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혐의없음 판단을 받은 성추행 사건에서 재정신청이 인용됐습니다. 재정신청이 인용되면 검사는 법원의 결정에 따라 반드시 기소해야 합니다. 2024년 법원이 받아들인 재정신청은 0.4% 남짓이었습니다(법원행정처 통계).
사건이 있고 5년이 지나서야 꺼낸 고소였습니다. 경찰은 불송치로, 검사는 불기소로, 고등검찰청은 항고기각으로 답했습니다. 제가 이 사건을 본격적으로 맡은 것은 불송치 뒤 이의신청부터였습니다. 그때부터 1심 판결까지 2년 가까이 의뢰인과 날짜를 맞추고 또 맞췄습니다.
1. 5년 동안 꺼내지 못한 이야기였습니다
2018년 여름, 의뢰인은 대학 선배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빌린 물건을 돌려주려던 자리였습니다. 선배는 1년여 전 의뢰인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했고, 그 뒤 두 사람은 거의 왕래가 없었습니다.
우연히 마주친 동기와 셋이 저녁을 먹었고, 동기가 먼저 돌아간 뒤에도 술자리가 이어졌습니다. 막차가 끊기자 선배는 의뢰인의 자취방에 가자고 했습니다. 의뢰인은 거절하고 첫차를 기다리며 노래방에 있기로 했습니다. 그곳에서 선배는 술기운에 엎드려 있던 의뢰인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입을 맞췄습니다. 의뢰인이 고개를 돌려 피하며 다시 엎드리자 옷 안으로 손을 넣었습니다. 의뢰인은 손을 뿌리치기를 되풀이하다 나가자고 말하고 자리를 떴습니다.
넉 달 뒤 의뢰인이 메시지로 그날 일을 따지자 선배는 긴 사과를 보내왔습니다. 그래도 고소는 하지 못했습니다. 사건 직후 가장 친한 친구에게 털어놓았지만 왜 술을 마셨느냐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고백을 거절한 뒤로 학과 안에 좋지 않은 소문이 돌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일이 알려지면 오히려 자신이 더 다칠 것 같았다고 합니다.
몇 년 뒤 학교를 떠나 다른 친구에게 이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친구는 고소를 권했고, 의뢰인은 그동안 모아 둔 돈으로 변호사를 찾았습니다. 2023년 여름, 사건 5년 만의 고소였습니다.
5년이면 늦은 것 아니냐고 묻는 분이 많습니다. 형법 제298조(강제추행)의 공소시효는 10년이라 5년이 지나도 고소할 수 있습니다(형사소송법 제249조 제1항 제3호). 시효 계산은 '성추행 공소시효' 글에 따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늦은 고소에서 더 어려운 것은 시효보다 그 5년 동안의 일을 설명하는 일입니다.
2. 경찰은 '원래 가까운 사이'였다며 불송치했습니다
2023년 늦가을 경찰은 불송치(사건을 검찰에 보내지 않고 끝내는 결정)를 했습니다. 혐의없음이었습니다. 선배는 입을 맞추고 몸을 만진 사실은 인정했습니다. 다만 의뢰인이 거부하지 않아 받아들이는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경찰이 본 것은 그날보다 그 전의 두 사람이었습니다.
어깨에 기대 찍은 사진이 있고 지인들도 연인 직전의 관계로 보였다는 점
고백을 거절한 뒤 우연히 만난 선배에게 의뢰인이 짐을 옮겨 달라고 했다는 점
의뢰인이 먼저 만나자고 했고 둘이 술을 마신 뒤 노래방에 갔다는 점
짐 이야기는 선배의 진술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결정서에는 사실처럼 적혔습니다. 의뢰인이 첫 조사에서 물건을 돌려주려고 먼저 연락했다고 한 말은 '피해자가 먼저 만남을 요청했다'는 근거가 됐습니다. 고백을 거절한 뒤 어떤 소문에 시달렸는지, 왜 그 무렵 관계를 풀고 싶었는지는 결정서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처음 남긴 말과 자료는 경찰 단계에서 내 뜻과 다르게 읽힐 수 있습니다. 성범죄 사건에서 상대방이 가장 먼저 꺼내는 것은 대개 '원래 가까운 사이였다'는 주장입니다. 고소장과 첫 조사에서 관계가 바뀐 날짜를 자료와 함께 못 박아 두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3. 제가 맡았을 때 판단은 이미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의신청은 불송치 통지를 받자마자 냈습니다. 선배도 인정한 신체 접촉, 날짜도 행동도 적지 않은 메시지에 정확히 그날 일을 사과한 답장, 사건 다음 날 쓴 일기를 앞세웠습니다. 사건은 검찰로 넘어갔습니다.
불송치 뒤로 의뢰인은 여러 차례 조사를 더 받았습니다. 마지막 조사는 다섯 시간 가량 이어졌다고 합니다. 같은 이야기를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일은 피해자에게 큰 짐입니다.
경찰 재조사 때는 저도 함께 있었습니다. 의뢰인은 선배가 낸 사진을 보고 입학 직후인 2017년 3월쯤 찍은 사진 같다고 했습니다. 고백 전에는 둘이 술도 자주 마시고 밥도 먹었지만 이성적인 감정은 전혀 없었다고도 했습니다.
2024년 봄 검사도 불기소(재판에 넘기지 않는 결정)를 했습니다. 두 번째 혐의없음이었습니다. 불기소결정서는 경찰의 판단을 그대로 가져왔고 한 가지를 덧붙였습니다. 다정하게 찍은 사진, 그 노래방에 전에도 여러 번 갔다는 점, '둘이 같이 술도 자주 마시고, 밥도 먹었다'는 의뢰인의 진술을 들어 선배가 묵시적 동의로 생각했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백 전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한 대답이 사건 당시의 친밀함을 보여 주는 근거로 쓰였습니다. 사진이 입학 직후의 것이라는 진술도 결론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앞 단계의 결정서는 다음 단계 판단의 출발점이 됩니다. 실무에서 초기에 정해진 판단을 뒤집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 불기소 이유서를 받은 날 저녁, 의뢰인과 날짜를 맞췄습니다
진술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불기소 이유서를 받은 날 저녁, 의뢰인과 2017년 봄의 메시지와 학교 커뮤니티 글을 하나하나 다시 꺼냈습니다. 고백을 거절한 직후 선배가 보낸 메시지부터 이듬해 초 의뢰인이 물건을 돌려주겠다며 먼저 연락한 메시지까지 날짜를 맞췄습니다.
그 뒤로도 의뢰인과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으며 처음 알게 된 때, 고백을 거절한 때, 소문이 돌기 시작한 때를 한 줄로 이었습니다. 검사가 친밀함의 근거로 든 사진과 진술은 모두 고백을 거절한 2017년 봄 이전의 것이었습니다. 사건은 그로부터 1년 3개월 뒤였습니다.
항고장에는 이 시간표를 담고, 경찰이 잘못 적은 사실관계도 바로잡았습니다. 짐을 옮겨 달라고 해 선배가 자취방에 온 일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둘이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2024년 여름 고등검찰청은 검사의 결정서를 그대로 원용(가져다 씀)해 항고를 기각했습니다. 세 번째 혐의없음이었습니다.
5. 마지막 문인 재정신청에는 새 자료를 들고 갔습니다
재정신청은 검찰의 불기소가 옳은지 법원에 묻는 마지막 절차입니다. 항고기각 통지를 받고 일주일 만에 재정신청서를 냈습니다. 저는 재정신청을 항고의 연장으로 보지 않습니다. 같은 서면을 다시 내서는 0.4%의 문을 열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간표를 뒷받침할 새 자료를 찾았습니다.
사건 무렵 의뢰인이 선배에게 이성으로서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 주는 당시 기록과 주변인의 확인서
고소하기 몇 년 전 의뢰인이 주변에 피해를 알렸던 기록
고소를 결심하게 된 경위를 아는 친구의 확인서
사과 메시지의 의미도 다시 짚었습니다. 선배는 당시 처지 때문에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아 사과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의뢰인의 메시지에는 날짜도 구체적인 행동도 없었습니다. 그날 일을 기억한다며 사과를 요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선배는 그날 자신의 행동이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며 길게 사과했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는 사람이 쓸 수 있는 답장이 아니었습니다.
신청서를 낸 지 석 달 남짓 지난 2024년 늦가을, 고등법원은 공소제기를 결정했습니다. 신청인이 낸 자료와 기록에 드러난 여러 사정을 종합하면 공소를 제기함이 상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의뢰인에게는 그 석 달이 사건 이후 가장 길었을 겁니다.
6. 기소 뒤에도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검사가 공소장을 쓰기 전, 의뢰인이 사건 당일 입었던 상의와 하의 사진을 검사실에 냈습니다. 진술 속 장면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라면 작은 것도 빠뜨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검사는 2025년 초 선배를 강제추행으로 기소했습니다.
재판에서 선배 측은 혐의를 다퉜습니다. 예전 스킨십과 일기를 쓰던 주기에 관한 의뢰인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의뢰인은 증인으로 법정에 나가 그날 일을 다시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2025년 가을 법원은 선배에게 집행유예 없이 징역 6개월을 선고했습니다. 판결 이유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선배가 낸 사진은 의뢰인이 고백을 거절하기 전의 것이다
사건 당시 두 사람 사이에 그런 행위가 이루어질 만한 맥락을 찾을 수 없다
수사기관이 동의의 근거로 본 사진을 법원은 고백 거절 이전의 사진으로 읽었습니다. 항고 때부터 내세운 시간표가 판결 이유에서도 그대로 확인됐습니다.
사건은 항소심으로 이어졌습니다. 항소심에서 선배는 공소장에 적힌 행위를 했다고 인정하는 합의서에 서명하고 4천만 원대 합의금을 지급했습니다. 합의서에는 다시 연락하거나 찾아오지 않고, 어기면 그때마다 배상한다는 조항을 넣었습니다. 사건이 끝난 뒤의 일상까지 지키려는 조항이었습니다. 의뢰인은 합의에 따라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법원에 밝혔습니다.
7. 늦은 고소도, 세 번의 혐의없음도 끝은 아니었습니다
사건을 마치고 돌아보니 의뢰인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그 이야기를 받치는 자료였습니다. 저는 늦은 고소일수록, 혐의없음을 받은 사건일수록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년을 견딘 이야기를 끝까지 같이 들고 가는 것이 이 사건에서 제가 할 일이었습니다.
오래 묻어 둔 일을 이제 꺼내려는 분도, 혐의없음 통지서를 받고 막막한 분도 계실 겁니다. 기한이 남아 있다면 결정서 한 장과 그때의 기록만으로 상담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다시 세울지는 첫 상담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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