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후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마주한 환자와 가족은 병원의 어떤 조치가 잘못됐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진료기록은 전문용어로 가득하고, 어느 시점의 어떤 처치가 통상적 기준에 못 미쳤는지는 의학 지식 없이는 가려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료소송에서는 진료기록감정과 신체감정이라는 두 절차가 사실상 소송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문제는 이 두 감정이 목적도, 신청 시점도, 감정사항을 쓰는 방식도 전혀 다르다는 점입니다. 이 글에서는 진료기록감정과 신체감정을 각각 언제 무엇을 담아 신청해야 하는지, 그리고 감정 결과가 불리하게 나왔을 때 어떤 절차가 남아 있는지 짚어보겠습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진료기록감정과 신체감정 — 같은 감정 절차, 다른 목적
의료소송에서 흔히 '감정'이라고 뭉뚱그려 말하지만, 실제로는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절차가 있습니다. 진료기록감정은 이미 이뤄진 진료행위가 통상적 의료수준에 부합했는지, 즉 과실이 있었는지와 그 과실이 나쁜 결과와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가려내기 위한 절차입니다. 반면 신체감정은 병원의 책임이 인정되거나 인정될 가능성을 전제로, 현재 남아 있는 후유장해의 정도와 노동능력상실률을 의학적으로 평가해 손해배상액 산정의 근거를 만드는 절차입니다. 하나는 '누구 책임인가'를 밝히는 절차이고, 다른 하나는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가'를 정하는 절차라는 점에서 출발선이 다릅니다.
실무상 두 감정 모두 민사소송법 제341조에 따른 감정촉탁 방식이 원칙입니다. 법원이 대한의사협회나 특정 대학병원 등 공신력 있는 기관에 감정을 촉탁하면, 그 기관 소속 감정의가 별도의 선서 절차 없이 서면으로 감정 결과를 회신합니다. 이와 별도로 민사소송법 제335조에 따른 감정인지정 방식도 있는데, 이 경우 감정인이 선서한 뒤 감정하고 필요하면 법정에서 감정인신문을 거치기도 합니다. 두 감정을 혼동해 소 제기와 동시에 신체감정부터 신청하면, 책임 유무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손해액 산정 절차를 먼저 요구하는 셈이 되어 재판부가 신청 순서를 조정하도록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정사항도 완전히 다르게 작성해야 하므로, 신청 전에 지금 이 사건이 책임 단계에 있는지 손해액 단계에 있는지부터 구분해야 합니다.
진료기록감정은 '과실과 인과관계가 있었는가'를 밝히는 절차이고, 신체감정은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가'를 정하는 절차다 — 이 둘의 순서를 바꾸면 소송이 꼬인다.
진료기록감정, 언제 신청해야 하나 — 책임 판단의 첫 관문
소장과 답변서를 통해 양측 주장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통상 첫 변론준비기일을 전후한 시점에 진료기록감정촉탁을 신청하는 것이 실무 관행입니다. 이 시점에 신청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진료기록감정 결과가 이후 신체감정 신청 여부와 범위는 물론, 조정·화해 가능성까지 좌우하는 절차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신청이 늦어지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 채 변론기일만 반복되고, 그만큼 전체 소송 기간이 길어집니다.
신청 시 법원에 제출하는 진료기록감정촉탁신청서에는 감정을 맡길 의료기관(대한의사협회, 특정 대학병원 등)과 감정사항을 함께 기재합니다. 재판부가 이를 채택하면 감정촉탁서에 감정사항, 진료기록 사본, 진단서 등을 첨부해 해당 기관에 보내고, 그 기관의 감정의가 이를 검토해 서면으로 회신합니다. 이 과정은 통상 수개월이 걸리므로, 소송 초반에 신청해 두는 쪽이 전체 심리 기간을 줄이는 길입니다.
예를 들어 수술 후 감염이 발생한 사건이라면 감정사항을 하나로 뭉뚱그리지 않고, 수술 전 검사·소독 절차가 통상적 기준에 부합했는지, 감염 징후가 나타난 시점에 항생제 투여나 재수술 결정이 지체 없이 이뤄졌는지를 각각 별도 항목으로 나눠 신청해야 실질적인 답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감정사항을 어떻게 작성하느냐가 승패를 가른다
진료기록감정에서 가장 흔한 실패는 "이 진료가 적절했는지 감정해 주십시오" 식의 포괄적인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은 감정의가 "특별한 문제를 발견하지 못함"과 같은 짧고 모호한 답변으로 끝내기 쉽고, 이 경우 원고는 사실상 입증 기회를 한 번 날리는 셈이 됩니다. 재신청이 항상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어서, 첫 감정사항을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소송 전체의 향방을 가릅니다.
실무에서 통하는 방식은 진료 경과를 시간 순으로 쪼개, 각 시점에서 취해진 조치와 취해지지 않은 조치를 대비시켜 묻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특정 시점의 검사 결과가 의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결과에 대해 통상적으로 요구되는 후속 조치가 무엇인지, 실제 이뤄진 조치가 그 기준에 미달했는지, 미달했다면 그로 인해 결과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는지를 항목별로 나눠 순서대로 묻는 방식입니다.
진료 경과를 시점별로 쪼개 각 조치의 적절성을 개별 질문으로 구성
"이상 유무"가 아니라 "어떤 기준에서 무엇이 미달했는지"를 묻는 방식
인과관계에 관한 질문은 과실 유무 질문과 분리해 별도 항목으로 작성
상대방(병원) 측이 제시할 반박 논리를 예상해 재반박 근거가 될 질문도 함께 포함
감정사항은 넓게 던질수록 답이 흐려진다 — 시점별·쟁점별로 좁혀 물을수록 감정의의 판단 근거가 뚜렷해진다.
인과관계 입증책임 완화 법리와 진료기록감정의 역할
의료과실 소송에서 원고가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의료행위의 전문성과 폐쇄성 때문에 과실과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직접 증명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대법원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 대법원 1995. 2. 10. 선고 93다52402 판결에서 환자 측이 일련의 의료행위 과정에서 있었던 일반인의 상식에 바탕을 둔 의료상 과실 있는 행위를 증명하고, 그 결과와의 사이에 일련의 의료행위 외에 다른 원인이 개재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한 경우에는, 의료행위를 한 측이 다른 원인으로 인한 것임을 입증하지 못하는 이상 그 과실과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정하여 손해배상책임을 지울 수 있다는 법리를 밝혔습니다. 인과관계를 과학적으로 100% 증명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원인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정도의 개연성만 보이면 입증책임이 병원 측으로 넘어간다는 취지입니다.
이 법리가 실제로 작동하려면 "일련의 의료행위 과정에서 있었던 과실 있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짚어내야 하는데, 그 재료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진료기록감정입니다. 진료 경과 중 어느 시점에 통상적 기준에 못 미치는 조치가 있었는지를 감정 결과로 확보해야, 그 지점을 근거로 "다른 원인이 개재될 수 없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감정사항이 막연해 감정 결과에서 구체적인 과실 시점이 드러나지 않으면, 인과관계 추정 법리를 원용할 근거 자체가 약해집니다. 결국 이 판례가 열어준 입증책임 완화의 문턱을 실제로 넘을 수 있는지는, 앞서 다룬 감정사항 설계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신체감정, 너무 이르면 오히려 독이 된다 — 증상고정 이후 신청
책임 유무에 대한 심증이 어느 정도 형성되거나 조정·화해 가능성이 논의되는 단계에 이르면, 손해배상액 산정을 위한 신체감정 신청이 본격적으로 논의됩니다. 신체감정은 원고에게 남은 후유장해가 어느 정도인지, 노동능력을 얼마나 상실했는지를 의학적으로 평가하는 절차입니다.
여기서 실무상 자주 놓치는 함정이 시점입니다. 치료가 아직 진행 중이거나 증상이 변동하는 상태, 즉 증상고정 이전에 신체감정을 신청하면 감정의가 정확한 장해율을 산정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회신하거나, 이후 증상이 호전되거나 악화되어 다시 감정이 필요해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재감정은 시간과 비용을 다시 들여야 하는 데다 심리 기간이 그만큼 늘어지므로, 주치의로부터 더 이상 치료로 호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 이른바 증상고정 소견을 받은 이후에 신체감정을 신청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예컨대 수술 중 신경손상으로 손의 감각이 저하된 사건이라면, 재활치료로 감각이 일부 회복되는 중간 시점에 감정을 받으면 실제보다 낮은 장해율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후 회복이 정체된 뒤 재감정을 신청해도 법원이 이미 한 번 마친 감정 항목의 재감정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어, 처음부터 시점을 잘못 잡으면 되돌리기가 어렵습니다.
신체감정 결과는 어떻게 손해액으로 이어지나 — 노동능력상실률의 의미
신체감정촉탁서에는 통상 감정과목(정형외과·신경외과·정신건강의학과 등)과 감정사항이 함께 기재되며, 감정을 맡은 의료기관은 진찰과 각종 검사를 거쳐 노동능력상실률을 산정해 회신합니다. 이때 실무에서 널리 활용되는 기준이 신체 부위·장해 종류별로 상실률을 세분화한 맥브라이드식 장해평가방법입니다. 이렇게 산정된 상실률은 일실수입, 즉 사고나 의료사고가 없었다면 얻었을 소득에서 실제로 상실된 부분을 계산하는 데 핵심 변수로 쓰입니다.
다만 신체감정 결과가 곧바로 손해배상액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노동능력상실률에 더해 원고의 직업·소득·나이와 기존 질환(기왕증) 유무가 함께 고려되고, 의료과실이 손해 발생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에 관한 책임제한 판단이 별도로 이뤄집니다. 신체감정 결과 하나로 배상액이 정해진다고 오해하기보다는, 감정 결과는 손해액을 산정하는 여러 자료 중 핵심 자료라는 점을 이해하고 소송 전략을 세우는 것이 실무에 맞는 접근입니다.
감정 결과가 불리하거나 모호하다면 — 감정인신문·사실조회·재감정
감정 회신을 받았다고 절차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 결과가 원고에게 불리하게 나오거나, 감정사항에 대한 답변이 모호해 오히려 쟁점이 흐려지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럴 때 활용할 수 있는 절차가 몇 가지 남아 있습니다.
사실조회 신청 — 감정 결과 중 애매한 부분을 다시 구체적으로 확인해 달라고 해당 기관에 질의하는 절차
감정인신문 신청 — 감정을 담당한 의사를 법정에 출석시켜 감정 근거를 직접 신문하는 절차(주로 감정인지정 방식에서 활용되며, 촉탁감정에서도 필요시 감정의의 설명을 구할 수 있음)
재감정 신청 — 감정의 전제사실이나 방법에 명백한 오류가 있다고 판단될 때 다른 기관에 다시 감정을 촉탁해 달라고 신청
사적 소견서 제출 — 원고 측이 별도로 의뢰한 전문의 소견서를 참고자료로 함께 제출해 감정 결과의 신빙성을 다투는 방법
다만 재감정은 법원이 쉽게 받아들이는 절차가 아닙니다. 이미 공신력 있는 기관의 감정 결과가 있는 상태에서 단지 결과가 불리하다는 이유만으로는 재감정 신청이 받아들여지기 어렵고, 감정의 전제사실 자체가 잘못됐거나 감정 방법에 논리적 모순이 있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해야 합니다. 그런 만큼 애초에 감정사항을 정교하게 설계해 첫 감정에서 원하는 답변을 받아내는 쪽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진료기록감정과 신체감정을 동시에 신청할 수 있나요?
A. 함께 신청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책임 유무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손해액 산정 절차부터 진행하는 것은 비효율적이어서 재판부가 순서를 조정하도록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통상 진료기록감정으로 과실·인과관계를 먼저 다투고, 그 결과를 토대로 신체감정 신청 여부를 논의하는 순서가 일반적입니다.
Q. 진료기록감정에는 비용이 얼마나 드나요?
A. 감정료는 신청한 당사자가 우선 예납하는 것이 원칙이며, 감정 기관과 감정 항목의 난이도에 따라 금액이 달라집니다. 소송에서 최종적으로 패소한 쪽이 소송비용을 부담하게 되므로, 승소하면 예납한 감정료도 상대방에게 청구할 수 있습니다.
Q. 병원 측이 감정촉탁 기관 지정에 이의를 제기하면 어떻게 되나요?
A. 감정을 어느 기관에 맡길지는 최종적으로 법원이 결정하며, 양측이 서로 다른 기관을 원하면 재판부가 이를 조율하거나 별도로 판단합니다. 특정 기관과의 이해관계가 문제 될 소지가 있다면 그 사정을 재판부에 구체적으로 소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Q. 신체감정에서 노동능력상실률이 낮게 나오면 소송에서 불리한가요?
A. 상실률이 낮게 나오면 일실수입 산정에는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지만, 위자료나 향후 치료비 등 다른 손해 항목은 별도로 판단됩니다. 감정 결과가 실제 증상과 차이가 크다고 판단되면 사실조회나 재감정을 검토해 볼 수 있습니다.
Q. 진료기록감정 결과에서 과실이 확인되지 않으면 소송을 포기해야 하나요?
A. 감정 결과 하나로 소송의 승패가 전부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사항을 좁혀 재신청하거나 사실조회로 특정 쟁점을 보완하는 방법이 남아 있고, 진료기록 자체의 기재 불비나 다른 정황증거로 과실을 다툴 여지가 있는지도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Q. 감정 신청 후 결과를 받기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A. 감정 기관의 업무량과 사건의 난이도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 수개월이 소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신이 지연되면 재판부를 통해 감정 기관에 독촉하거나 다음 기일을 조정하며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인 실무입니다.
맺음말
의료소송은 전문성과 정보 비대칭이 유독 두드러지는 분야여서, 진료기록감정과 신체감정을 언제 어떤 내용으로 신청하느냐가 소송의 방향을 크게 좌우합니다. 진료기록감정은 책임의 유무를 가리는 절차이고 신체감정은 손해액을 정하는 절차라는 점을 구분해, 그 순서와 시점을 놓치지 않는 것이 우선입니다.
감정사항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설계하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에서도 전혀 다른 감정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특히 수원지방법원 관할에서 진행되는 의료소송에서도 진료기록감정과 신체감정의 신청 시점을 둘러싼 다툼은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진료 경과를 시점별로 쪼개 쟁점을 명확히 하고, 대법원이 밝힌 인과관계 추정 법리를 뒷받침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질문을 구성하는 것이 실무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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