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 제작한 물건에 하자가 생기면 계약서 제목부터 다시 봐야 합니다. "물품공급계약서"나 "제작계약서"라는 이름이 붙어 있어도, 법적으로는 그 물건의 성질에 따라 매매로 취급될 수도 있고 도급으로 취급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으로 판단되느냐에 따라 하자를 문제 삼을 수 있는 기간, 계약을 해제할 수 있는지 여부, 손해배상의 범위까지 전부 달라집니다. 특히 맞춤 설비나 특수 제작물을 주문한 발주자, 반대로 그런 물건을 만들어 공급한 제작자 모두 이 구분을 모르면 정작 필요한 시점에 권리 자체를 놓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제작물공급계약이 매매인지 도급인지 가리는 기준과, 그에 따라 실제로 무엇이 달라지는지를 정리해보겠습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제작물공급계약이란 — 매매와 도급이 겹쳐 있는 계약
제작물공급계약은 당사자 일방이 상대방의 주문에 따라 자기가 마련한 재료로 물건을 제작해 공급하고, 상대방이 그 대가를 지급하기로 하는 계약입니다. 대법원도 대법원 1996. 6. 28. 선고 94다42976 판결에서 "제작의 측면에서는 도급의 성질이 있고 공급의 측면에서는 매매의 성질이 있어 매매와 도급의 성질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의 법 개념으로 딱 떨어지지 않는 계약이라는 뜻입니다.
실무에서는 맞춤 가구, 공장 라인에 맞춘 특수 기계·설비, 고객사 로고를 새긴 간판·집기, 도면대로 깎은 금형, 특정 사양의 부품 등이 전형적인 제작물공급계약의 대상입니다. 이런 물건에 하자가 생겼을 때 매도인의 하자담보책임(민법 매매 규정)을 물을지, 수급인의 담보책임(민법 도급 규정)을 물을지는 계약서 문구가 아니라 물건 자체의 성질로 결정됩니다. 이 성질결정이 이후 모든 대응의 출발점이 됩니다.
실무에서 이 구분을 놓치면 소송 단계에서 더 큰 문제가 생깁니다. 매매를 전제로 완전물급부청구권을 행사했는데 법원이 도급으로 판단하면 청구 자체가 근거를 잃고, 반대로 도급을 전제로 하자보수를 청구했는데 매매로 판단되면 다른 구제수단을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소멸시효·제척기간이 임박한 상황에서 이런 혼선이 생기면 아예 권리행사 시한을 놓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 하자를 발견한 초기 단계에서부터 성질결정을 정확히 짚어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체물이냐 부대체물이냐 — 성질을 가르는 핵심 기준
판례가 제시하는 기준은 명확합니다. 계약에 따라 제작·공급해야 할 물건이 대체물인 경우에는 매매로 보아 매매에 관한 규정이 적용되지만, 물건이 특정 주문자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부대체물인 경우에는 그 물건의 공급과 함께 제작 자체가 계약의 주목적이 되어 도급의 성질을 띤다는 것입니다(대법원 94다42976 판결). 다른 곳에도 팔 수 있는 규격품인지, 오직 이 주문자만을 위해 맞춰진 물건인지가 갈림길입니다.
실제 판단에서는 몇 가지 요소를 함께 봅니다. 주문자가 제공한 도면·사양서에 따라 맞춤 제작됐는지, 동일한 물건을 다른 구매자에게도 그대로 판매할 수 있는 규격품인지, 제작 과정에 상당한 기술·노무가 추가로 투입됐는지가 대표적입니다. 카탈로그에 있는 표준 규격 자재를 대량으로 주문한 경우라면 대체물에 가까워 매매로, 발주자의 공장 설비에 맞춰 도면대로 새로 설계·제작한 기계라면 부대체물로 도급에 가까워집니다.
대체성 — 동일 사양으로 다른 구매자에게도 판매 가능한 규격품인가.
맞춤 정도 — 주문자의 도면·사양서에 따라 설계·제작됐는가.
제작 비중 — 재료 공급보다 제작에 들어간 기술·노무의 비중이 큰가.
거래 관행 — 같은 업계에서 이런 유형의 물건을 통상 어떻게 거래하는가.
물건이 대체물이면 매매, 특정 주문자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부대체물이면 도급 — 이 구분이 이후 하자 대응의 모든 법적 근거를 가른다.
매매로 판단될 때 — 완전물급부청구권과 6개월의 벽
대체물로 판단되어 매매로 취급되면 민법 제580조·제581조가 적용됩니다. 목적물을 종류로 지정한 매매(종류매매)에서 이후 특정된 목적물에 하자가 있으면 매수인은 계약해제나 손해배상 대신 하자 없는 물건으로 다시 줄 것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제581조 제2항, 완전물급부청구권). 도급의 하자보수청구권과는 성격이 다른, 매매만의 구제수단입니다.
다만 이 권리에는 짧은 시한이 붙어 있습니다. 민법 제582조는 하자 사실을 안 날로부터 6개월 안에 행사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이 기간은 소멸시효가 아니라 제척기간이어서 정지나 중단이 없습니다. 하자담보책임 자체는 매도인의 고의·과실을 묻지 않는 무과실책임이지만, 매수인이 계약 당시 하자를 알았거나 과실로 몰랐다면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단서도 함께 적용됩니다(제580조).
예를 들어 표준 규격 자재를 대량으로 주문해 공급받았는데 일부 물량에서 동일한 결함이 반복적으로 발견됐다면, 매수인은 손해배상이나 해제를 청구하는 대신 결함 없는 물건으로 다시 공급해 달라고 요구하는 쪽이 실무적으로 더 신속한 해결책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이 경우에도 하자를 안 날로부터 6개월이 지나면 완전물급부청구권 자체가 소멸하므로, 결함을 발견한 즉시 공급자에게 서면으로 문제를 제기해 시점을 명확히 남겨두어야 합니다.
도급으로 판단될 때 — 하자보수청구권부터 계약해제까지
부대체물로 판단되어 도급으로 취급되면 민법 제667조부터 제670조까지가 적용됩니다. 도급인은 상당한 기간을 정해 하자보수를 청구할 수 있고(제667조 제1항, 다만 하자가 중요하지 않은데 보수비용이 과다한 경우는 제외), 하자보수에 갈음하거나 보수와 함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습니다(제667조 제2항). 매매의 완전물급부청구권과 달리, 도급에서는 물건을 통째로 바꿔달라는 것이 아니라 고쳐달라는 것이 원칙적인 구제수단입니다.
하자가 심각해서 계약의 목적 자체를 달성할 수 없는 정도라면 계약을 해제할 수도 있습니다(제668조 본문). 이 권리들의 행사기간은 목적물을 인도받은 날로부터 1년입니다(제670조). 매매의 6개월보다 도급의 1년이 더 길게 보장되는 셈이어서, 인도받고 시간이 꽤 지나 하자를 발견한 경우라면 이 성질결정 하나로 청구 가능 여부 자체가 갈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수급인에게 고의·과실 같은 귀책사유가 별도로 있다면, 도급인은 하자담보책임에 그치지 않고 채무불이행에 따른 손해배상책임까지 함께 물을 수 있습니다. 하자담보책임이 목적물 자체의 흠을 보완하는 데 초점이 있다면, 채무불이행책임은 그 하자로 인해 도급인에게 추가로 발생한 확대손해까지 포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무상 두 청구권은 별개의 권원으로 함께 검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계약해제가 갈리는 지점 — 건물·공작물은 해제할 수 없다
도급으로 판단되더라도 계약해제가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민법 제668조 단서는 목적물이 건물 기타 토지의 공작물인 경우에는 하자로 계약목적을 달성할 수 없더라도 계약을 해제할 수 없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건물이나 공작물을 철거하는 사회경제적 손실이 지나치게 크다는 것이 그 취지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해제 대신 하자보수나 손해배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토지의 공작물에 해당하면 담보책임의 존속기간도 별도로 늘어납니다. 민법 제671조는 목적물이 토지·건물 기타 공작물인 경우 담보책임이 인도 후 5년간 존속하고, 석조·석회조·연와조·금속 등 견고한 재료로 조성된 것이면 10년간 존속한다고 정합니다. 공장에 고정 설치되는 대형 설비처럼 토지의 공작물에 준하는 제작물이라면 이 특칙이 적용될 여지가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고, 이동이 가능한 일반 기계·설비라면 앞서 본 제667조부터 제670조까지의 일반 규정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일반 동산·설비 도급 — 하자보수·손해배상·해제 모두 가능, 행사기간 인도 후 1년.
건물 기타 토지의 공작물 도급 — 계약해제 불가, 하자보수·손해배상만 가능.
공작물의 담보책임 존속기간 — 원칙 5년, 견고한 재료 조성 시 10년.
상인간 거래라면 — 즉시검사·하자통지의무라는 또 다른 함정
제작물공급계약이 매매로 성질결정되고 양쪽 모두 상인이라면, 민법과 별개로 상법 제69조가 추가로 적용됩니다. 상인간의 매매에서 매수인은 목적물을 수령하면 지체 없이 검사해야 하고, 하자나 수량 부족을 발견하면 즉시 매도인에게 통지를 발송하지 않으면 계약해제·대금감액·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합니다. 즉시 발견하기 어려운 하자라면 6개월 이내에 발견해 통지한 경우까지는 인정되지만, 그 기간을 넘기면 마찬가지로 권리를 잃습니다. 다만 매도인이 하자를 알면서도 숨긴 악의였다면 이 제한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상법상 의무가 민법 제582조의 6개월 제척기간보다도 먼저, 더 촘촘하게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물건을 인수하고도 검사를 미루거나 구두로만 문제를 제기하고 넘어가면, 나중에 정식으로 하자담보책임을 물으려 해도 즉시통지의무 위반으로 아예 청구 자체가 막힐 수 있습니다. 물건을 인수할 때는 검수보고서나 사진·영상으로 상태를 기록해 두고, 하자를 발견하면 구두가 아니라 이메일 등 증거가 남는 방식으로 즉시 통지해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가령 특수 설비를 공급받은 회사가 시운전 과정에서 즉시 발견하기 어려운 내부 부품 결함을 두 달 뒤에야 알게 됐다면, 상법 제69조 단서에 따라 6개월 안에 발견해 통지한 것이므로 권리 자체는 살아 있습니다. 다만 이 경우에도 결함을 알게 된 즉시 통지해야 하고, 발견하고도 통지를 미루면 그 시점부터는 다시 의무 위반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합니다.
실제 분쟁에서 쟁점이 되는 지점 — 계약서 문구보다 물건의 실질
소송으로 가면 법원은 계약서 제목이 "물품공급계약서"인지 "제작계약서"인지가 아니라, 실제 거래의 실질로 성질을 판단합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계약을 두고도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성질을 주장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공급자 쪽은 대금 회수와 하자책임 축소를 위해 매매의 짧은 제척기간을 주장하려 하고, 발주자 쪽은 하자보수·해제 등 넓은 구제수단을 확보하려 도급을 주장하는 식입니다. 반대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분쟁을 대비하려면 처음부터 관련 자료를 정리해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초 발주서와 도면·사양서(특정 주문자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물건이었는지 입증), 동일 물건의 표준 판매 여부를 보여주는 카탈로그나 다른 거래처 자료(대체물 여부 입증), 그리고 하자를 발견하고 통지한 시점을 특정할 수 있는 자료(제척기간 기산점 입증)가 대표적입니다. 예를 들어 동일한 유형의 부품이라도 완전 표준규격으로 대량 납품된 경우라면 매매로, 특정 고객사 전용 사양으로 소량 제작된 경우라면 도급으로 판단이 갈릴 수 있습니다.
계약 체결 단계에서 미리 대비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계약서에 하자담보책임의 내용과 행사기간을 구체적으로 약정해 두면, 성질결정을 둘러싼 다툼 자체를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습니다. 다만 매도인이나 수급인에게 지나치게 유리하게 기간을 단축하거나 책임을 배제하는 특약은 상대방이 사업자가 아닌 소비자인 경우 약관법이나 개별 법률에 따라 무효로 판단될 수 있으므로, 특약을 넣더라도 그 내용이 일방적으로 불리하지 않은지 함께 점검해야 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제작물공급계약서에 '매매계약'이라고 적혀 있으면 무조건 매매로 인정되나요?
A. 계약서 제목이나 문구만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물건이 대체물인지 부대체물인지 등 실질에 따라 법원이 판단하며, 대량생산 가능한 규격품이면 매매로, 특정 주문자의 사양에 맞춘 물건이면 도급으로 볼 가능성이 큽니다. 계약서의 명칭은 참고자료일 뿐 결정적인 근거는 아닙니다.
Q. 하자를 발견했는데 이미 인도받은 지 8개월이 지났습니다. 청구할 수 있나요?
A. 매매로 판단되면 하자를 안 날로부터 6개월인 제582조 제척기간이 문제되고, 도급으로 판단되면 인도받은 날로부터 1년인 제670조가 적용됩니다. 어느 쪽으로 성질결정되는지에 따라 청구 가능 여부 자체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8개월이 지났다는 사실만으로 미리 포기하지 말고 물건의 성질부터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Q. 도급으로 인정되면 어떤 경우든 계약을 해제할 수 있나요?
A. 하자로 계약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정도라면 원칙적으로 해제할 수 있지만, 목적물이 건물 기타 토지의 공작물인 경우 민법 제668조 단서에 따라 해제가 제한됩니다. 이때는 하자보수나 손해배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Q. 상인끼리 거래한 게 아니라 개인이 주문제작한 경우에도 즉시검사의무가 적용되나요?
A. 상법 제69조는 상인간의 매매에만 적용되는 규정입니다. 개인간 거래이거나 상인이 아닌 소비자가 주문한 경우라면 이 규정은 적용되지 않고, 민법상 하자담보책임 규정만 검토하면 됩니다.
Q. 완전물급부청구권이란 정확히 무엇인가요?
A. 종류매매에서 인도된 물건에 하자가 있을 때, 매수인이 계약해제나 손해배상 대신 하자 없는 물건으로 다시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민법 제581조 제2항). 대체 가능한 물건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행사할 수 있습니다.
Q. 대체물인지 부대체물인지 애매한 경우는 어떻게 판단하나요?
A. 주문자의 도면·사양서에 따라 맞춤 제작됐는지, 다른 구매자에게도 동일하게 판매 가능한 규격품인지, 제작에 상당한 기술·노무가 추가로 투입됐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펴봅니다. 계약 체결 경위를 담은 이메일이나 견적서 등 정황자료가 남아 있다면 판단에 큰 도움이 되므로, 분쟁이 예상되는 단계에서부터 이런 자료를 챙겨두는 것이 좋습니다.
맺음말
제작물공급계약은 계약서 이름 하나로 성격이 정해지지 않습니다. 물건이 대체물인지 부대체물인지에 따라 매매의 하자담보책임 규정이 적용될 수도, 도급의 담보책임 규정이 적용될 수도 있고, 그 결과 청구할 수 있는 기간과 방법, 계약해제 가능 여부까지 전부 달라집니다. 상인간 거래라면 상법상 즉시검사·통지의무까지 겹쳐, 물건을 받은 직후의 대응이 나중의 권리 행사 가능 여부를 좌우하기도 합니다.
주문제작한 물건에 문제가 생겼다면 계약서 문구에 기대기보다, 그 물건이 실제로 대체 가능한 규격품이었는지 아니면 자신만을 위한 맞춤 제작물이었는지부터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질결정에 따라 청구할 수 있는 기간과 방법이 달라지는 만큼, 판단이 애매하다면 두 가지 근거를 함께 준비해 두는 편이 안전할 때도 있습니다. 시흥 시화·정왕 등 제조업체가 밀집한 지역에서는 이런 주문제작 거래에서 하자 분쟁이 특히 자주 발생하는 만큼, 발주서·도면·검수기록 같은 자료를 미리 챙겨두고 기간이 지나기 전에 대응 방향을 정하시길 권합니다.
조력이 필요하시면 010-3432-1451 강대현 대표변호사에게 연락주십시오. 신속히 도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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