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주고받기로 합의서에 도장을 찍은 뒤에야 그 합의가 잘못된 전제 위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이 착오를 이유로 그 합의, 즉 화해계약 자체를 없던 일로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민법은 화해계약에 대해서만 착오취소를 원칙적으로 막아 놓았습니다. 문제는 이 제한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합의서에서 서로 양보하며 실제로 다투었던 사항 자체의 착오라면 뒤집을 수 없지만, 그 다툼의 전제가 된 사항의 착오라면 취소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는 화해계약의 착오취소가 왜 원칙적으로 제한되는지, 어떤 착오라야 예외적으로 취소가 인정되는지, 법원이 실제 사건에서 이 둘을 어떻게 구별하는지를 정리합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화해계약이란 무엇인가 — 창설적 효력의 의미
민법 제731조는 화해를 "당사자가 서로 양보하여 당사자간의 분쟁을 종지할 것을 약정함으로써 그 효력이 생긴다"고 정의합니다. 돈을 얼마 주고받을지, 책임이 누구에게 얼마나 있는지를 두고 다투다가 서로 한 발씩 물러나 합의서에 서명하면, 그 순간부터는 화해계약이라는 새로운 계약관계가 만들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화해가 단순히 그동안의 다툼을 요약해 둔 문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된 법률행위라는 것입니다.
민법 제732조는 이 화해계약에 창설적 효력을 부여합니다. 당사자 일방이 양보한 권리는 소멸하고, 상대방은 화해로 인해 새로운 권리를 취득합니다. 대법원도 화해계약이 성립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종전의 법률관계가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다시 따지지 않고, 화해계약 자체가 정한 내용대로 새로운 법률관계가 생긴다고 판시해 왔습니다(대법원 1989. 9. 12. 선고 88다카10050 판결). 화해 이전에 누구 책임이 더 컸는지, 실제 손해액이 얼마였는지는 화해가 일단 성립한 뒤에는 원칙적으로 다시 문제 삼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창설적 효력이 착오취소 제한과 바로 연결됩니다. 만약 화해를 하고 난 뒤 "사실은 내 과실이 아니었는데", "실제로는 손해가 더 컸는데"라는 이유로 언제든 착오취소를 인정해 준다면, 애써 분쟁을 끝낸 화해계약은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민법은 화해계약에 대해서만 착오취소를 특별히 제한하는 조문을 별도로 두고 있습니다.
화해계약은 서로 양보해 새로운 법률관계를 만드는 계약이라, 성립 후에는 종전 사실관계가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다시 따지지 않는 창설적 효력을 가진다.
원칙은 착오취소 불가 — 민법 제733조의 특별 제한
착오로 인한 의사표시는 원칙적으로 취소할 수 있다는 것이 민법 제109조의 일반 법리입니다. 그러나 민법 제733조는 "화해계약은 착오를 이유로 하여 취소하지 못한다"고 정해, 화해계약에는 이 일반 법리를 그대로 적용하지 않습니다. 계약 종류를 통틀어 착오취소가 이렇게 정면으로 제한되는 예는 흔치 않습니다.
이유는 화해계약의 목적 자체에 있습니다. 화해는 애초에 "누구 말이 맞는지"를 확정하기 어려운 다툼을, 서로 한발씩 물러나 끝내자는 계약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실은 내가 옳았다"는 취지의 착오를 인정해 취소를 폭넓게 허용하면, 서로 양보해 분쟁을 끝낸다는 화해 제도의 취지 자체가 무너집니다. 합의 당시엔 받아들였다가 뒤늦게 마음이 바뀌어 취소를 주장하는 사태를 막기 위한 정책적 조문인 셈입니다.
다만 민법 제733조 단서는 이 제한에 두 가지 예외를 둡니다. 화해당사자의 자격에 관한 착오와 화해의 목적인 분쟁 이외의 사항에 관한 착오입니다. 이 두 예외에 해당하지 않는 한, 아무리 억울하게 느껴지는 합의라도 착오만으로는 뒤집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화해계약 취소 여부를 다투는 사건은 거의 전부 이 두 예외 중 하나에 해당하는지를 놓고 다툽니다.
예외 하나 — 화해당사자의 자격에 관한 착오
첫 번째 예외는 화해당사자의 자격에 관한 착오입니다. 여기서 자격이란 누구와 화해를 하는지, 즉 상대방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어떤 지위에서 화해에 나섰는지에 관한 착오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실제 채무자가 아닌 사람을 채무자로 착각하고 그 사람과 합의를 했다거나, 대리권이 없는 사람을 정당한 대리인으로 잘못 알고 그와 화해를 진행한 경우가 여기 해당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착오는 분쟁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애초에 화해의 상대방을 잘못 짚었다는 점에서, 화해로 분쟁을 끝내려 한 당사자의 의도 자체가 온전히 성립했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로 취급됩니다.
실무에서는 이 예외가 문제되는 사례가 상대적으로 드뭅니다. 화해계약 착오취소를 둘러싼 분쟁의 대다수는 두 번째 예외, 즉 화해의 목적인 분쟁 이외의 사항에 관한 착오를 놓고 벌어집니다.
예외 둘 — 화해의 목적인 분쟁 이외의 사항, 전제·기초사실의 의미
두 번째 예외인 화해의 목적인 분쟁 이외의 사항이 실무에서 가장 자주 다뤄집니다. 대법원은 이를 "분쟁의 대상이 아니라 분쟁의 전제 또는 기초가 된 사항으로서, 쌍방 당사자가 예정한 것이어서 상호 양보의 내용으로 되지 않고 다툼이 없는 사실로 양해된 사항"이라고 풀이합니다. 즉 당사자들이 서로 양보하며 실제로 다툰 지점이 아니라, 양쪽이 당연한 전제로 깔고 화해에 들어간 사실이 여기 해당합니다.
대법원 1992. 7. 14. 선고 91다47208 판결이 대표적입니다. 교통사고 피해자 측이 "사고가 오로지 피해자 본인의 과실로 발생했다"고 자인하고 가해자 측과 합의금을 정해 합의한 사안에서, 법원은 사고 원인이 누구의 과실이었는지는 그 합의에서 실제로 다툰 대상이 아니라 합의의 전제로 깔고 들어간 사실에 해당한다고 보았습니다. 피해자 측이 실제로는 가해자에게도 과실이 있었는데 이를 모른 채 전부 자신의 과실로 착각하고 합의했다면, 그 착오를 이유로 화해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는 것이 이 판결의 결론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합의금 액수"나 "책임 비율"처럼 당사자들이 실제로 밀고 당기며 정한 내용이 아니라, 그 밀고 당기기의 바탕이 된 사실관계가 잘못됐는지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고 원인, 채무의 존재 여부를 다투지 않고 당연시했던 전제사실, 목적물의 동일성처럼 양쪽이 다투지 않고 그냥 전제로 삼은 사항이 실제와 다르다면, 그 화해계약은 착오를 이유로 취소될 여지가 생깁니다.
착오취소가 가능한 것은 다툰 대상이 아니라, 양쪽이 다투지 않고 당연한 전제로 깔고 화해에 들어간 사실이 틀렸을 때다.
다투던 사항 자체의 착오는 왜 못 뒤집나
반대로 당사자들이 실제로 다투었던 사항 자체에 관한 착오는 예외에 해당하지 않아 취소가 인정되지 않습니다. 대법원 1989. 9. 12. 선고 88다카10050 판결은 화해계약의 의사표시에 착오가 있더라도 그것이 당사자의 자격이나 분쟁 이외의 사항에 관한 것이 아니라 "분쟁의 대상인 법률관계 자체"에 관한 것이라면 취소할 수 없다고 명시했습니다.
이 판결은 동업자금을 둘러싼 다툼에서 나온 것입니다. 누가 얼마를 부담해야 하는지, 정산금이 얼마인지를 놓고 서로 양보해 합의금을 정했다면, 그 금액이나 책임범위 자체가 이후에 잘못 계산된 것으로 밝혀졌다 해도 그 사정만으로는 취소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 금액·책임범위가 바로 당사자들이 화해에서 서로 양보하며 다툰 본체이기 때문입니다. 다투었던 내용이 나중에 다시 계산해 보니 자신에게 불리했다는 사정만으로 취소를 허용하면, 사실상 모든 화해계약이 사후적으로 뒤집힐 수 있어 화해 제도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예를 들어 손해배상액을 두고 300만원과 800만원 사이에서 밀고 당기다가 500만원으로 합의했는데, 나중에 실제 손해가 700만원이었다는 자료가 나왔다고 해도 이는 취소 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손해액 자체가 화해에서 서로 양보하며 다툰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애초에 손해가 발생한 원인이나 책임 소재처럼 당사자들이 다투지 않고 당연한 전제로 깔았던 사실이 잘못됐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다툰 사항 — 합의금 액수, 책임(과실)비율, 정산금 규모처럼 협상 테이블에서 실제로 주고받은 조건. 착오취소 불가.
전제사항 — 사고 발생 원인, 채무의 존재 여부, 목적물의 동일성처럼 다투지 않고 당연시한 기초사실. 착오취소 가능.
법원이 구별하는 기준 — 분쟁의 대상인가, 전제일 뿐인가
실제 사건에서는 어떤 사항이 "다툰 대상"이고 어떤 사항이 "전제"였는지가 한눈에 갈리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법원은 이를 가리기 위해 합의에 이르기까지의 교섭 경위 전체를 살핍니다.
합의서·조정조서·문자메시지 등에 그 사항이 협상 쟁점으로 명시적으로 언급됐는지.
당사자 쌍방이 그 사항을 다툼 없는 사실로 전제하고 협상을 시작했는지, 아니면 협상 과정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주고받았는지.
그 사항이 바뀌면 합의금액·조건 자체가 통째로 달라질 만큼 화해의 근간을 이루는지.
착오를 주장하는 쪽이 착오 사실을 알게 된 시점과 화해 성립 시점의 선후관계.
예컨대 사고 경위나 과실 비율을 두고 양측이 서로 다른 주장을 문서로 주고받으며 밀고 당긴 끝에 특정 비율로 합의했다면, 그 과실비율은 다툰 대상으로 취급되어 취소가 어렵습니다. 반대로 애초 협상 테이블에 오르지도 않고 "당연히 그런 줄 알고" 넘어간 전제사실이 나중에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면 취소 가능성이 열립니다. 결국 핵심은 협상 과정에서 그 사항을 두고 실제로 밀고 당기는 교섭이 있었는지입니다.
재판상 화해·조정조서·소취하합의에도 같은 법리가 적용된다
화해의 착오취소 제한은 민법상 화해계약뿐 아니라 소송 도중 이뤄지는 소취하합의나 조정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대법원 2020. 10. 15. 선고 2020다227523, 227530 판결은 소취하합의가 민법상 화해계약에 해당하는 경우, 착오를 이유로 취소하려면 마찬가지로 민법 제733조가 정한 요건, 즉 당사자의 자격 또는 분쟁 이외의 사항에 관한 착오여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했습니다.
소송이 진행되던 중 "이 정도면 됐다"며 상대방과 소를 취하하기로 합의하거나, 조정기일에 조정조서에 서명하는 경우도 실질은 서로 양보해 분쟁을 끝내는 것이므로 화해계약의 실질을 가집니다. 다만 위 판결은 소취하합의가 화해계약에 이르지 않는, 단순한 소송상 절차 합의에 그치는 경우라면 일반 착오취소 법리(민법 제109조)가 적용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밝혔습니다. 즉 그 합의가 서로 양보해 실체적 권리관계를 정리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소송 절차만 정리한 것인지에 따라 적용되는 법리 자체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송 중 합의서나 조정조서에 서명하기 전에는, 그 합의가 실체적 권리관계까지 확정하는 화해계약인지 절차상의 합의에 그치는지를 먼저 구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화해계약의 실질을 가진다면 서명 이후 착오취소로 되돌리기가 훨씬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취소를 다투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 실무 유의점
화해계약을 착오취소하려는 쪽은 그 착오가 "분쟁 이외의 사항", 즉 전제·기초사실에 관한 것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해야 합니다. 단순히 "몰랐다", "손해였다"는 주장만으로는 부족하고, 협상 경위를 보여주는 자료가 필요합니다.
합의 전후로 주고받은 문자·이메일·녹취 등 협상 쟁점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
그 사항이 협상 테이블에 오르지 않고 당연한 전제로 취급됐음을 보여주는 정황.
착오의 대상이 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경위와 시점을 뒷받침하는 자료.
착오가 없었다면 애초에 그런 조건으로 합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정황.
취소가 인정되면 화해계약의 창설적 효력이 사라지고, 원래의 분쟁관계로 돌아가 다시 다툴 수 있게 됩니다. 다만 취소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화해계약은 그대로 유효하게 남아 이미 양보한 권리를 되찾을 방법이 없어지므로, 착오취소를 주장하기 전에 그 착오가 정말 다투지 않은 전제사항에 해당하는지를 신중히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합의서를 작성하는 단계에서 다툼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히 기록해 두면, 이후 분쟁이 생겼을 때 어느 쪽으로든 판단의 근거가 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이미 서명한 합의서, 착오를 이유로 무조건 취소할 수 없나요?
A. 원칙적으로는 취소할 수 없습니다. 민법 제733조가 화해계약의 착오취소를 특별히 제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화해당사자의 자격에 관한 착오이거나, 서로 다투지 않고 전제로 삼았던 사항에 관한 착오라면 예외적으로 취소가 가능합니다.
Q. 합의금 액수가 실제 손해보다 훨씬 적었다는 사실만으로 취소할 수 있나요?
A. 그것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손해액이나 책임범위처럼 당사자가 서로 양보하며 실제로 다툰 내용 자체는 취소 예외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손해가 발생한 원인처럼 다투지 않고 전제로 삼았던 사실이 따로 잘못됐다면 별도로 취소를 검토할 수 있습니다.
Q. 교통사고 합의 후 몰랐던 과실비율이 드러났다면 취소가 가능한가요?
A. 사고 원인이나 과실 유무를 협상 과정에서 실제로 다투지 않고 일방의 과실로만 전제하고 합의했다면, 그 전제사실의 착오를 이유로 취소를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대법원도 유사한 사안에서 착오취소를 인정한 사례가 있습니다. 다만 협상 과정에서 과실비율 자체를 두고 다퉜다면 결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Q. 조정기일에 조정조서에 서명한 경우도 착오취소 제한이 적용되나요?
A. 조정조서도 실질이 서로 양보해 분쟁을 끝내는 화해계약이라면 민법 제733조가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다만 절차만 정리한 합의에 그친다면 일반 착오취소 법리가 적용될 여지도 있어, 그 합의의 실질이 무엇인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Q. 착오취소가 인정되면 어떻게 되나요?
A. 화해계약이 취소되면 창설적 효력이 사라져 화해 이전의 원래 분쟁관계로 돌아갑니다. 다투던 내용을 처음부터 다시 다퉈야 하므로, 취소가 실익이 있는지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Q. 취소를 주장하려면 어떤 자료를 준비해야 하나요?
A. 협상 과정에서 그 사항이 실제 쟁점으로 다뤄졌는지, 아니면 다투지 않은 전제로 취급됐는지를 보여주는 자료가 핵심입니다. 합의 전후 주고받은 문자·이메일, 협상 경위를 정리한 메모 등이 도움이 됩니다.
맺음말
화해계약은 서로 양보해 분쟁을 끝내는 계약이라, 성립한 뒤에는 착오를 이유로 쉽게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 원칙입니다. 다만 그 착오가 실제로 다툰 사항 자체가 아니라, 다투지 않고 전제로 삼았던 사실에 관한 것이라면 예외적으로 취소를 시도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이 둘을 가르는 기준은 협상 과정에서 그 사항을 두고 실제로 밀고 당겼는지 여부입니다.
합의서에 서명하기 전 다툼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서명한 뒤 착오를 다투는 것보다 훨씬 수월한 길입니다. 특히 수원지방법원을 비롯해 경기남부 지역에서 소송이나 조정 절차를 진행 중이시라면, 합의서나 조정조서에 서명하기 전에 다투는 사항과 전제사항을 구분해 검토해 보시길 권합니다.
의뢰인을 위한 최선의 전략을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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