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관계에서 서로 채권·채무를 주고받다 보면, 상대방에게 받을 돈이 있으니 내가 갚아야 할 돈과 상계로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듭니다. 그런데 내가 받을 채권, 즉 자동채권에 동시이행항변권이 붙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판례는 이런 채권으로는 원칙적으로 상계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보면서도, 일정한 조건을 갖추면 예외적으로 상계를 인정합니다. 원칙이 왜 그렇게 엄격한지, 어떤 경우에 예외가 열리는지를 짚어보겠습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상계란 무엇인가 — 자동채권·수동채권과 대등액 소멸의 구조
상계는 서로 같은 종류의 채무를 부담하고 있는 당사자 쌍방이 그 채무를 대등액에서 소멸시키는 제도입니다. 민법 제492조 제1항은 쌍방이 서로 같은 종류를 목적으로 한 채무를 부담하고 그 이행기가 모두 도래한 때에는 각 채무자가 대등액에 관하여 상계할 수 있다고 정하면서도, 단서에서 채무의 성질이 상계를 허용하지 않을 때에는 상계할 수 없다고 못박습니다. 이때 상계를 주장하는 사람이 상대방에 대해 가진 채권을 자동채권, 반대로 상대방이 자신에 대해 가진 채권, 즉 자신이 갚아야 할 채무를 수동채권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A가 B에게 물품대금채권 1천만원을 갖고 있고 B도 A에게 대여금채권 700만원을 갖고 있다면, A 입장에서는 물품대금채권이 자동채권, 대여금채무가 수동채권이 됩니다.
상계는 상대방에 대한 의사표시로 하며, 민법 제493조 제1항에 따라 조건이나 기한을 붙일 수 없는 일방적 단독행위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제2항인데, 상계의 의사표시가 있으면 각 채무는 실제 상계 통지가 도달한 시점이 아니라 '상계할 수 있는 때', 즉 쌍방 채무의 이행기가 모두 도래해 상계적상에 이른 시점으로 소급하여 대등액이 소멸한 것으로 봅니다. 이 소급효 때문에 상계는 한쪽의 의사표시만으로 상대방의 채권·채무 관계를 과거로 되돌려 정리해버리는 강력한 효과를 가집니다. 문제는 그 자동채권에 상대방이 원래 행사할 수 있었던 항변권, 특히 동시이행항변권이 붙어 있을 때 이 소급효가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입니다.
상계는 자동채권과 수동채권이 상계적상에 이른 시점으로 소급하여 대등액을 소멸시키는 단독행위다 — 이 소급효가 항변권 붙은 채권의 상계를 원칙적으로 막는 이유의 출발점이다.
동시이행항변권 붙은 자동채권으로 상계할 수 없는 원칙적 이유
대법원은 동시이행항변권의 대항을 받는 채권, 즉 항변권이 붙어 있는 채권을 자동채권으로 하여 상대방의 채권과 상계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대법원 2014. 4. 30. 선고 2010다11323 판결은 이 법리를 재확인하면서, 항변권이 부착된 채권을 자동채권으로 삼아 상계를 허용하면 상계자 일방의 의사표시만으로 상대방이 가지고 있던 항변권 행사의 기회를 상실시키는 결과가 되므로 그 성질상 상계가 허용될 수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이는 민법 제492조 제1항 단서가 정한 '채무의 성질이 상계를 허용하지 아니할 때'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이해됩니다.
이 원칙이 왜 필요한지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분명해집니다. 매매계약에서 매도인의 소유권이전등기의무와 매수인의 대금지급의무는 민법 제536조에 따라 동시이행관계에 있어, 매도인은 매수인이 등기를 넘겨받을 때까지 대금 지급을 거절할 수 있는 항변권을 가집니다. 그런데 매수인이 매도인에 대해 별도로 가진 손해배상채권 등을 자동채권으로 삼아 이 대금채권과 상계해버리면, 매도인은 원래 '등기를 넘겨줄 때까지는 대금을 안 내도 된다'는 항변권을 행사해볼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상계적상 시점으로 소급해 대금채권이 사라지는 결과를 맞습니다. 상계라는 일방적 의사표시 하나로 상대방의 방어수단을 무력화시키는 셈이어서, 판례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동시이행항변권이 붙은 채권을 자동채권으로 하는 상계를 허용하면 상계자 일방의 의사표시로 상대방의 항변권 행사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가 되므로, 그러한 상계는 성질상 허용되지 않는다.
반대로 수동채권에 항변권이 붙어 있으면 상계가 가능한 이유
주의할 점은 이 원칙이 자동채권에 항변권이 붙은 경우에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상계를 주장하는 사람 자신이 상대방에게 갚아야 할 채무, 즉 수동채권에 동시이행항변권이 붙어 있는 경우라면 상계가 가능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항변권은 그 채무자 본인의 이익을 위해 인정되는 권리이므로, 채무자 스스로 그 항변권의 이익을 포기하고 채무를 소멸시키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누구의 이익도 침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방어수단을 자기 의사로 내려놓는 것과, 상대방의 방어수단을 상대방 의사와 무관하게 빼앗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앞서 든 사례를 뒤집어, 매도인이 매수인에 대해 가진 손해배상채권을 자동채권으로 삼고 매도인 자신이 매수인에게 부담하는 대금반환채무, 즉 매도인 쪽에 동시이행항변권이 붙어 있는 채무를 수동채권으로 상계하는 경우라면 매도인 스스로 자신의 항변권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므로 상계가 인정됩니다. 실무에서 상계 항변을 검토할 때 항변권이 자동채권과 수동채권 중 어느 쪽에 붙어 있는지부터 먼저 구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동채권(내가 상대방에게 주장하는 채권)에 항변권이 붙은 경우 — 원칙적으로 상계 불가.
수동채권(내가 상대방에게 갚아야 할 채무)에 항변권이 붙은 경우 — 상계 가능(스스로 항변권 포기).
구분 기준 — '상계하겠다'고 의사표시하는 사람 입장에서 어느 쪽 채권에 항변권이 붙어 있는지를 본다.
예외가 인정되는 경우 — 서로 현실적으로 이행할 필요가 없는 관계
그런데 대법원은 자동채권에 동시이행항변권이 붙어 있다는 사정만으로 언제나 상계를 막는 것은 아니라고도 판시했습니다. 대법원 2006. 7. 28. 선고 2004다54633 판결은, 상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자동채권과 수동채권이 동시이행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서로 현실적으로 이행하여야 할 필요가 없는 경우라면 상계로 인한 불이익이 발생할 우려가 없고, 오히려 상계를 허용하는 것이 동시이행관계에 있는 채권·채무 관계를 간명하게 해소할 수 있으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상계가 허용된다고 밝혔습니다. 상계제도 자체가 서로 대립하는 채권·채무를 간이한 방법으로 결제해 채권·채무 관계를 원활하고 공평하게 처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든 것입니다.
이 예외가 성립하는 핵심은 '현실적으로 이행할 필요가 없는 경우'라는 문구입니다. 동시이행항변권이 원래 보호하려는 것은 상대방이 이행을 다 하기 전까지 나도 이행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이익인데, 자동채권과 수동채권이 애초에 동종의 금전채권이어서 어차피 서로 주고받아야 할 돈을 정산하는 관계에 불과하다면 상계로 정산해버려도 상대방이 잃는 실익이 없습니다. 오히려 상계를 막고 각자 따로 이행하라고 하면 같은 액수의 돈이 두 번 오가는 불필요한 절차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원칙으로 돌아가 상계를 막을 이유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자동채권과 수동채권이 동시이행관계에 있더라도 서로 현실적으로 이행할 필요가 없는 경우라면, 상계로 인한 불이익이 없고 오히려 채권·채무 관계를 간명히 해소할 수 있으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상계가 허용된다.
예외가 실제로 적용된 사례 — 계약 해제 후 서로 반환할 금전채무
이 예외 법리가 실제로 적용된 사건을 보면 감이 잡힙니다. 위 2004다54633 판결의 사안은 계약이 해제되면서 당사자 쌍방이 민법 제548조에 따른 원상회복의무를 부담하게 된 경우였습니다. 계약이 해제되면 각 당사자는 상대방에게 원상회복 의무를 지고, 이 원상회복의무는 제549조에 의해 제536조가 준용되어 동시이행관계에 놓입니다. 원심은 피고가 상계를 주장한 채권에 동시이행항변권이 부착되어 있다는 이유만을 들어 상계 항변을 배척했지만, 대법원은 이를 '동시이행관계나 상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것이라며 파기환송했습니다.
이처럼 계약 해제로 서로 돈을 반환해야 하는 관계, 도급계약에서 공사대금채무와 하자보수를 갈음하는 손해배상채무처럼 양쪽 모두 금전채무로 귀결되는 관계, 임대차 종료 후 보증금반환채무와 정산 관련 금전채무 등은 동시이행관계에 있더라도 결국 서로 돈을 주고받는 문제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법원이 자동채권에 항변권이 붙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계 항변을 기계적으로 배척해서는 안 되고, 그 채무들이 실제로 현실이행을 필요로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심리해야 합니다. 반대로 한쪽은 금전채무이고 다른 쪽은 물건의 인도나 등기이전처럼 비금전적 이행이 필요한 경우라면, 여전히 원칙으로 돌아가 상계가 막힐 가능성이 큽니다.
상계 항변을 다툴 때 실무에서 확인해야 할 것들
소송에서 상계 항변이 문제 되면, 먼저 상계를 주장하는 자동채권에 애초에 항변권이 붙어 있는지, 붙어 있다면 그것이 자동채권 쪽인지 수동채권 쪽인지를 가려야 합니다. 항변권이 자동채권에 붙어 있다면 다음 단계로 그 자동채권과 수동채권이 서로 현실적으로 이행할 필요가 없는 관계인지, 즉 동종의 금전채무로서 정산의 문제에 그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 어떤 계약관계에서 발생한 채무를 근거로 상계를 주장하는지 준비서면에 구체적으로 특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가지 더 살펴볼 지점은 애초에 그 동시이행항변권 자체가 아직 살아있는지입니다. 위 2010다11323 판결은, 동시이행관계에 있는 채무를 부담하는 당사자 중 일방이 과거에 이행을 제공해 상대방을 수령지체에 빠뜨린 적이 있다는 사정만으로는 상대방의 동시이행항변권이 소멸하지 않는다고 판시했습니다. 이행 제공을 한 번 했다가 중단하면 항변권은 되살아난다는 뜻이므로, 상계를 주장하려는 쪽에서는 상대방이 실제로 이행 제공을 계속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이미 중단되어 항변권이 다시 살아난 상태였는지를 사실관계로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동채권에 항변권이 붙어 있는지, 붙어 있다면 자동채권 쪽인지 수동채권 쪽인지 먼저 구분.
자동채권 쪽이라면 두 채무가 동종의 금전채무로서 현실이행이 불필요한 관계인지 확인.
상대방의 항변권이 이행 제공 중단 등으로 이미 소멸했는지도 별도로 검토.
상계 의사표시는 조건·기한을 붙일 수 없고 소급효가 있으므로 이행기가 도래한 시점을 특정.
예외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면 — 상계 외의 대응 방법
자동채권에 동시이행항변권이 붙어 있고, 그 채무가 물건 인도나 등기이전처럼 현실이행이 필요한 성격이어서 예외 요건도 충족하지 못한다면 그 채권만으로는 상계로 상대방 채무를 소멸시킬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상계 대신 별도의 소를 제기해 그 채권 자체를 청구하거나, 상대방이 먼저 이행을 제공하도록 요구하는 방식으로 접근을 바꿔야 합니다. 무리하게 상계 항변만 고집하다가는 법원이 '항변권 부착'이라는 사유만으로 항변 자체를 배척할 수 있으므로, 소송 전략을 상계 하나에만 의존하지 않는 것이 안전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청구 구조를 바꿔 그 채권을 수동채권으로 삼는 쪽으로 상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지도 검토해볼 만합니다. 다만 이는 당사자들이 서로 어떤 채권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그 채권들이 어떤 계약관계에서 발생했는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므로 개별 사안마다 채권의 발생 원인과 이행관계를 하나하나 따져보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동시이행항변권이 걸린 상계는 원칙과 예외의 경계가 촘촘한 만큼, 상계 주장을 준비하는 단계에서부터 각 채권의 성격을 정확히 짚어두는 것이 분쟁을 줄이는 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자동채권과 수동채권은 어떻게 구분하나요?
A. 상계를 주장하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가진 채권이 자동채권이고, 그 사람이 상대방에게 갚아야 할 채무, 즉 상대방이 가진 채권이 수동채권입니다. 어느 쪽에 항변권이 붙어 있는지에 따라 상계 허용 여부가 달라지므로 이 구분이 가장 먼저입니다.
Q. 동시이행항변권이 붙은 채권으로는 절대 상계할 수 없나요?
A. 자동채권에 붙어 있다면 원칙적으로 상계할 수 없지만, 그 채권과 수동채권이 동종의 금전채무여서 서로 현실적으로 이행할 필요가 없는 관계라면 예외적으로 상계가 허용됩니다. 반대로 수동채권에 항변권이 붙어 있다면 애초에 원칙 자체가 적용되지 않아 상계가 가능합니다.
Q. 계약 해제 후 서로 돈을 주고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상계가 막히나요?
A. 계약 해제로 발생한 원상회복의무는 동시이행관계에 있지만, 반환할 것이 모두 금전이라면 판례상 예외 요건에 해당해 상계가 허용될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한쪽이 물건 반환처럼 비금전적 의무라면 원칙으로 돌아가 상계가 제한될 수 있습니다.
Q. 상대방이 예전에 이행 제공을 한 적이 있다면 항변권이 없어지나요?
A. 과거 한 번 이행을 제공해 상대방을 수령지체에 빠뜨린 사실만으로는 동시이행항변권이 소멸하지 않습니다. 이행 제공이 계속되지 않는 한 항변권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이 판례의 입장입니다.
Q. 상계 항변이 법원에서 배척되면 그 채권 자체가 없어지나요?
A. 아닙니다. 상계 항변이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그 채권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별도의 소송이나 다른 절차로 그 채권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상계로 정리하려던 방법이 막힌 것일 뿐 채권 자체가 소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Q. 상계 의사표시는 아무 때나 할 수 있나요?
A. 상계는 조건이나 기한을 붙일 수 없는 단독 의사표시이고, 그 효과는 실제 통지 시점이 아니라 쌍방 채무가 상계적상에 이른 때로 소급합니다. 따라서 상계를 주장하려면 자동채권과 수동채권의 이행기가 모두 도래한 시점을 먼저 확정해야 합니다.
맺음말
동시이행항변권이 붙은 자동채권으로는 원칙적으로 상계할 수 없습니다. 상계자 일방의 의사표시만으로 상대방의 항변권 행사 기회를 빼앗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동채권과 수동채권이 동시이행관계에 있더라도 서로 현실적으로 이행할 필요가 없는, 전형적으로 동종의 금전채무 관계라면 예외적으로 상계가 허용됩니다. 결국 핵심은 항변권이 자동채권과 수동채권 중 어느 쪽에 붙어 있는지, 그리고 그 채무들이 실제로 현물 이행을 요구하는 관계인지 아니면 정산에 불과한 관계인지를 구분하는 데 있습니다.
실제 분쟁에서는 채권이 발생한 계약관계와 이행 경과를 세밀하게 따져야 원칙과 예외 중 어느 쪽에 해당하는지 판가름 나므로, 수원지법에서 다투는 대여금·공사대금·계약 관련 상계 분쟁일수록 초기에 자동채권과 수동채권의 구조부터 정리해두는 것이 유리합니다.
의뢰인을 위한 최선의 전략을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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