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배상 소송에서 가해자 측이 가장 먼저 꺼내는 방어 논리는 흔히 '피해자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과실상계 주장입니다. 그런데 법원이 배상액을 줄이는 근거가 과실상계 하나뿐인 것은 아닙니다. 피해자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손해가 발생하거나 커지는 데 기여한 다른 사정이 있다면 법원이 별도의 법리로 배상액 자체를 제한하는 경우가 실무에서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이 글에서는 과실상계와는 뿌리는 같지만 요건이 다른 이 '책임제한' 법리가 무엇을 근거로 인정되고, 어떤 유형에서 어디까지 적용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손해배상 책임제한, 과실상계와는 다른 법원의 배상액 조정 근거
손해배상 사건에서 법원이 배상액을 줄이는 가장 흔한 근거는 과실상계입니다. 민법 제396조는 "채무불이행에 관하여 채권자에게 과실이 있는 때에는 법원은 손해배상의 책임 및 그 금액을 정함에 이를 참작하여야 한다"고 정하고, 이 규정은 민법 제763조에 의해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에도 그대로 준용됩니다. 과실상계가 적용되려면 손해의 발생이나 확대에 피해자 측의 '귀책사유 있는 과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 요건입니다. 교통사고에서 피해자가 무단횡단을 했다거나, 계약 상대방이 손해 확대를 막을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경우가 전형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대법원은 이와 별개로, 피해자 측에 그러한 귀책사유가 전혀 없는 경우에도 손해배상제도가 추구하는 손해분담의 공평이라는 이념에 비추어 배상액을 제한할 수 있다는 법리를 오랫동안 확립해왔습니다. 실무에서는 이를 '책임제한'이라 부르는데, 과실상계 규정을 유추적용하는 방식으로 운용됩니다. 과실상계는 피해자의 잘못을 전제로 하지만, 책임제한은 잘못이 아니라 손해의 발생이나 확대에 기여한 객관적 사정, 예컨대 체질적 소인이나 치료의 위험도, 이례적인 자연적·인위적 요인 등을 근거로 삼습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에게 아무 과실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배상액이 전액 인정될 것이라 오해하기 쉽습니다.
과실상계는 피해자의 과실을 전제로 하지만, 책임제한은 피해자에게 귀책사유가 없어도 손해분담의 공평이라는 이념만으로 인정될 수 있는 별도의 법리다.
책임제한 법리의 근거 — 대법원 2011다28939 판결이 세운 기준
책임제한 법리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의료과실 사건입니다. 대법원 2015. 11. 27. 선고 2011다28939 판결은, 의사가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아 환자의 신체기능이 회복불가능하게 손상된 사건에서, "손해의 발생이나 확대에 피해자 측의 귀책사유가 없는데도 공평의 원칙상 피해자의 체질적 소인이나 질병과 수술 등 치료의 위험도 등을 고려하여 의사의 손해배상책임을 제한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명시했습니다. 환자가 특이체질이었거나 기존에 지병이 있었다는 사정은 환자의 잘못이라 할 수 없지만, 그런 사정이 손해의 발생·확대에 실제로 기여했다면 가해자에게 손해 전부를 배상시키는 것이 오히려 공평하지 않다고 본 것입니다.
이 판결이 세운 기준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책임제한이 인정되려면 피해자 측에 귀책사유가 있을 필요는 없지만 손해의 발생이나 확대에 실제로 기여한 사정이 존재해야 합니다. 둘째, 그 사정은 체질적 소인·기왕증처럼 피해자 개인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치료행위 자체가 갖는 통상적 위험도처럼 사안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법리는 의료과실에서 출발했지만 이후 판례를 통해 일반 불법행위와 계약책임 사건 전반으로 확장 적용되고 있습니다.
법원이 책임제한을 인정하는 대표적 유형들
실무에서 책임제한이 문제되는 유형은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의료사고처럼 신체적 특성이 관련된 사건뿐 아니라, 손해의 발생·확대 과정에 여러 원인이 겹치는 사건 전반에서 이 법리가 등장합니다. 공통점은 피해자의 잘못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손해라는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인과 과정에 가해자의 행위 외에 다른 사정이 개입했다는 점을 근거로 배상 범위를 조정한다는 것입니다.
체질적 소인·기왕증 — 환자의 특이체질이나 기존 질환이 손해 확대에 기여한 의료과실 사건.
손해 확대에 기여한 객관적 사정 — 통상 예견하기 어려운 자연적·환경적 요인이 손해 규모를 키운 경우.
다수 가해자 중 일부만 귀책 있는 경우 — 대법원 2016. 4. 12. 선고 2013다31137 판결은 불법행위자 중 일부에게 피해자 부주의를 이용한 사정이 있다고 해도, 그런 사정이 없는 다른 불법행위자까지 과실상계 주장을 할 수 없다고 볼 것은 아니라고 판시했습니다.
고의 불법행위라도 영득행위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 — 같은 판결은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라도 책임제한을 인정해도 가해자가 불법이익을 최종 보유하는 결과가 생기지 않는다면 과실상계와 공평의 원칙에 기한 책임제한이 가능하다고 봤습니다.
책임제한은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 손해에 이르는 인과 과정에 가해자의 행위 외 다른 사정이 개입했다는 점을 근거로 배상 범위를 조정하는 법리다.
법원의 재량은 어디까지 존중되나 — 사실심 전권사항의 한계
책임제한 비율을 정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사실을 심리하는 법원, 즉 1심과 항소심의 재량 사항으로 다뤄집니다. 대법원 1996. 10. 25. 선고 96다30113 판결 등이 확립한 바에 따르면, 배상의무자가 피해자의 과실이나 책임제한 사유를 별도로 주장하지 않았더라도 소송에 제출된 자료에서 그러한 사정이 드러난다면 법원이 이를 직권으로 심리·판단해야 합니다. 당사자가 명시적으로 다투지 않아도 법원 스스로 배상액 조정 여부를 살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만 사실심의 재량이라고 해서 무제한으로 존중되는 것은 아닙니다. 판례는 일관되게 "형평의 원칙에 비추어 현저히 불합리하다고 인정되지 않는 한" 사실심의 판단이 유지된다는 단서를 붙입니다. 실제로 앞서 본 2011다28939 판결에서도 대법원은, 원심이 손해 확대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고 볼 수 없는 사정까지 감액 사유로 참작해 책임비율을 정한 것은 형평의 원칙에 비추어 현저히 불합리하다며 그 부분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돌려보냈습니다. 즉 상고심에서 다툴 수 있는 지점은, 원심이 참작한 사정이 손해의 발생·확대와 실제로 관련이 있는지, 그리고 그 감액 폭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인지에 있습니다.
고의 불법행위에도 책임제한이 적용될까 — 인정 범위의 경계
책임제한 논의에서 자주 나오는 오해 중 하나는, 가해자가 고의로 불법행위를 저지른 경우에는 책임제한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원칙적으로는 맞습니다. 피해자의 부주의를 이용해 고의로 재산을 취득하는 이른바 영득행위형 불법행위에서, 가해자 스스로가 바로 그 피해자의 부주의를 이유로 자신의 책임을 줄여달라고 주장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를 허용하면 가해자가 불법행위로 얻은 이익을 최종적으로 그대로 보유하는 결과가 되어 공평의 이념이나 신의칙에 정면으로 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서 본 2013다31137 판결은 이 원칙에 예외가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라 하더라도, 책임제한을 인정한 결과가 가해자의 부당한 이익 보유로 이어지지 않는 유형이라면 과실상계와 공평의 원칙에 기한 책임제한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고의 여부 자체가 책임제한의 가부를 자동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제한을 인정했을 때 가해자가 부당하게 이득을 보유하게 되는지가 실질적인 판단 기준이 됩니다.
책임제한을 다투는 실무 —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증 전략
가해자, 즉 배상의무자 입장에서 책임제한을 주장하려면 막연히 "피해자 측 사정도 있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손해의 발생이나 확대에 실제로 기여한 구체적 사정을 증거로 뒷받침해야 합니다. 의료과실 사건이라면 진료기록과 감정촉탁을 통해 체질적 소인이나 치료 위험도를 입증하고, 일반 불법행위 사건이라면 손해 확대에 개입한 별도의 원인을 사고 경위 자료나 관련 증거로 소명하는 방식입니다. 법원이 직권으로 심리할 의무가 있다고 해서 당사자가 자료를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대로 피해자, 즉 배상권리자 입장에서는 두 가지 방향으로 방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가해자가 내세우는 사정이 애초에 손해의 발생·확대와 관련성이 낮다는 점을 반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련성이 있더라도 그 사정을 근거로 한 감액 폭 자체가 지나치게 크다는 점을 다투는 것입니다. 전문가 의견이나 통계 자료로 인과관계의 정도를 낮춰 보이거나, 유사 사건의 감액 비율과 비교해 형평에 어긋난다는 점을 부각하는 방식이 실무에서 활용됩니다.
책임제한 비율은 어떻게 정해지나 — 감액 정도를 다투는 방법
책임제한 비율 자체는 법률에 계산식이 정해져 있지 않고, 사실심이 여러 사정을 종합해 재량으로 정합니다. 손해 발생·확대에 대한 기여도, 그 사정이 얼마나 이례적이거나 통상적인지, 가해자의 주의의무 위반 정도와의 상대적 비중 등이 함께 고려됩니다. 같은 유형의 사건이라도 구체적 사실관계에 따라 감액 비율이 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비율에 이의가 있다면 단순히 "너무 많이 깎였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상급심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렵습니다. 원심이 감액 사유로 삼은 사정이 실제로 손해와 관련성이 있는지, 그 사정을 근거로 한 감액 폭이 형평의 원칙에 비추어 현저히 불합리한 수준인지를 구체적 사실관계에 근거해 논증해야 합니다. 항소심에서 다투려면 원심이 참작한 사정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뒷받침하거나 반박하는 자료를 새롭게 제출하는 것이 유리하고, 상고심 단계라면 원심의 판단이 경험칙이나 형평에 반한다는 점을 법리적으로 구성해야 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과실상계와 책임제한은 어떻게 다른가요?
A. 과실상계는 손해의 발생·확대에 피해자 측의 귀책사유 있는 과실이 있을 때 적용되고, 책임제한은 피해자에게 그런 과실이 전혀 없어도 손해분담의 공평이라는 이념에 따라 배상액을 줄이는 별도의 법리입니다. 둘 다 민법 제396조와 제763조를 근거로 하지만 요건이 다릅니다.
Q. 피해자가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배상액이 줄어들 수 있나요?
A. 가능합니다. 대법원은 체질적 소인이나 기왕증처럼 피해자에게 귀책사유가 없는 사정이라도 손해의 발생·확대에 기여했다면 공평의 원칙상 배상액을 제한할 수 있다고 판단해왔습니다. 다만 그 사정이 실제로 손해와 관련성이 있어야 합니다.
Q. 의료사고가 아닌 사건에서도 책임제한이 적용되나요?
A. 네, 책임제한 법리는 의료과실 사건에서 확립됐지만 일반 불법행위나 계약책임 사건에도 폭넓게 적용됩니다. 손해의 발생이나 확대에 기여한 객관적 사정이 있다면 사안 유형과 무관하게 법원이 이를 참작할 수 있습니다.
Q. 고의로 저지른 불법행위에도 책임제한이 인정되나요?
A. 원칙적으로 가해자가 피해자의 부주의를 이용해 재산을 취득하는 고의적 영득행위에는 책임제한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런 영득의 결과가 생기지 않는 유형의 고의 불법행위라면 대법원은 책임제한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바 있습니다.
Q. 법원이 정한 감액 비율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나요?
A. 책임제한 비율을 정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사실심의 재량이지만, 형평의 원칙에 비추어 현저히 불합리하다고 인정되면 상급심에서 다툴 수 있습니다. 실제로 대법원이 원심의 과도한 책임제한을 파기환송한 사례도 있습니다.
Q. 책임제한을 다투려면 어떤 자료를 준비해야 하나요?
A. 가해자 측이라면 손해의 발생·확대에 기여한 사정을 뒷받침하는 진료기록이나 감정 결과 등 구체적 증거가 필요하고, 피해자 측이라면 그 사정과 손해 사이의 관련성이 낮다는 점이나 감액 비율이 과도하다는 점을 뒷받침할 자료를 준비해야 합니다.
맺음말
책임제한은 과실상계와 뿌리는 같지만 요건이 다른 별도의 법리로, 피해자에게 아무 잘못이 없어도 배상액이 줄어들 수 있다는 점에서 소송을 준비하는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쟁점입니다. 가해자 입장에서는 손해의 발생·확대에 기여한 사정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입증하느냐가, 피해자 입장에서는 그 사정의 관련성과 감액 폭의 적정성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반박하느냐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결국 책임제한이 인정되는지, 인정된다면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는 법조문 하나로 결론이 나는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 사실관계에 대한 입증과 논증의 싸움입니다. 소를 제기하거나 방어하는 단계에서부터 이 쟁점을 염두에 두고 자료를 준비하는 쪽이 유리한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손해배상 소송은 사안마다 책임제한의 인정 여부와 비율이 크게 갈리는 분야인 만큼, 수원지법에서 진행되는 손해배상 소송을 앞두고 있다면 초기 단계부터 쟁점을 정리해보시길 권합니다.
의뢰인을 위한 최선의 전략을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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