뿐, 장비업체 소속 기사가 원수급인의 근로자로 새로 고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 실제 현장에서는 원수급인의 현장소장이나 작업반장이 그날그날 작업 구간과 순서를 지시하고, 기사는 그 지시에 따라 토공·양중 작업을 수행합니다. 계약 형식은 임대차·도급이지만, 실제 작업은 원수급인의 지휘·명령 아래 이루어지는 셈입니다.
이런 구조에서 사고가 나면 판단 방식은 두 갈래로 나뉠 수 있습니다. 계약관계를 기준으로 "장비업체는 원수급인과 별도의 사업주이니 제3자다"라고 보는 방식과, 작업 실질을 기준으로 "같은 현장에서 원수급인 지휘 아래 함께 일한 이상 제3자로 보기 어렵다"고 보는 방식입니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장비업체가 수억 원대 구상금을 떠안을 수도, 벗어날 수도 있어 실무상 파장이 컸습니다.
계약 형식 — 원수급인(또는 하수급인)과 장비업체는 임대차·도급계약의 별개 당사자로, 고용관계가 없음.
작업 실질 — 현장소장의 작업지시에 따라 기사가 배치되고, 다른 근로자와 같은 공정·같은 위험에 노출됨.
종래 판단 — 가해자가 재해근로자와 같은 산재보험관계에 있는지를 기준으로 제3자 여부를 가림.
문제점 — 같은 위험을 공유하며 일했더라도 보험관계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구상 대상이 되는 결과가 생김.
판례 변경 전 기준 — '보험관계'로 제3자를 가리던 방식의 한계
종전 대법원은 가해자가 재해근로자와 같은 산재보험관계에 편입되어 있는지를 기준으로 제3자 여부를 가려 왔습니다. 건설업에서는 원수급인이 사업주로 의제되어 하수급인 근로자까지 포함한 산재보험료를 납부하는 특례가 있는데, 가해자가 이 보험관계 안에 있으면 구상 대상에서 빠지고, 밖에 있으면 제3자로 취급되어 구상 대상이 되는 식이었습니다. 이 기준 아래서는 기사 딸린 건설기계 임대업체나 지입기사는 원수급인의 보험관계 밖에 있는 경우가 많아, 실제로는 같은 현장에서 같은 위험을 나누며 일했더라도 구상금 청구의 상대방이 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 기준의 형평성 문제는 뚜렷했습니다. 만약 원수급인이 자기 근로자를 직접 고용해 굴삭기를 운전시켰다면 동일 사업 내부의 사고로 취급되어 구상 대상이 되지 않았을 텐데, 똑같은 작업을 형식만 임대차로 바꿔 외부 장비업체에 맡겼다는 이유만으로 구상 대상이 되는 결과가 생긴 것입니다. 계약 형식을 조금만 바꿔도 결론이 달라지는 이 불합리는 학계와 실무 양쪽에서 꾸준히 지적되어 왔습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기준을 '위험공동체'로 바꾸다
대법원 2026. 1. 22. 선고 2022다214040 전원합의체 판결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내놓았습니다. 이 사건은 2017년 상주영천고속도로 건설현장에서 장비임대업체 소속 지게차 운전기사가 철근을 운반하던 중 철근 묶음이 하도급업체 근로자에게 떨어져 중상을 입힌 사고였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은 재해근로자에게 약 6억 원의 보험급여를 지급한 뒤, 지게차 기사와 장비업체를 상대로 그 금액의 구상을 청구했습니다.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종전의 '보험관계' 기준을 폐기하고, "재해근로자와 가해자가 동일한 사업주의 지휘·명령 아래 그 사업주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업무상 재해에 관한 공동의 위험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지"를 새로운 판단기준으로 제시했습니다. 특히 대법원은 가해자가 재해근로자의 사업주와 직접 고용계약을 맺은 근로자가 아니더라도, 같은 사업주의 지휘·명령 아래 그 사업주의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재해가 발생했다면 위험을 공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결국 지게차 기사와 장비업체는 하도급업체의 지휘·명령 아래 다른 근로자들과 같은 공정에서 위험을 공유했으므로 제3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해, 공단의 구상 청구를 받아들인 원심을 파기했습니다.
산재보험법 제87조 제1항의 '제3자' 여부는 이제 누가 어느 보험관계에 속해 있는지가 아니라, 재해근로자와 가해자가 같은 사업주의 지휘·명령 아래 같은 위험을 나누며 일했는지로 판단한다.
왜 장비업체는 구상 못 받는가 — 위험공동체가 인정되는 구체적 요건
이 새로운 기준이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뒤이은 사건에서 더 분명해졌습니다. 2018년 부산 해운대구 복합시설 철거공사 현장에서는 개인사업자 신분으로 등록된 굴삭기 기사가 작업 중 튀어나온 철근으로 같은 현장의 다른 업체 소속 근로자를 다치게 했습니다. 공단은 재해근로자에게 약 7,800만 원의 보험급여를 지급한 뒤 그 기사를 상대로 구상금을 청구했으나, 2026년 5월 대법원은 같은 위험공동체 법리를 적용해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기사가 개인사업자 형태로 등록되어 원수급인과 직접적인 고용관계가 없었다는 사정만으로는 위험공동체 성립을 막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두 판결을 종합하면 위험공동체가 인정되는 데는 몇 가지 공통된 요소가 있습니다.
지휘·명령의 동일성 — 기사가 원수급인(또는 하수급인)의 작업지시·안전관리계획에 따라 배치·투입되었는지.
공정·공간의 공유 — 재해근로자와 같은 공정, 같은 구간에서 동시에 작업했는지.
고용관계는 불필요 — 기사가 장비업체 소속이든 개인사업자(지입)이든 상관없이 지휘·명령 관계만 있으면 인정.
위험의 종류 — 굴삭·양중 작업 자체가 내포한 전도·낙하물 등의 위험을 현장 근로자들이 함께 부담하고 있었는지.
그래도 구상되는 경우 — 위험공동체가 인정되지 않는 예외
새 기준이 장비업체에 일률적인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위험공동체가 인정되려면 어디까지나 같은 사업주의 지휘·명령 아래 같은 현장에서 함께 위험을 부담했다는 사정이 구체적 사실관계로 확인되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여전히 제3자성이 인정되어 구상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발주자를 위한 별개의 공사현장에서, 우연히 인접해 있다가 사고가 난 경우(지휘·명령 계통이 아예 다름).
장비업체가 원수급인의 작업지시 없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작업을 수행하다가 사고를 낸 경우.
재해근로자가 그 굴삭기·크레인 작업과 무관한 공정에서 우연히 지나가다 다친 경우처럼 같은 위험을 공유했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
원수급인이나 하수급인의 사업과 무관한 통행인·인근 주민 등이 낀 경우.
따라서 장비업체가 구상 책임을 면하려면 단순히 "우리는 임대업체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실제로 그 현장에서 원수급인의 지휘 아래 다른 근로자들과 같은 위험을 공유하며 작업했다는 사정을 구체적 자료로 입증해야 합니다.
장비업체·원수급인의 실무 대응과 근로자의 손해배상청구권
실무적으로 장비업체는 계약서에 작업지시 계통을 명시하고, 현장 안전관리계획서·작업일보·투입계획서 등에 자신의 기사가 원수급인(또는 하수급인)의 지휘 아래 배치되어 작업했다는 사실이 남도록 관리해 두는 것이 유리합니다. 사고가 나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구상금 청구를 받았을 때, 이런 자료가 있어야 위험공동체 항변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원수급인이나 하수급인 입장에서도 지휘·명령 계통을 명확히 정리해 두는 것이 향후 책임 소재를 가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만 이 법리 변경이 재해를 입은 근로자 개인의 권리까지 없애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공단이 장비업체를 상대로 대위행사할 수 없게 됐다는 것과, 재해근로자 본인이 이미 지급받은 보험급여를 넘는 손해에 대해 가해자를 상대로 직접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다만 재해근로자 본인이 청구하는 경우에도 결국 같은 위험공동체 법리가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이 높아, 위험공동체가 인정되는 상대방에게는 근로자 본인의 청구 역시 제한될 여지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사안마다 구체적 사실관계를 따져봐야 하는 영역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기사 딸린 굴삭기를 임차해서 쓰다가 사고가 나면 무조건 장비업체가 구상 책임을 면하나요?
A. 아닙니다. 재해근로자와 장비업체(또는 기사)가 같은 사업주의 지휘·명령 아래 같은 현장에서 위험을 공유했다고 인정될 때만 제3자성이 부정됩니다. 지휘 계통이 다르거나 별개 공사현장인 경우에는 여전히 구상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Q. 지입기사처럼 개인사업자로 등록된 경우도 이 법리가 적용되나요?
A. 네. 대법원은 가해자가 재해근로자의 사업주와 고용계약을 맺은 근로자가 아니더라도 같은 사업주의 지휘·명령 아래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재해가 발생했다면 위험을 공유한 것으로 봅니다. 개인사업자 형태의 지입기사에게 실제로 이 법리가 적용되어 구상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례가 있습니다.
Q. 근로복지공단이 이미 제기해 둔 구상금 소송은 어떻게 되나요?
A. 새 기준이 적용되면 원수급인 지휘 아래 위험을 공유한 것으로 인정되는 사안은 공단 패소로 결론 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소송이 이미 확정된 경우라면 재심 사유가 없는 한 그 결론을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Q. 장비업체는 평소 어떤 자료를 준비해 둬야 하나요?
A. 작업지시서, 현장 안전관리계획서, 투입·배치 기록처럼 원수급인의 지휘·명령 아래 배치되어 작업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남겨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자료가 있어야 위험공동체 항변을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있습니다.
Q. 공단이 구상하지 못하면 다친 근로자는 손해를 어떻게 보전받나요?
A. 재해근로자는 산재보험 급여로 요양·휴업·장해 등 기본적인 보상을 받은 상태이므로 그 부분은 이미 보전됩니다. 급여를 초과하는 손해가 남아 있다면 가해자를 상대로 직접 민사상 청구를 검토할 수 있으나, 이때도 위험공동체 관계가 인정되는 상대방에게는 청구가 제한될 여지가 있습니다.
Q. 원수급인 소속 근로자가 사고를 낸 경우에도 같은 법리가 적용되나요?
A. 원수급인 소속 근로자가 사고를 낸 경우는 애초에 산재보험법 제87조 제1항 단서나 동일 사업 내부 사고 법리로 처음부터 구상 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 판례 변경은 그보다 형식적으로 별개 사업주인 장비업체·지입기사까지 그 보호 범위를 넓힌 데 의미가 있습니다.
맺음말
기사 딸린 굴삭기·크레인 임대에서 사고가 났을 때 근로복지공단이 장비업체에 구상금을 청구할 수 있는지는 더 이상 계약 형식만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대법원이 '보험관계' 기준을 버리고 '위험공동체' 기준을 세운 이상, 관건은 그 기사가 실제로 누구의 지휘·명령 아래, 어떤 위험을 다른 근로자들과 나누며 일했는지에 있습니다.
장비업체 입장에서는 이 변화가 방어수단이 될 수 있지만 저절로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장 배치·작업지시 관계를 뒷받침할 자료를 평소에 갖춰 두어야 실제 소송에서 위험공동체 항변이 힘을 받습니다. 원수급인이나 하수급인 입장에서도 지휘·명령 계통을 명확히 해 두는 것이 향후 책임 소재를 가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건설기계 임대가 활발한 수원·경기남부 지역 현장에서도 이런 구상금 분쟁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만큼, 사고 발생 시점부터 지휘·명령 관계와 현장 자료를 정리해 두는 쪽이 유리합니다.
의뢰인을 위한 최선의 전략을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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