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수술을 마치고 회복하던 중 갑작스레 낯선 감염 진단을 받으면, 그 감염이 정확히 어디서 비롯됐는지부터 막막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수술 당시 받은 수혈이 지목되는 사례가 드물지 않은데, 정작 환자 본인은 수혈받은 혈액이 어디서 왔고 어떤 검사를 거쳤는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혈액을 채취·검사·공급하는 혈액원은 법과 판례상 일반 의료기관보다도 무거운 '고도의 주의의무'를 부담하는데, 이 의무의 구체적 내용을 모르면 정작 과실이 있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이 글에서는 수혈 감염 사고에서 혈액원과 의료기관이 각각 어떤 책임을 지는지, 그리고 피해자가 인과관계를 증명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짚어보겠습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수혈 감염 사고, 혈액원에 왜 고도의 주의의무가 있는가
혈액관리법은 혈액원의 업무 전반에 걸쳐 엄격한 절차를 요구합니다. 같은 법 제7조는 혈액원이 채혈에 앞서 헌혈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건강진단(문진)을 실시하도록 정하고 있고, 제8조는 혈액 및 혈액제제의 적격 여부를 검사해 부적격혈액이 발견되면 폐기처분한 뒤 그 결과를 보건복지부장관에게 보고하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혈액을 채혈·검사·보존·공급하는 이 일련의 업무는 성질상 고도의 전문지식을 요구할 뿐 아니라, 그 결과물이 수혈자의 생명·신체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다른 상품의 유통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래서 대법원도 이 업무를 맡은 자에게 일반적인 주의의무보다 훨씬 무거운 기준을 적용해 왔습니다.
대법원 1998. 2. 13. 선고 96다7854 판결은 혈액원의 업무를 수행하는 자는 수혈 또는 혈액제제의 제조를 위한 혈액의 순결을 보호하고 혈액 관리의 적정을 기하기 위하여 최선의 조치를 다하여야 할 고도의 주의의무가 있다고 판시했습니다. 이 판결은 그 의무의 내용을 구체적으로도 밝혔는데, 채혈 시점에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고 수준의 의학기술에 맞춰 병원균 감염 여부를 검사해 하자를 제거하고, 감염 위험군으로부터의 헌혈을 배제하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단순히 정해진 검사를 형식적으로 거쳤다는 사실만으로는 이 의무를 다했다고 보기 어렵고, 그 시점의 의학수준에서 실제로 가능했던 조치를 다 했는지가 관건입니다. 이 기준이 실제 사건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다음 항목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혈액원은 혈액의 순결을 보호하고 혈액 관리의 적정을 기하기 위하여 최선의 조치를 다하여야 할 고도의 주의의무를 진다 — 정해진 검사를 거쳤다는 사실만으로 이 의무를 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과실 판단 기준 — 법원은 무엇을 보는가
고도의 주의의무를 다했는지는 결과만 놓고 기계적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96다7854 판결은 이 주의의무 위반 여부를 가릴 때 문제된 행위 당시의 일반적인 의학 수준, 그 행위로부터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의 정도, 침해되는 법익의 중대성, 그리고 결과회피의무를 이행함으로써 희생되는 이익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즉 당시 기술로는 걸러낼 수 없었던 감염이라면 과실을 묻기 어렵지만, 당시 기술로 충분히 확인 가능했음에도 절차를 소홀히 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실제로 위 판결에서는 혈액원이 감염 위험군을 헌혈 대상에서 배제하기는커녕 헌혈 시 감염 여부 검사를 무료로 해준다고 홍보해 오히려 위험군의 헌혈을 유인한 사정, 헌혈자의 직업이나 생활관계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은 사정, 문진 항목에 감염 위험을 가리는 질문이 빠져 있던 사정 등이 과실을 인정하는 근거로 제시됐습니다. 이런 사정들은 결국 절차 자체의 설계와 운용에 흠결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검사 결과가 음성이었다는 사실만으로 자동으로 면책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시켜 줍니다.
헌혈 전 문진·신원확인 절차가 실제로 이행됐는지(혈액관리법 제7조).
검사 방법이 그 시점 의학수준에 맞는 최신 방식이었는지(감염 초기 항체 미형성 구간 등 검사 한계도 함께 고려).
부적격혈액 발견 시 폐기·보고 절차를 준수했는지(제8조).
혈액사고 발생 징후가 확인됐을 때 추가 조치를 취했는지(제8조의2).
법원은 검사를 거쳤다는 결과가 아니라, 그 시점 의학수준에서 실제로 가능했던 절차를 다했는지를 본다.
의료기관의 책임 — 설명의무 위반과 자기결정권 침해
수혈 감염 사고에서는 혈액원뿐 아니라 수혈을 실제로 시행한 의료기관도 별도의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96다7854 판결의 사안에서도 병원 소속 의료진이 수혈에 앞서 필요한 설명을 다하지 않아 환자가 수혈 여부나 어떤 혈액을 받을지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기회를 잃었다는 점이 별도의 책임 근거로 인정됐습니다. 응급 상황이 아닌 이상 수혈은 환자의 신체에 직접 개입하는 의료행위이므로, 그 필요성과 위험성을 환자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받는 절차는 생략할 수 없는 절차입니다.
설명의무 위반은 혈액원의 과실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혈액원이 아무리 검사를 철저히 했더라도, 의료진이 수혈 자체의 필요성이나 감염 가능성에 대한 일반적 위험을 설명하지 않았다면 그 부분에서 독자적인 책임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혈액원의 과실이 명확하지 않은 사안이라도, 설명의무 위반이 확인되면 그 자체로 자기결정권 침해에 따른 위자료 청구의 근거가 될 수 있어, 두 책임을 함께 검토하는 것이 실무상 유리합니다. 실제로 설명의무를 다했는지는 수술동의서나 수혈동의서에 구체적으로 어떤 위험을 설명했다는 기재가 남아 있는지, 그리고 그 서식이 형식적인 서명란에 그쳤는지가 중요한 판단 자료가 됩니다.
혈액원과 의료기관의 공동불법행위 — 책임은 어떻게 나뉘나
혈액원의 혈액관리 과실과 의료기관의 설명의무 위반이 함께 인정되는 경우, 이는 민법 제760조 제1항이 정한 공동불법행위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이 조항은 수인이 공동의 불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 연대하여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을 지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96다7854 판결도 공동불법행위가 성립하려면 각 행위자의 행위가 객관적으로 관련되어 있고, 그 행위가 각각 독립하여 불법행위의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판시했습니다.
이는 실무적으로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혈액원과 의료기관 각각에 대해 개별적인 과실 요건(혈액원은 고도의 주의의무 위반, 의료기관은 설명의무나 수혈절차상 과실)을 별도로 증명해야 하며, 어느 한쪽의 책임이 자동으로 다른 쪽에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둘째, 두 책임이 모두 인정되면 연대책임이므로 피해자는 어느 한쪽에 손해 전액을 청구할 수 있고, 이후 두 책임 주체 사이의 부담 비율은 구상 관계로 별도 정리됩니다. 소송을 준비할 때 혈액원과 의료기관을 함께 상대로 청구할지, 과실이 뚜렷한 한쪽만 상대로 할지는 각각의 증거 확보 상황에 따라 전략적으로 판단할 문제입니다.
인과관계 증명,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수혈과 감염 사이의 인과관계는 원칙적으로 피해자가 증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혈액 검사와 감염 경로 판단은 고도의 전문영역이라 환자가 직접 이를 증명하기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의료소송 실무에서는 수혈 이전에는 해당 감염이 없었다는 사실, 수혈 이후 그 감염이 발병했다는 사실, 그리고 수혈 외에 다른 감염 경로를 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원고가 증명하면, 그 감염이 수혈로 인한 것이라는 점을 사실상 추정하는 방식으로 증명의 어려움을 완화해 왔습니다.
혈액제제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면 제조물책임법 제3조의2(결함 등의 추정)도 함께 검토할 만합니다. 이 조항은 피해자가 그 제조물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에서 손해가 발생했다는 사실, 그 손해가 제조업자의 실질적 지배영역에 속한 원인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사실, 그 손해가 해당 제조물의 결함 없이는 통상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면, 제조물의 결함과 그로 인한 손해 발생을 추정하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농축적혈구·신선동결혈장처럼 혈액원이 가공·처리하는 혈액제제는 이 조항이 말하는 제조물로 다뤄질 여지가 있어, 혈액원의 불법행위책임과 별도로 검토해볼 이론적 통로가 됩니다.
다만 이런 추정 법리도 아무 자료 없이 저절로 작동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는 수혈 전후의 감염 관련 검사기록(수혈 전 항체·항원 검사 결과 등), 투여된 혈액백의 로트번호와 채혈 시기, 진료기록에 남은 수혈 경과 기록을 확보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이 자료들이 있어야 수혈 전에는 없었고 수혈 후에 생겼다는 시간적 선후관계를 구체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이런 추정이 한번 성립했다고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방인 혈액원이나 의료기관 쪽에서 수혈 외에 다른 감염 경로, 예를 들어 그 무렵 받은 다른 시술이나 별도의 감염 노출 경위를 구체적으로 증명해내면 추정은 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피해자 쪽에서도 수혈 전후 시기에 다른 감염 가능성이 있었는지 스스로 미리 점검해 두는 것이, 나중에 상대방의 반박에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특정수혈부작용 신고와 자료 확보 — 혈액관리법의 절차
혈액관리법은 수혈 부작용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한 별도의 신고 절차도 두고 있습니다. 제10조는 특정수혈부작용이 발생한 경우 그 사실을 확인한 의료기관의 장이 보건복지부장관에게 신고하도록 정하고 있고, 제8조의2는 부적격혈액으로 인한 감염 위험이 확인되면 보건복지부장관이 관련 혈액 및 혈액제제의 폐기 등 필요한 조치를 명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이 신고와 조치 기록은 감염 경위를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이 신고가 실제로 이뤄졌는지, 이뤄졌다면 어떤 내용으로 보고됐는지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료기록 열람·등사를 통해 병원이 작성한 특정수혈부작용 관련 기록을 확인하고, 필요하다면 소송 과정에서 혈액원을 상대로 한 사실조회나 문서송부촉탁을 통해 해당 혈액의 채혈 이력과 검사 결과를 확보하는 절차를 거치게 됩니다. 이런 자료 없이는 앞서 설명한 인과관계 추정도, 혈액원의 과실 판단도 구체적으로 다투기 어렵습니다.
진료기록 열람·등사 신청으로 수혈 경과와 부작용 신고 기록 확보.
혈액원 상대 사실조회·문서송부촉탁으로 채혈 이력·검사 결과 확보.
혈액백 라벨·로트번호가 남아 있다면 별도로 보관.
감염 진단서·검사결과지 등 발병 시점을 특정할 수 있는 자료 정리.
손해배상 범위 — 무엇을 청구할 수 있나
혈액원 또는 의료기관의 책임이 인정되면 청구할 수 있는 손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감염으로 실제 지출한 치료비와 향후 치료에 필요한 비용 같은 적극적 손해, 감염으로 인해 일하지 못하게 된 기간의 수입 손실 등 소극적 손해, 그리고 감염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입니다. 96다7854 판결에서도 환자 본인은 물론 그 가족의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 지급이 인정된 바 있어, 위자료 청구는 이 유형의 사건에서 핵심적인 청구 항목으로 다뤄집니다.
적극적·소극적 손해의 구체적인 액수는 소송에서 신체감정을 거쳐 정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염으로 인한 후유증의 정도, 향후 필요한 치료 기간과 방법, 노동능력상실률 등을 감정인이 의학적으로 평가하면 그 결과를 토대로 향후치료비와 일실수입을 산정하는 방식입니다. 감염 진단 이후의 치료 경과를 담은 진료기록을 꾸준히 확보해 두면 이 감정 과정에서 실제 손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활용됩니다.
시효 문제도 놓치기 쉬운 부분입니다. 민법 제766조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피해자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이 지나면 시효로 소멸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감염병 중에는 잠복기가 길어 수혈 후 한참이 지나서야 감염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사안에서는 '안 날'을 실제로 감염을 확진받은 시점으로 볼 수 있는지가 다퉈질 여지가 있어, 진단 시점과 수혈 시점 사이의 간격이 클수록 시효 기산점에 관한 검토를 먼저 해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손해배상청구권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이 지나면 소멸한다 — 잠복기가 긴 감염일수록 '안 날'의 기산점부터 먼저 점검해야 한다.
자주 묻는 질문
Q. 수혈 후 감염된 것만으로 혈액원 책임을 물을 수 있나요?
A. 감염 사실만으로는 부족하고 혈액원이 고도의 주의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과실이 별도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다만 판례는 문진·검사 절차의 흠결 같은 구체적 사정이 확인되면 과실을 인정해왔고, 인과관계도 간접사실 증명으로 완화될 수 있습니다.
Q. 병원과 혈액원 중 누구를 상대로 소송해야 하나요?
A. 각각 별도의 과실(혈액원은 혈액관리 과실, 병원은 설명의무·수혈절차 과실)이 확인된다면 공동불법행위로 함께 청구할 수 있습니다. 민법 제760조에 따라 연대책임을 지므로 어느 한쪽에 손해 전액을 청구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Q. 수혈 당시 검사에서 이상이 없었다면 무조건 면책되나요?
A. 아닙니다. 감염 초기에는 항체가 아직 형성되지 않는 구간이 있어 당시 검사로는 발견이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검사 시행 여부뿐 아니라 위험군 배제 절차와 문진 충실도까지 종합적으로 살펴 과실 여부가 판단됩니다.
Q. 감염 사실을 몇 년 뒤에 알게 됐는데 소멸시효가 지난 건 아닌가요?
A. 소멸시효는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부터 3년, 불법행위일로부터 10년입니다(민법 제766조). 잠복기가 긴 감염병은 실제로 감염을 인지한 시점을 기산점으로 다툴 여지가 있어 개별 사안마다 확인이 필요합니다.
Q. 특정수혈부작용 신고가 됐는지 어떻게 확인하나요?
A. 혈액관리법 제10조에 따라 의료기관의 장에게 신고 의무가 있으므로, 진료기록 열람이나 보건당국에 대한 확인 요청을 통해 신고 여부와 경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Q. 혈액제제 자체의 결함을 주장할 수도 있나요?
A. 농축적혈구·신선동결혈장 등 가공된 혈액제제는 제조물책임법상 제조물로 다뤄질 여지가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사용하던 중 손해가 발생했고 그 원인이 제조업자의 지배영역에 있으며 결함 없이는 통상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하면 결함과 인과관계가 추정됩니다(제조물책임법 제3조의2).
맺음말
수혈 감염 사고는 발생 빈도 자체는 낮지만, 일단 벌어지면 피해가 중대하고 원인 규명도 쉽지 않은 유형입니다. 그러나 혈액원은 법과 판례를 통해 일반적인 주의의무보다 훨씬 무거운 고도의 주의의무를 지고 있고, 문진·검사 절차의 구체적인 흠결이 확인되면 과실을 다투는 것이 불가능한 영역은 아닙니다. 인과관계 역시 전부 피해자 혼자 규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선후관계와 다른 감염경로의 부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완화된 증명 방법이 마련돼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혈 전후의 검사기록과 진료기록, 특정수혈부작용 신고 여부를 초기에 확보해 두는 일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료가 흩어지고 관계자의 기억도 흐려지므로, 감염 사실을 인지한 시점부터 관련 기록을 정리해 두는 것이 이후 절차의 출발점이 됩니다.
조력이 필요하시면 010-3432-1451 강대현 대표변호사에게 연락주십시오. 신속히 도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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