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 견적서에 적힌 돈과 실제로 나간 돈
아파트 장기수선공사의 견적서를 펼쳐 보면 순공사비 아래로 여러 항목이 따라붙습니다.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을 비롯한 4대보험료, 그리고 산업안전보건관리비. 계상은 되었지만 실제로는 지출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 돈은 누구의 것일까요.
대전지방법원의 이 항소심 판결은 명확하게 답했습니다. 정산을 배제하기로 한 명시적 약정이 없다면, 쓰지 않은 돈은 돌려주어야 합니다.
사안의 개요
입주자대표회의는 한 업체와 옥상방수공사 계약과 건물 균열보수 및 도장공사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공사가 끝난 뒤 입주자대표회의는 기지급된 국민연금보험료 등과 산업안전보건관리비 합계 4,329만 4,501원이 실제로 사용되지 않았다며 부당이득 반환을 구했습니다. 제1심이 청구를 받아들이자 업체가 항소했고, 항소심은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쟁점 1 — 사후정산 배제 약정이 있었는가
업체의 주장은 이랬습니다. 관리소장과 사이에 하자보수기한을 장기로 하는 대신 사후정산을 배제하기로 합의했고, 다만 민간공사에서는 최저가 입찰인 경우 사후정산을 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어서 계약서에 기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재판부는 처분문서의 법리부터 확인했습니다. 처분문서의 진정성립이 인정되는 이상 법원은 당사자의 내심적 의사와 관계없이 서면의 기재 내용에 따라 객관적 의미를 해석하여야 하고, 문언의 객관적 의미가 명확하다면 이를 부인할 분명하고 수긍할 수 있는 반증이 없는 한 문언대로의 의사표시를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 위에서 네 가지 사정이 열거되었습니다. 첫째, 입찰 전 현장설명회에서 배포된 현장설명서는 하자보증기간을 준공 후 10년으로 규정하면서도 4대보험료의 사후정산 배제에 관하여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고, 업체는 그 설명회에 참여하여 내용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실무를 담당한 관리소장은 "계약 당시 사후정산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입주자대표회의에 보고한 적도 없다"고 진술했고 회장의 증언도 이에 부합했습니다. 셋째, 설령 관리소장이 구두로 그런 합의를 했더라도 계약의 당사자이자 결정권자는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며, 회장이 의결을 거쳐 지시했거나 대리권을 위임했다는 증거가 없었습니다. 넷째, 관행의 존재를 인정할 증거가 없었고 오히려 회장은 관리소장에게 "4대보험료를 비롯한 모든 비용의 영수증을 받아놓으라"고 지시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쟁점 2 — 산업안전보건관리비는 어디로 갔는가
산업안전보건법은 발주자로 하여금 공사의 종류와 규모에 따른 일정 금액을 산업안전보건관리비로 도급금액에 별도 계상하도록 하고 있고, 관련 고시는 항목별 사용기준과 사용 불가 내역을 정하여 그 용도와 방법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계상된 돈이라고 해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재판부가 지적한 사정들은 구체적이었습니다. 이 공사는 안전관리자를 두어야 하는 공사금액 규모에 해당하지 않았고 업체가 자발적으로 안전관리자를 선임할 내부 방침을 세운 정황도 없었습니다. 시청의 감사 결과 업체는 발주자의 확인 없이 사용내역서를 제출했고 정산 없이 안전관리비가 지급되었는데, 발주자가 사용내역서를 받고 이의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이를 수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안전관리자로 선임했다는 인원들은 업체의 건설기술자로 등록되어 있지도 않았고, 한 사람은 입금계좌 명의가 달랐으며 급여지급내역서의 시기와 금액도 맞지 않았습니다. 개인보호구 구입 내역의 세금계산서는 공급받는 자가 제3자로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마지막 논점은 고시의 시적 적용이었습니다. 건설재해예방기술지도비는 관련 고시 별표에서 사용 불가 내역으로 규정되어 있다가 2022년 6월 개정으로 삭제되었는데, 개정 고시는 발령일부터 적용되므로 그 이전에 이루어진 이 사건 공사에는 종전 고시가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업체가 지출했다는 안전관리비는 실제로 사용되지 않았거나 다른 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이 판결이 실무에 남기는 것
첫째, 계약의 유형이 결론을 만듭니다. 월 고정금액을 지급하는 총액도급형 위탁관리계약에서는 정산조항이 없는 한 절감분이 업체의 이익으로 남습니다. 반면 이 사건처럼 4대보험료가 원가 항목으로 계상되고 사후정산이 전제된 공사도급에서는 쓰지 않은 돈이 부당이득이 됩니다. 같은 '4대보험료 반환' 청구라도 어떤 계약 위에 서 있는지에 따라 정반대의 결론이 나옵니다.
둘째, 구두합의 항변은 상대가 입주자대표회의일 때 특히 취약합니다. 관리소장은 업무집행기관일 뿐 결정권자가 아닙니다. 업체가 관리소장과만 이야기하고 그 내용을 계약서나 변경계약서에 반영하지 않으면, 나중에 전부 부인당하고도 다툴 방법이 없습니다. 반대로 입주자대표회의 입장에서는 현장설명서에 사후정산 조항을 명시해 두는 것이 가장 저렴한 방어입니다.
셋째, 지시와 이행의 기록이 증거가 됩니다. 이 사건에서 회장이 "모든 비용의 영수증을 받아놓으라"고 지시한 사실은 사후정산이 당연히 예정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정황으로 쓰였습니다. 회의록과 업무지시 기록은 그 자체로 소송의 자산입니다.
넷째, 산업안전보건관리비의 기준은 계상액이 아니라 실제 사용액입니다. 사용내역서를 받았다고 정산이 끝난 것이 아니며, 발주자의 확인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안전관리자 선임 여부를 다툴 때는 등록 현황, 급여 지급 내역, 계좌 명의처럼 서류의 정합성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작업이 결정적입니다.
다섯째, 지방자치단체의 공동주택 감사 결과가 소송의 핵심 증거가 되었다는 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공사비 집행에 의심이 든다면 곧바로 소송으로 가기 전에 관할 지자체에 감사를 요청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맺으며
4,300만 원은 203세대 규모 단지에서 세대당 20만 원이 넘는 금액입니다. 견적서의 한 줄을 확인하지 않고 넘어가면 그 돈은 조용히 사라집니다. 공사가 끝난 뒤가 아니라 입찰 공고를 내기 전에, 현장설명서에 정산 조항을 넣는 일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부동산·공동주택 분쟁, 혼자 판단하지 마십시오
집합건물과 공동주택을 둘러싼 분쟁은 대부분 소송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승패가 정해집니다. 계약서의 한 조항, 회의록의 한 줄, 이의를 유보했는지 여부, 내용증명을 보냈는지 여부가 결과를 가릅니다. 반대로 말하면, 초기에 방향만 제대로 잡아도 피할 수 있었던 분쟁이 대단히 많습니다.
위와 유사한 문제로 고민하고 계시다면, 사안이 커지기 전에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 주십시오. 계약서와 관리규약, 회의록만 살펴보아도 대응의 방향은 상당 부분 잡힙니다.
법무법인 랜드로 신지수 변호사
※ 본 글은 실제 선고된 하급심 판결을 소재로 한 판례평석으로, 당사자 특정을 피하기 위하여 사건번호와 당사자 표시는 기재하지 않았습니다. 개별 사안의 결론은 사실관계와 증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구체적 사건에 관하여는 반드시 변호사의 검토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로톡의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콘텐츠 내용에 대한 무단 복제 및 전재를 금지하며, 위반 시 민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