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가해자 측 변호사의 연락이 옵니다. "합의 의사가 있으시면 금액을 말씀해 달라." 이때 대부분의 피해자는 두 가지를 모릅니다. 얼마가 적정한지, 합의서에 서명하는 순간 무엇이 확정되는지. 피해자 입장에서 합의의 구조를 정리했습니다.
먼저 합의금에 법으로 정해진 기준은 없습니다. 금액은 범행의 무게와 피해의 정도, 가해자의 자력과 신분, 사건이 놓인 단계에 따라 정해집니다. 같은 죄명이라도 공무원·대기업 직원처럼 유죄 확정 시 잃을 것이 많은 가해자일수록 금액이 올라가고, 무자력자라면 합의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도 합니다.
유형별로는 통신매체이용음란처럼 비접촉 범죄는 수백만 원 선에서, 강제추행은 접촉의 부위·태양에 따라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까지, 강간·준강간은 수천만 원 이상에서 논의가 시작되는 것이 대체적인 폭입니다. 민사 위자료 판결도 준거가 됩니다. 강제추행과 통매음이 함께 인정된 사안에서 2,000만 원, 추행 9회·통매음 6회에 2차 가해가 겹친 사안에서 5,000만 원이 인정된 예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폭 안에서 금액을 끌어올리는 요소가 피해자의 '요구'가 아니라 '기록'이라는 점입니다. 정신과 진료 기록, 치료비 지출, 일상 기능의 손상을 보여주는 자료가 협상의 실질적 근거가 됩니다.
합의서 작성 단계에서는 세 가지를 지켜야 합니다. 첫째, 돈을 전부 받기 전에 합의서를 건네지 마십시오. 판례는 합의서를 작성해 건네고 가해자가 이를 수사기관에 제출한 이상, 약속한 돈이 다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처벌불원 의사를 철회할 수 없다고 봅니다(대법원 2001. 12. 14. 선고 2001도4283 판결). 전액 입금 확인 후 교부가 원칙이고, 부득이 분할이라면 지급 완료를 조건으로 하는 문구를 넣어야 합니다.
둘째, "민·형사상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포괄 포기 문구를 그대로 받지 마십시오. 이 한 줄은 민사 청구권만이 아니라 형사절차 안에서 배상을 받을 길까지 막습니다. 대법원은 그런 합의서가 제출된 사건에서 배상책임의 유무와 범위가 명백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유로 배상명령을 취소한 바 있습니다(대법원 2015. 8. 27. 선고 2015도9121 판결). 합의금이 위자료의 일부임을 명시하거나 추가 피해에 대한 청구권을 유보하는 방식이 가능합니다.
셋째, 비밀유지·접촉금지 조항과 위반 시의 위약벌이 사건 이후의 평온을 지키는 장치가 됩니다. 법원은 처벌불원 의사의 진정성을 신중하게 심사하므로(대법원 2020. 5. 14. 선고 2020도2433 판결 참조), 회유나 압박 속에 작성된 합의서는 효력이 다투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미성년 피해자 사건에서 법정대리인 위주로 합의가 진행돼 본인의 의사가 담겼다고 보기 어려우면, 처벌불원을 전제로 한 감경이 상급심에서 뒤집히기도 합니다.
합의 시점은 흔히 "수사 단계일수록 유리하다"고 설명되지만, 실제로는 시간이 아니라 그 시점에 가해자가 합의로 살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의 문제입니다. 기소유예가 현실적인 사건이라면 전과를 남기지 않는다는 이익이 걸린 수사 단계가 가장 값이 비싸고, 기소와 동시에 그 값은 사라집니다. 반대로 실형이 걸린 사건이라면 유죄 심증이 굳어지는 1심 결심 무렵에 가해자가 가장 절박해지고, 구속 상태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피해자가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금액이 계속 오르기 때문이 아니라, 초기에는 치료 경과와 후유증이 확정되지 않아 낮은 금액에 묶이기 쉽고 합의는 한 번 하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무한정 미루는 것도 위험합니다. 가해자의 자력은 변호사비와 다른 피해자와의 합의로 줄어들고, 2022년부터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몰라도 사건번호만으로 법원 소재지 공탁소에 공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공탁법 제5조의2). 피해자가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가해자가 공탁만으로 양형 이익을 챙겨가는 구도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공탁에 대한 대응은 수령 여부를 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급심은 피해자가 공탁금을 수령할 의사가 없고 엄벌을 바란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사건에서, 공탁을 처벌불원에 준하는 피해 회복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수령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 의사를 서면으로 남기는 것이 공탁의 양형 효과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공탁서에 '공탁금 회수 제한 신고서'가 붙어 있지 않으면 공탁자가 선고 전후를 불문하고 회수해 갈 수 있다는 점도 함께 확인하실 부분입니다.
합의가 되지 않아도 배상받을 길은 있습니다. 성폭력처벌법상 범죄 대부분은 배상명령의 대상이어서(소송촉진법 제25조), 별도의 민사소송 없이 유죄판결과 함께 치료비·위자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신청은 1심 또는 2심 변론종결 시까지 가능하지만, 같은 피해로 민사소송이 이미 계속 중이면 할 수 없고(같은 법 제26조) 피해 금액이 특정되지 않거나 배상책임의 범위가 불명확하면 각하됩니다. 치료비·상담비 자료를 미리 정리해 두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가해자 측의 직접 방문이나 반복 연락은 그 자체가 2차 가해이고 스토킹 등 별도 범죄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접촉을 변호사나 수사기관을 통하도록 요구하고, 수사 과정에서 가해자와의 분리 조치를 요청할 권리가 피해자에게 있습니다. 스토킹처벌법상 접근금지 잠정조치는 기간이 만료되면 효력을 잃지만, 재발 우려가 있으면 같은 범죄사실로 다시 청구·결정될 수 있습니다(대법원 2023. 2. 23.자 2022모2092 결정). 합의는 피해 회복의 수단이지 의무가 아니라는 것, 그것이 이 글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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