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나 지인의 부탁으로 돈을 빌려줬는데, 나중에서야 처음부터 갚을 생각도 능력도 없이 속아서 건넨 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피해자는 흔히 차용증이 있으니 대여금으로 간단히 청구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 선택 하나가 나중에 상대방의 상계 항변을 막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완전히 가릅니다. 민법은 고의의 불법행위로 생긴 채무에 대해서는 상계를 금지하는 특별한 조항을 두고 있는데, 같은 사기 사건이라도 대여금으로 구성해 청구하면 이 보호를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왜 청구원인 선택에 따라 상계 가능 여부가 달라지는지, 실제로 얼마나 다른 결과가 나오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사기당해 빌려준 돈, 대여금과 손해배상 — 두 가지 청구원인의 갈림길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건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애초에 갚을 생각도 능력도 없이 거짓말로 받아간 돈이었던 경우, 피해자에게는 최소 두 가지 법적 구성이 열려 있습니다. 하나는 민법 제750조에 따른 불법행위 손해배상청구이고, 다른 하나는 애초에 "빌려준다"는 형식(차용증 등)을 갖췄다면 계약상 채권인 대여금반환청구, 즉 민법 제598조 소비대차에 따른 청구입니다. 사기 취소 후 민법 제741조 부당이득으로 반환을 구하는 방법도 있지만, 실무에서는 애초에 차용증을 받아둔 경우가 많아 대여금으로 청구하는 사례가 흔합니다.
대여금 청구를 택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돈을 건넨 사실과 반환약정만 입증하면 되어 문턱이 낮고, 형사고소 없이도 진행할 수 있으며, 상대방의 기망 고의를 입증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선택 하나가 나중에 상대방이 상계를 주장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완전히 가릅니다. 상대방이 원고에게 갚아야 할 별도의 채무가 있으면서 동시에 원고에게 받을 채권(과거 물품대금·다른 대여금 등)도 갖고 있다면, 소송에서 민법 제492조에 따라 그 채권으로 상계 항변을 낼 수 있습니다. 이 항변이 실제로 통하는지는 원고가 무엇을 청구원인으로 골랐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민법 제496조 — 고의의 불법행위 채무는 상계로 막을 수 없다
상계는 원칙적으로 자유롭습니다. 민법 제492조에 따라 서로 같은 종류의 채무를 부담하고 쌍방의 이행기가 도래했다면, 어느 쪽이든 대등액에서 상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민법 제496조는 예외를 하나 두고 있습니다. "채무가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것인 때에는 그 채무자는 상계로 채권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부담하는 채무의 발생원인이 고의의 불법행위라면, 가해자는 자신이 피해자에게 갖고 있는 별도의 채권으로 그 배상채무를 상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조항의 취지는 분명합니다. 고의로 불법행위를 저지른 사람에게까지 상계를 허용하면, 그 사람은 실제로 돈을 지급하지 않고도 장부상으로 채무를 털어버릴 수 있게 되어 오히려 보복적·자력구제적 불법행위를 조장할 우려가 있습니다. 또 피해자 입장에서는 현실적으로 손해를 배상받지 못하는 결과가 되어 사회정의관념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496조는 가해자가 상계로 대항하지 못하게 막아, 피해자가 현실의 변제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합니다.
이 원리를 사기 사건에 그대로 적용하면, 피해자가 기망행위를 이유로 불법행위 손해배상청구(750조)를 하는 경우 그 손해배상채무는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채무"에 해당하므로 가해자는 상계로 대항할 수 없습니다. 가해자에게 피해자에 대한 별도의 채권이 있더라도 그것으로 손해배상채무를 상쇄시킬 수 없고, 피해자는 원칙적으로 손해액 전부를 현실로 지급받을 길이 열립니다. 문제는 소비대차 형식, 즉 대여금으로 구성했을 때도 이 보호가 그대로 미치는가입니다.
채무가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것인 때에는 그 채무자는 상계로 채권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민법 제496조) — 다만 이 보호는 청구원인이 '불법행위'일 때 작동한다.
대법원 2024다204696 판결 — 기망으로 맺은 소비대차, 대여금채권엔 496조가 미치지 않는다
실제로 이 지점이 다퉈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상대방의 기망행위로 소비대차계약을 체결하고 돈을 건넨 원고가,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을 구하지 않고 계약상 채권인 대여금 및 이자의 지급을 구했습니다. 이에 피고는 원고에 대해 갖고 있던 별도의 채권으로 상계 항변을 냈고, 원고는 이 소비대차 자체가 피고의 기망행위로 체결된 것이니 민법 496조가 유추적용되어 상계가 금지되어야 한다고 다퉜습니다.
대법원 2024. 8. 1. 선고 2024다204696 판결은 원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계약상 채권, 즉 대여금반환청구권은 상대방의 기망행위 그 자체로부터 직접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쌍방 사이에 체결된 소비대차계약에 기초해 발생하는 것이어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채권과 급부의 경제적 이익이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496조가 막으려는 것은 고의로 불법행위를 저지른 자가 상계권 행사로 현실의 변제를 회피하는 상황인데, 계약상 채권에까지 이 보호를 넓히는 것은 입법취지를 벗어난다고 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대법원은, 상대방의 기망행위로 소비대차계약을 체결한 사람이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를 하지 않고 계약상 채권에 따른 대여금 및 이자 등의 지급만을 구하는 경우에는 민법 496조가 유추적용될 수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같은 기망행위로 시작된 사건이라도 피해자가 어떤 청구원인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상계 금지 조항의 보호를 받는지 여부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계약상 채권은 기망행위 자체가 아니라 쌍방의 계약에 기초해 발생하므로, 대여금으로 청구하는 이상 민법 496조의 상계금지 보호는 미치지 않는다 — 대법원 2024다204696 판결.
왜 소송물이 바뀌면 상계의 운명도 바뀌나
상계가 성립하려면 상계를 주장하는 쪽이 상대방에 대해 갖고 있는 채권(자동채권)과, 상대방이 그에게 갖고 있는 채권(수동채권)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496조가 가로막는 대상은 정확히 "수동채권이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채무일 때"입니다. 소송물이 불법행위 손해배상청구권이면 이 요건이 그대로 충족되어 상계가 막히지만, 소송물이 계약상 채권인 대여금반환청구권이면 애초에 496조가 규정하는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채무"라는 요건 자체를 충족하지 못합니다.
핵심은 사실관계, 즉 피고가 기망했다는 사실은 똑같아도 원고가 무엇을 소송물로 삼아 청구했는지가 법적 평가를 완전히 바꾼다는 점입니다. 소비대차계약서(차용증)를 작성해두고 그 계약상 채권을 청구원인으로 삼으면, 법원은 채무의 발생원인을 계약으로 봅니다. 반대로 애초에 계약 형식 없이 돈을 건넨 뒤 기망 사실 자체를 청구원인으로 삼아 불법행위 손해배상을 구하면, 법원은 그 채무를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채무로 평가합니다. 같은 돈, 같은 상대방, 같은 사기 사실인데도 소송물 선택 하나로 상계 가능 여부가 갈립니다.
청구원인이 불법행위 손해배상(민법 750조)일 때 — 채무 발생원인이 '고의의 불법행위' → 496조 적용 → 가해자는 상계로 대항 불가.
청구원인이 대여금반환(소비대차, 민법 598조)일 때 — 채무 발생원인이 '계약' → 496조 미적용(대법원 2024다204696) → 가해자의 상계 항변 가능.
상계가 가능해지면, 가해자가 원고에게 갖고 있는 별도 채권 액수만큼 원고가 실제로 회수하는 금액이 그대로 줄어든다.
숫자로 보는 차이 — 대여금 청구와 손해배상 청구의 실제 회수액
구체적인 가정을 들어보면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A가 B의 기망에 속아 5천만원을 "빌려준다"는 차용증을 쓰고 건넸다고 하겠습니다. B는 예전에 A에게 물건을 판 뒤 대금 2천만원을 받지 못한 채권을 갖고 있습니다. A가 대여금반환청구로 소송을 제기하면, B는 그 2천만원 채권으로 상계 항변을 낼 수 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 A는 판결로 나머지 3천만원만 지급받게 됩니다. B의 2천만원 채권이 상계로 소멸하면서 A가 실제로 손에 쥐는 돈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반대로 A가 처음부터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750조)로 구성해 소송을 제기했다면 결과가 달라집니다. B의 채무가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채무"로 인정되는 이상 496조에 따라 B는 2천만원 채권으로 상계할 수 없고, A는 원칙적으로 5천만원 전액에 대해 승소 판결을 받을 수 있습니다(다만 실제 회수는 B의 자력에 달려 있다는 별개의 문제는 남습니다). 두 시나리오의 차이는 오직 청구원인 선택 하나에서 비롯됩니다 — 사실관계도, 피고도, 손해액도 전부 같은데 말입니다.
같은 사실관계라도 대여금으로 청구하면 상대방의 기존 채권만큼 회수액이 깎이고, 손해배상으로 청구하면 민법 496조가 그 깎임을 막아준다.
처음부터 어떻게 청구해야 하나 — 청구원인 구성과 병합 전략
그렇다고 무조건 불법행위 손해배상으로만 청구하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불법행위 손해배상청구는 기망의 고의, 기망행위, 착오와 처분행위 사이의 인과관계, 손해의 발생까지 모두 입증해야 하는 반면, 대여금청구는 금전을 교부한 사실과 반환약정(차용증 등)만 입증하면 되어 문턱이 훨씬 낮습니다. 피고가 애초에 갚을 의사·능력이 없었다는 점을 입증할 자료 — 문자메시지, 통화 녹음, 계약 체결 경위, 피고의 자금 사정 — 가 충분한지가 어느 쪽으로 청구할지를 정하는 실질적인 기준입니다.
실무에서는 대여금반환청구(주위적)와 불법행위 손해배상청구(예비적 또는 선택적)를 함께 병합해 청구하는 방법도 활용됩니다. 이렇게 하면 법원이 계약상 채권으로 인정하든 불법행위로 인정하든 청구가 받아들여질 여지를 넓힐 수 있습니다. 다만 법원이 대여금청구를 인용하는 순간 그 부분에는 496조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애초에 기망의 고의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가능한 한 두텁게 준비해 불법행위 구성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을 높여두는 편이 유리합니다.
형사 절차를 함께 활용하는 것도 고려할 만합니다. 사기죄(형법 제347조, 20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로 고소해 수사기관이 기망의 고의와 편취 경위를 조사·확정하면, 그 수사기록과 결과가 민사에서 불법행위 요건을 입증하는 유력한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형사 절차의 결론을 기다리느라 민사 소멸시효나 신속한 채권 확보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민사와 형사를 병행해 진행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이미 대여금으로 소송 중이라면 — 상계 항변에 대응하는 법
이미 대여금반환청구로 소송을 제기했는데 상대방이 상계 항변을 내놓았다면, 그 시점에도 손을 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청구원인의 추가·변경이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같은 소송 절차 안에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를 예비적으로 추가하는 방법을 검토할 수 있습니다. 변론이 진행 중이거나 항소심 단계라면 이런 청구 변경·추가가 가능한 경우가 많으므로, 상계 항변이 제기된 시점에 바로 대응 방향을 재검토해야 합니다.
다만 청구원인을 불법행위로 바꾸거나 추가한다고 저절로 496조의 보호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법원이 그 채무를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채무"로 인정해야만 상계가 차단되므로, 기망의 고의와 인과관계를 뒷받침하는 증거 — 애초에 갚을 능력·의사가 없었다는 자금 사정, 거짓 설명을 담은 문자·통화 내역, 이후 잠적·연락두절 정황 등 — 를 함께 제출해야 합니다. 이 증거가 부족하면 법원은 여전히 계약상 채권으로만 평가해 상계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상계 항변이 이미 받아들여져 판결이 확정된 뒤라면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소장을 작성하는 단계에서부터 상대방에게 자신에 대한 별도 채권이 있는지 미리 확인하고, 있다면 처음부터 불법행위 구성이나 병합 청구를 고려하는 것이 상계로 인한 손실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사기당한 돈을 대여금으로 청구하면 무조건 상계당하나요?
A. 상대방에게 나에 대한 별도의 채권이 있고 그 채권의 이행기가 도래해 있어야 상계가 가능합니다. 그런 채권이 아예 없다면 대여금으로 청구해도 상계 문제는 애초에 발생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런 채권이 존재한다면, 대여금 청구인 이상 민법 496조의 보호를 받지 못해 상계가 그대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Q. 처음부터 손해배상으로 청구하면 항상 유리한가요?
A. 상계를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유리하지만, 기망의 고의·인과관계·손해까지 모두 입증해야 하는 부담이 커집니다.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면 청구 자체가 기각될 위험도 있어, 증거 상황에 따라 청구원인을 신중히 선택해야 합니다.
Q. 대여금과 손해배상을 함께 청구할 수 있나요?
A. 네, 주위적·예비적 또는 선택적으로 병합해 청구하는 방법이 실무에서 활용됩니다. 법원이 어느 한쪽 청구원인을 받아들이면 되므로 승소 가능성을 넓힐 수 있지만, 상계 항변과의 관계는 실제로 인용된 청구원인에 따라 달라집니다.
Q. 이미 대여금으로 소송을 제기했는데 상계 항변을 받았다면 늦은 건가요?
A. 변론이 종결되기 전이라면 청구원인을 추가·변경해 불법행위 손해배상청구를 예비적으로 넣는 방법을 검토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경우에도 법원이 그 채무를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채무로 인정해야 상계가 차단되므로, 관련 증거를 함께 보강해야 합니다.
Q. 형사고소를 하면 민사에서 상계를 막는 데 도움이 되나요?
A. 형사 수사 과정에서 확보된 진술·자료가 기망의 고의와 편취 경위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활용될 수 있어 간접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다만 형사 결론 자체가 민사 상계 여부를 자동으로 결정하지는 않으며, 민사 재판부가 별도로 불법행위 요건을 판단합니다.
Q. 민법 제496조는 과실로 인한 불법행위에도 적용되나요?
A. 아닙니다. 조문 문언 그대로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채무일 때만 적용되며, 단순 과실로 인한 손해배상채무에는 이 상계금지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기처럼 고의가 명백한 사건에서 이 조항의 실익이 큽니다.
맺음말
사기를 당해 돈을 잃었다는 사실은 같아도, 그 돈을 되찾기 위해 어떤 청구원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대여금으로 청구하면 절차는 간명해지지만 상대방이 갖고 있는 별도 채권으로 상계당해 실제 회수액이 줄어들 위험이 있고, 불법행위 손해배상으로 청구하면 민법 496조의 보호를 받아 상계를 막을 수 있지만 기망의 고의를 입증해야 하는 부담이 따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소장을 내기 전에 상대방에게 자신에 대한 채권이 있는지, 기망의 고의를 입증할 증거가 얼마나 확보되어 있는지를 먼저 점검하는 일입니다. 수원지방법원을 비롯한 법원에 대여금·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면, 청구원인을 정하기 전에 이 두 갈래의 차이부터 짚어보시길 권합니다.
조력이 필요하시면 강대현 대표변호사에게 연락주십시오. 신속히 도와드리겠습니다.
의뢰인을 위한 최선의 전략을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로톡의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콘텐츠 내용에 대한 무단 복제 및 전재를 금지하며, 위반 시 민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