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직접 수행한 사건의 항소심에서,
국내 최초로 동성 생활공동체를 '법률상 보호가치 있는 이익'으로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한 번의 패소를 딛고 두 심급을 완주한 기록을, 변호사의 시선으로 정리합니다.
1. 들어가며 — 한 줄로 정리되지 않는 판결
우리 법은 아직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동성 커플의 사실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여러 차례 법원이 확인해 온, 지금도 변하지 않은 전제입니다.
그런데 2026년 6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조금 다른 결의 판결을 내놨습니다.
"동성혼은 인정할 수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이 오랜 시간 함께 쌓아 올린 생활공동체 그 자체는, 법이 지켜줄 가치가 있는 이익이다."
언뜻 모순처럼 들리는 이 두 문장이, 사실은 이 판결의 가장 정교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제가 1심부터 항소심까지 직접 맡아 수행한 사건입니다. 1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가 항소심에서 결론이 달라졌습니다. 선례가 없는 영역에서, 한 번의 패소를 딛고 끝내 재판부를 설득해 낸 과정이었습니다.
무엇이 달라졌고, 이 판결이 왜 특별한지 차근차근 풀어보겠습니다.

한겨레 기사(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262789.html)
2. 사건의 쟁점 — 제3자가 깨뜨린 공동체
두 사람은 여러 해에 걸쳐 함께 살았습니다.
단순히 한집에 산 게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의 급여가 다른 사람의 계좌로 들어가 공동의 생활비와 투자금이 되었고,
한 사람이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이 생활을 책임지며 부양했으며,
양가 부모에게 관계를 알리고, 예물 반지를 나눠 끼고, 가족 행사에 함께했고,
한 사람은 자신의 보험 수익자로 상대방을 지정하기까지 했습니다.
법원의 표현을 빌리면, 단순한 연인 관계를 넘어 "사실혼과 유사한 수준의 생활공동체"였습니다.
이 관계는 제3자가 두 사람 중 한 명과 부정한 관계를 맺으면서 깨졌습니다.
남겨진 사람(원고)은 그 제3자(피고)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핵심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법적으로 혼인도, 사실혼도 아닌 동성 커플의 관계를 깬 제3자에게, 과연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1심 법원의 답은 "아니오"였습니다.
동성 간에는 사실혼이 성립하지 않으니, 보호할 관계도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3. 법원의 판단 — '성립'과 '보호'를 분리하다
항소심은 1심과 정반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 논리의 핵심은 두 개의 질문을 분리한 것입니다.
기존 법원들은 이 둘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했습니다.
"동성 사실혼은 성립하지 않는다 → 따라서 보호할 것도 없다."
항소심은 이 연결고리를 끊었습니다.
"동성 간 사실혼의 성립을 인정하는 문제와, 사실혼과 유사한 생활공동체를 법률상 보호할 가치가 있는 이익으로 평가하는 문제는, 서로 다른 국면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이 관계를 '혼인'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 와 "이 관계가 깨졌을 때 법이 보호해 줄 수 있느냐"라는 별개의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앞의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한다고 해서, 뒤의 질문까지 자동으로 "아니오"가 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이 분리가 왜 설득력을 가질까요?
법원은 세 가지 근거를 들었습니다.
첫째, 이미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법적으로 혼인하지 않은 사이여도, 즉 사실혼이나 약혼 관계에서도, 제3자가 그 관계를 깨면 법은 이미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똑같은 공동생활을 한 동성 커플만 보호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건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둘째,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추구권과 평등권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성적 지향에 따라 공동체를 이루고 그 안에서 삶을 꾸려갈 권리가 있고, 이는 인간의 존엄에서 나오는 기본적 권리라는 것입니다. 같은 공동생활을 한 동성 커플만 보호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이 권리를 외면하는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셋째, 이렇게 보호한다고 해서 전통적 혼인 제도가 흔들리는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동성 커플의 생활공동체를 보호이익으로 인정하는 것이 기존 혼인 제도나 법적 안정성, 제3자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흐름을 짚어야 합니다. 2024년, 대법원은 동성 동반자를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인정하지 않은 처분이 평등원칙에 어긋난다고 판단했습니다. 개별 법률관계에서 동성 커플을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해선 안 된다는 흐름이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이번 판결은 그 흐름 위에 한 걸음을 더 얹은 것으로 읽힙니다.

4. 한 번의 패소에서 멈추지 않다
저는 이 사건을 1심부터 맡았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쉽지 않은 사건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선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동성 커플의 생활공동체를 제3자가 깼을 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한 판결은, 적어도 이런 형태로는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기존 판례를 그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사건이었다면 변호사의 역할도 크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없는 길을 만들어 가야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1심의 결과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한 번 졌다고 끝이 아니다
1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동성 간에는 사실혼이 성립하지 않으니 보호할 관계도 없다는, 종래의 단단한 논리 앞에서였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건이 멈춥니다. 첫 판단이 부정적이면, 그 결론이 굳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같은 사건을, 같은 마음으로, 항소심까지 끌고 갔습니다. 첫 심급의 결과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함께 간다는 것 — 제가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원칙이었습니다.
무엇을 끝까지 설득했는가
항소심에서 재판부를 움직인 핵심은, 제가 싸움의 질문을 다시 세운 것이었습니다.
"이 관계를 '혼인'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를 다투는 한, 현행법 해석상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질문을 옮겼습니다. 성립 여부가 아니라, "이 생활공동체가 법이 보호할 가치가 있는 이익인가"를 전면에 세웠습니다. 민법은 절대적 권리뿐 아니라 '법률상 보호가치 있는 이익'을 침해한 경우에도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합니다. 이 지점을 파고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장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로 떠받쳤습니다.
두 사람이 스스로를 '가족'으로 여겼음을 보여주는 정황
두 사람의 살림이 실제로 하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
이런 사건에서 가장 약한 고리는 "제3자가 그 관계를 알고도 깼다"를 증명하는 일입니다. 공적 기록이 있는 법률혼과 달리, 동성 커플의 관계는 "몰랐다"라는 항변에 노출되기 쉽습니다. 저는 이 고리를 상대방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메웠습니다.
이 모든 논증을, 해외 입법례와 학술 논문, 여론조사, 그리고 최근의 대법원 흐름까지 더해 "왜 지금 이 관계를 보호해야 하는가"로 엮어냈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판결문은 이 논리를 정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성립과 보호는 다른 국면의 문제"라는 핵심 판단, 그리고 사실관계를 하나하나 번호 매겨 인정한 대목은, 제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설득이 재판부에 닿았음을 보여줍니다.
한 번의 패소가 끝이 아니라는 것, 어려운 사건일수록 끝까지 함께 간다는 것 — 제가 이 사건을 통해 다시 확인한 원칙이고, 의뢰인께 드릴 수 있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허프포스트 코리아 기사(https://www.huffingtonpost.kr/article/257897)
5. 이 판결의 의미와 남은 과제
이 판결은 동성혼을 인정한 판결이 아닙니다. 그 점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법원은 현행법상 동성혼·동성 사실혼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판결이 특별한 이유는, 개별 법률관계에서 동성 커플에게 부분적으로나마 법적 보호를 확장하는 길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인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구체적 사건에서 하나씩 보호의 영역을 넓혀가는 흐름 — 이른바 '점진적 사법 포용'의 의미 있는 선례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급심 판결입니다. 상대방이 상고하면 대법원에서 최종적인 판단이 내려질 것이고, 결론이 달라질 가능성도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1심 전부 패소에서 항소심 일부 승소까지 온 이 사건의 궤적 자체가, 우리 사회와 법이 이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줍니다.
법이 현실을 앞서가는 경우는 드뭅니다. 대개 법은 현실을 뒤늦게 따라갑니다. 이 판결은 그 '따라감'의 한 장면일지도 모릅니다. 그 장면에 변호사로서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을, 저는 의미 있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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