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쇼핑몰이나 헬스장, 렌터카 계약서 말미에는 흔히 "회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습니다. 사업자가 미리 만들어 둔 이 약관 조항 때문에 정작 사업자의 고의적인 잘못이나 중대한 실수로 손해를 입고도 배상을 포기하는 소비자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은 사업자, 그 이행보조자나 피용자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한 책임까지 면제하는 조항을 원천적으로 무효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조항이 무효라는 사실만으로 소비자가 자동으로 배상을 받는 것은 아니고, 그 조항이 실제로 무효 범위에 해당하는지, 사업자에게 고의·중과실이 있었는지를 입증하는 절차가 따로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이 글에서는 면책조항이 왜 통제 대상이 되는지, 법원이 이를 무효로 판단하는 기준과 실제 대응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약관법이 면책조항을 규제하는 이유 — 제6조와 제7조의 구조
약관은 사업자가 다수의 고객과 계약을 맺기 위해 미리 마련해 두는 계약조건으로, 소비자는 개별 조항을 협상할 여지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부합계약의 성격을 띱니다. 이 구조적 불균형을 그대로 두면 사업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조항, 특히 자신의 책임을 스스로 없애는 조항을 끼워 넣기 쉬워집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약관법)은 제6조 제1항에서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공정성을 잃은 약관 조항은 무효로 한다는 일반원칙을 두고, 제7조에서 특히 문제되는 유형을 구체적으로 열거해 별도로 무효로 못박고 있습니다.
제7조가 정한 무효 유형은 네 가지입니다. 1호는 사업자·이행보조자·피용자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한 법률상 책임을 배제하는 조항, 2호는 상당한 이유 없이 손해배상 범위를 제한하거나 사업자가 부담할 위험을 고객에게 이전시키는 조항, 3호는 담보책임을 배제·제한하거나 그에 따르는 고객의 권리행사 요건을 가중하는 조항, 4호는 견본이나 표시된 품질·성능에 관한 책임을 배제하는 조항입니다. 이 글이 다루는 것은 이 중 1호, 즉 고의·중과실까지 면제하는 조항입니다.
2호부터 4호까지는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예외적으로 유효할 여지를 열어두는 구조이지만, 1호에는 그런 예외 문구 자체가 없습니다. 사업자에게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있었던 경우까지 면제해주는 조항은 어떤 사정이 있어도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업자가 아무리 정교한 논리로 조항을 방어하려 해도, 손해의 원인이 고의나 중과실로 인정되는 순간 그 부분에 관한 한 조항 자체가 설 자리를 잃습니다.
약관법 제7조 1호는 사업자의 고의·중대한 과실로 인한 책임을 배제하는 조항을 예외 없이 무효로 한다 — 다른 호와 달리 "상당한 이유"라는 정당화 여지 자체가 없다.
고의·중과실까지 면제한 조항, 왜 예외 없이 무효인가
손해를 발생시킨 사람이 그 책임을 지는 것은 법질서의 기본 원리입니다. 가벼운 부주의, 즉 경과실로 인한 손해라면 계약 당사자 사이에 미리 위험을 배분해 두는 것이 어느 정도 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업자가 일부러(고의) 또는 통상 요구되는 주의를 현저히 게을리해서(중과실) 손해를 일으킨 경우까지 책임을 면제받는다면, 사업자는 아무리 부주의하게 운영해도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는 결과가 됩니다. 이는 계약을 통한 위험 배분이 아니라 사업자의 기본적인 주의의무 자체를 무력화하는 것이어서 법이 허용하지 않습니다.
실제 계약서에서 흔히 보이는 문구를 예로 들면, "회사의 고의 또는 과실 여부를 불문하고 시설 이용 중 발생한 모든 손해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문구 그대로 적용한다면 트레이너가 안전수칙을 알면서도 방치했거나 시설관리자가 명백한 결함을 알고도 고치지 않아 사고가 나도, 사업자는 이 조항을 근거로 배상을 거부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이런 포괄적 면제 문구가 약관법 제7조 1호가 겨냥하는 전형적 유형입니다.
여기서 중과실이 무엇인지도 짚어야 합니다. 중과실은 통상 요구되는 정도의 주의를 현저히 결여해,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어도 손해를 쉽게 피할 수 있었던 상태를 말합니다. 단순한 실수인 경과실과는 구별되며, 법원은 사고의 경위, 사업자가 지켜야 했던 관리·점검 기준, 손해의 예견가능성과 회피가능성 등을 종합해 개별적으로 판단합니다. 수치나 정형화된 기준이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 실무에서 다툼이 잦은 이유입니다.
판례로 보는 실제 적용 — 한국전력공사 전기공급규정 사건
대법원 1995. 12. 12. 선고 95다11244 판결은 이 법리가 실제 사건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잘 보여줍니다. 이 사건의 배경은 한국전력공사의 전기공급규정으로, 전기공작물에 고장이 발생하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을 때 한전이 부득이 전기공급을 중지하거나 사용을 제한할 수 있고, 이로 인해 수용가가 입은 손해에 대해서는 배상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대법원은 이 조항이 면책약관의 성질을 가진다고 보면서도, 그 문언 그대로 한전의 고의나 중대한 과실로 인한 경우까지 적용된다고 해석한다면 약관법 제7조 제1호에 위반되어 무효라고 판단했습니다.
다만 대법원은 이 조항 전체를 통째로 무효로 선언하지는 않았습니다. 고의·중과실이 없는 그 밖의 경우(불가항력이나 경미한 과실 등)에 한해서만 면책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한도 내에서는 그 조항이 유효하다고 본 것입니다. 이 판결은 사업자가 만든 포괄적 면책 문구라도 법원이 문언 그대로의 효력을 전부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효가 되어야 할 부분을 걸러내고 남은 정당한 범위에서만 효력을 인정하는 해석 방식을 취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면책조항의 문구가 고의·중과실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읽힌다면, 법원은 조항 전체가 아니라 그 부분만 무효로 잘라내고 나머지 범위에서 조항의 효력을 인정한다.
효력유지적 축소해석 — 조항을 통째로 버리지 않는 이유
대법원 1991. 12. 24. 선고 90다카23899 전원합의체 판결은 이런 해석 방식을 더 분명하게 보여준 사례입니다. 자동차종합보험보통약관에 있던 무면허운전 면책조항이 문제였는데, 이 조항을 문언 그대로 적용하면 보험계약자나 피보험자가 전혀 관리·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무면허운전(제3자가 몰래 차를 가져가 무면허로 운전한 경우 등)까지 면책범위에 들어가게 됩니다. 대법원은 이런 결과가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보아, 보험계약자나 피보험자가 지배 또는 관리할 수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 무면허운전에 한해서만 그 조항이 적용되는 것으로 범위를 좁혀 해석했습니다. 이를 효력유지적 축소해석이라 부릅니다.
이 해석기법이 실무에 주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사업자가 만든 조항의 문구가 지나치게 넓어 무효 판단을 받을 위험이 있더라도, 법원은 조항 자체를 없애기보다 무효인 부분만 도려내고 정당한 범위 안에서는 조항을 살려두는 쪽을 선호해 왔다는 것입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조항이 "무효"라는 판단을 받았다고 해서 계약조건 전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업자의 고의·중과실이 개입된 손해에 한해서만 그 조항의 방어력이 무너진다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실제 분쟁에서는 조항의 문구 자체보다 "이 손해가 사업자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발생한 것인가"를 입증하는 데 논의의 초점이 맞춰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항의 문언이 아무리 포괄적이어도, 결국 다툼의 승패는 그 손해가 무효 범위 안에 들어가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실무에서 자주 보이는 면책 문구와 무효 판단 기준
계약서나 이용약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면책 문구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고, 유형마다 무효로 판단될 가능성의 크기가 다릅니다.
"회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 고의·중과실을 포함하는지 문언상 배제하지 않아, 그 부분만 무효로 해석될 소지가 큰 전형적 문구.
"천재지변, 정전, 시스템 장애 등 불가항력적 사유는 물론 당사의 귀책사유로 인한 손해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 사업자의 귀책사유까지 명시적으로 면제해 무효 소지가 더 뚜렷한 문구.
"이용자는 서비스 이용으로 발생한 손해에 대해 회사에 어떠한 이의도 제기할 수 없습니다" — 손해배상청구권 자체를 사전에 포기시키는 형태.
"회원의 부주의로 인한 사고는 회사가 책임지지 않는다" — 원인을 소비자 쪽으로 한정한 문구는 고의·중과실 면제와는 성격이 달라 별도로 판단해야 함.
조항 문구에 "고의 또는 과실 여부를 불문하고"처럼 사업자의 귀책사유를 명시적으로 포함시키는 표현이 있다면 무효 판단 가능성이 더 뚜렷해집니다. 반대로 문구 자체는 모호하더라도 실제 적용 국면에서 고의·중과실이 있는 사안에 그 조항이 원용된다면 마찬가지로 무효 문제가 발생합니다. 즉 조항의 문언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조항이 실제로 적용되려는 국면까지 함께 살펴야 정확한 판단이 가능합니다.
소비자가 무효를 주장하는 방법 — 입증책임과 절차
면책조항이 무효라고 주장하려면 우선 사업자 측에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있었다는 사실을 소비자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경과실과 중과실을 가르는 경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실무에서는 사고 경위와 사업자의 통상적인 주의의무 이행 여부, 유사한 사고의 재발 여부 등 여러 정황증거를 함께 쌓아가는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계약서·약관 원문과 면책조항 문구를 그대로 확보(사업자가 이후 문구를 바꿀 수 있으므로 캡처나 출력본을 보관).
사고 경위를 뒷받침할 자료(CCTV 영상, 현장 사진, 대화 녹음, 안내문 등) 수집.
사업자의 관리·점검 이력, 내부 매뉴얼 미준수 여부 등 중과실을 뒷받침할 정황자료 확보.
동일하거나 유사한 피해 사례가 있는지 확인(반복성은 중과실 판단에서 참작될 수 있음).
개별 민사소송 외에 약관법 제19조에 따라 그 약관 조항 자체가 법에 위반되는지를 공정거래위원회에 심사청구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심사 결과 불공정약관으로 판단하면 제17조의2에 따라 사업자에게 해당 조항의 삭제·수정을 권고하거나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어, 개별 소송과 별개로 그 사업자가 사용하는 약관 자체를 바꾸는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다만 심사청구는 조항의 적법성 여부를 판단받는 절차이지 개별 손해배상을 직접 받아내는 절차는 아니므로, 실제 배상을 받으려면 별도의 민사청구가 필요합니다.
사업자 쪽 리스크 — 표준약관이라고 안전하지 않다
사업자 입장에서 흔히 하는 오해 중 하나는 "업계에서 다들 쓰는 표준 문구니까 문제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약관법 제7조는 특정 업종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업자의 약관에 적용되는 강행규정 성격을 가집니다. 설령 표준약관으로 공정거래위원회 심사를 받은 적이 있더라도, 그 약관을 실제 분쟁에서 적용하면서 고의·중과실이 있는 사안에까지 면책을 주장한다면 그 적용 부분만 무효로 판단될 수 있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제17조의2에 따라 위반 사업자에게 시정을 권고하거나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고,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그 사실이 공표되는 등 신뢰도에도 타격을 입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개별 소비자가 제기하는 손해배상청구가 별도로 병행될 수 있어, 사업자로서는 계약서를 작성할 때부터 고의·중과실 면제 문구를 아예 넣지 않거나, 적어도 "경과실에 한하여"처럼 면책 범위를 명확히 한정해 두는 것이 분쟁을 예방하는 데 유리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약관에 "어떠한 경우에도 책임지지 않는다"고 적혀 있으면 정말 손해배상을 못 받나요?
A. 그 문구가 사업자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한 손해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면 약관법 제7조 제1호에 따라 그 부분은 무효이므로, 사업자에게 고의·중과실이 있었음을 입증하면 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경과실이나 불가항력 사유로 인한 손해까지 자동으로 배상받는 것은 아닙니다.
Q. 경과실과 중과실은 어떻게 구분하나요?
A. 경과실은 통상적으로 요구되는 주의를 다소 게을리한 정도이고, 중과실은 그 주의의무를 현저히 결여해 조금만 주의했어도 손해를 피할 수 있었던 상태를 말합니다. 명확한 수치 기준은 없고 사고 경위, 사업자의 통상적 관리 수준, 유사 사고 재발 여부 등을 종합해 개별적으로 판단됩니다.
Q. 조항이 무효라는 판단을 받으면 계약 자체가 무효가 되나요?
A. 아닙니다. 무효가 되는 것은 그 면책조항 중 고의·중과실에 관한 부분에 한정되고, 나머지 계약 내용과 조항은 그대로 유효합니다. 대법원도 조항 전체를 무효로 하기보다 정당한 범위 안에서 조항을 살려두는 축소해석 방식을 취해왔습니다.
Q. 공정거래위원회에 심사청구를 하면 제 손해도 함께 배상받을 수 있나요?
A. 심사청구는 그 약관 조항이 법에 위반되는지를 판단받는 절차로, 시정권고나 시정명령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개별 손해배상을 직접 지급하도록 명하는 절차는 아닙니다. 실제 배상을 받으려면 민사소송이나 협상을 별도로 진행해야 합니다.
Q. 계약서에 서명했으니 면책조항에 동의한 것으로 봐야 하지 않나요?
A. 서명이나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약관법 제7조에 해당하는 조항은 당사자의 합의가 있었다는 사정만으로 유효해지지 않는 강행규정 위반으로 처음부터 무효입니다. 서명했다는 사실이 조항의 효력을 되살리는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Q. 개별적으로 협상한 계약에도 이 법리가 그대로 적용되나요?
A. 약관법은 사업자가 다수 고객과의 계약을 위해 일방적으로 미리 마련한 약관에 적용되는 법이므로, 당사자가 대등한 지위에서 개별적으로 협상한 계약 조항에는 원칙적으로 그대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런 경우에도 고의·중과실 면책은 민법상 신의성실 원칙 위반으로 다퉈볼 여지가 있습니다.
맺음말
"회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책임지지 않습니다"라는 문구를 보고 지레 포기하기 전에, 그 손해가 사업자의 고의나 중대한 과실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약관법 제7조 제1호는 이런 조항을 예외 없이 무효로 규정하고 있고, 대법원도 조항의 문구가 지나치게 넓다면 무효인 부분을 걸러내고 정당한 범위에서만 그 효력을 인정해왔습니다.
다만 무효를 주장하려면 결국 사업자의 고의·중과실을 뒷받침할 자료를 소비자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부담이 남습니다. 계약서와 면책조항 문구, 사고 경위를 보여주는 자료를 미리 확보해두고, 손해 규모가 크거나 사업자가 고의·중과실을 완강히 부인하는 사안이라면 공정거래위원회 심사청구와 민사소송을 함께 검토하시길 권합니다.
의뢰인을 위한 최선의 전략을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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