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주서를 받고 단가와 납기를 고쳐서 회신했는데, 발주자가 답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원래 발주서대로 납품하지 않았다며 책임을 묻는 일이 있습니다. 반대로 수정 회신을 보낸 뒤 원자재부터 사들이고 제작에 들어갔는데, 발주자가 그 조건으로 계약한 적이 없다고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두 상황의 쟁점은 같습니다. 발주서에 변경을 가한 회신을 계약을 성립시키는 승낙으로 볼 것인지, 새로운 청약으로 볼 것인지입니다. 이 글에서는 민법이 이런 회신을 어떻게 다루는지, 그 뒤의 침묵과 이행이 계약 성립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계약이 서지 않았을 때 이미 들어간 비용을 어디까지 돌려받을 수 있는지 짚어보겠습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발주서는 청약이고 회신은 승낙이어야 한다 — 계약 성립의 기본 틀
계약은 청약과 승낙이라는 두 개의 의사표시가 서로 맞아떨어질 때 성립합니다. 물품을 주문하는 거래에서 발주서는 보통 청약에 해당합니다. 품목·수량·단가·납기처럼 계약의 핵심 내용이 확정적으로 적혀 있고, 상대방이 '예'라고만 하면 곧바로 계약이 서도록 작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견적서나 단가표, 카탈로그는 상대방의 청약을 이끌어 내는 청약의 유인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 이것만으로는 계약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청약이 이루어지면 청약자는 마음대로 거두어들일 수 없습니다. 민법 제527조는 계약의 청약을 철회하지 못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청약이 무한정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승낙기간을 정한 청약은 그 기간 안에 승낙의 통지를 받지 못하면 효력을 잃고(제528조 제1항), 승낙기간을 정하지 않았다면 상당한 기간 안에 승낙의 통지를 받지 못했을 때 효력을 잃습니다(제529조). 승낙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떨어져 있는 당사자 사이의 계약은 승낙의 통지를 발송한 때 성립합니다(제531조).
여기서 핵심은 계약을 성립시키는 것이 '승낙'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회신을 보냈다고 해서 그 회신이 모두 승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발주서와 다른 내용이 회신에 들어 있으면 그 회신은 법적으로 승낙의 자리에 서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 항목에서 볼 민법 제534조에 있습니다.
발주서 — 품목·수량·단가·납기가 확정적으로 적혀 있어 승낙만 받으면 계약이 서는 청약.
견적서·단가표 — 조건을 알리고 주문을 유도하는 청약의 유인. 이를 보고 낸 상대방의 발주가 청약이 됨.
발주서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주문 확인 회신 — 승낙이므로 그 시점에 계약 성립.
발주서 내용을 고친 회신 — 승낙이 아니라 새로운 청약(다음 항목에서 설명).
발주서는 청약이고 계약은 그 청약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승낙이 있을 때에만 선다 — 회신을 보냈다는 사실이 아니라 회신의 내용이 성립을 가른다.
단가·납기를 고쳐 회신하면 — 민법 제534조, 승낙이 아니라 새 청약
민법 제534조는 승낙자가 청약에 대하여 조건을 붙이거나 변경을 가하여 승낙한 때에는 그 청약의 거절과 동시에 새로 청약한 것으로 본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이 규정을 발주 거래에 대입하면 결론이 분명해집니다. 발주서의 단가나 납기를 고쳐서 회신하는 것은 겉보기에 수락처럼 보여도 법적으로는 발주서에 대한 거절이고, 동시에 고친 조건으로 계약하자는 새로운 청약입니다. 회신 문서의 제목이 '주문 승낙서'이든 '발주 확인 회신'이든 이름은 중요하지 않고 내용이 기준입니다.
대법원도 같은 법리를 확인했습니다. 대법원 2002. 4. 12. 선고 2000다17834 판결은 매도인이 매매계약의 합의해제를 청약하자 매수인이 조건을 붙이거나 변경을 가하여 승낙한 사안에서, 민법 제534조에 비추어 그 청약의 거절과 동시에 새로 청약한 것으로 보게 되고 그로 인하여 종전 청약은 실효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판결은 합의해제의 청약에 관한 사건이지만 청약과 승낙의 구조는 발주서와 회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단가와 납기는 계약의 핵심 조건이어서, 이를 고친 회신이 변경 없는 승낙으로 인정될 여지는 크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발주자가 부품 1,000개를 개당 1,200원, 납기 10월 15일로 적어 발주서를 보냈는데 수급자가 개당 1,350원, 납기 10월 25일로 고쳐 회신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 회신으로 계약이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수급자가 개당 1,350원·납기 10월 25일이라는 새로운 청약을 발주자에게 한 상태가 됩니다. 이 새 청약은 발주자에게 도달한 때 효력이 생기고(민법 제111조 제1항), 이제 계약이 성립하려면 이번에는 발주자가 승낙해야 합니다. 이렇게 공이 발주자에게 넘어갔다는 점을 놓치면 이후 단계를 모두 잘못 판단하게 됩니다.
"단가 1,350원으로 조정해야 진행 가능합니다" — 조건을 붙인 회신이므로 새 청약.
"납기는 10월 25일로 하겠습니다" — 발주서의 조건을 스스로 바꾼 회신이므로 새 청약.
"수량·단가·납기 모두 발주서대로 진행하겠습니다" — 변경이 없는 승낙이므로 계약 성립.
"발주서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납기는 가능하면 며칠 늦춰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승낙은 확정하고 요청만 덧붙인 것이라 변경이 아닌 희망사항 표시로 해석.
발주서의 단가·납기를 고쳐 회신하는 순간 발주서는 거절된 것이고, 계약은 성립하지 않은 채 수급자의 새 청약이 발주자 앞에 놓인다.
종전 발주서는 실효된다 — 원래 조건으로 되돌릴 수 없는 이유
제534조의 효과는 새 청약이 하나 더 생기는 데서 끝나지 않고 종전 청약이 사라지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앞서 본 2000다17834 판결이 밝힌 대로 종전 청약은 실효되므로, 변경 회신을 보낸 수급자가 며칠 뒤 마음을 바꿔 "역시 발주서 조건 그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통지해도 그것은 이미 사라진 청약을 승낙한 것이 아닙니다. 이 통지는 원래 조건으로 계약하자는 또 하나의 새 청약이 되고, 발주자가 다시 받아들여야 계약이 섭니다. 회신 한 번으로 협상 지위가 이렇게 바뀌기 때문에, 조건을 고쳐 회신하기 전에 원래 조건으로 진행할 여지가 있는지부터 정해 두어야 합니다.
이 법리는 발주자에게도 똑같이 작용합니다. 수급자의 변경 회신이 도착한 이상 발주서를 근거로 원래 단가와 납기의 이행을 강제할 수 있는 계약은 아직 없습니다. 납기 지연에 따른 지체상금이나 채무불이행 손해배상도 계약이 성립해야 청구할 수 있으므로, 변경 회신 이후 아무 합의 없이 납기가 지나갔다면 발주서만으로 책임을 묻기는 어렵습니다. 발주자가 뒤늦게 "발주서대로 납품하라"고 독촉하더라도 그 독촉이 곧 계약의 성립은 아닙니다.
다만 예외가 있습니다. 두 회사가 미리 기본거래계약을 맺고 개별 발주가 그 계약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사정이 다릅니다. 기본계약에 발주서를 받은 날부터 일정 기간 안에 이의가 없으면 승낙한 것으로 본다거나, 단가와 납기의 변경은 서면 합의로만 한다는 조항이 있다면 개별 발주의 성립 여부는 그 조항에 따라 판단됩니다. 그래서 분쟁이 생기면 발주서와 회신뿐 아니라 기본계약서의 발주·변경 절차 조항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변경 회신으로 종전 청약은 사라진다 — 원래 조건으로 돌아가려면 회신자의 재통지가 아니라 상대방의 새로운 승낙이 있어야 한다.
발주자가 침묵하면 — 민법의 원칙과 상법 제53조의 낙부통지의무
수정 회신을 받은 발주자가 답을 하지 않고 시간이 흘렀다면 계약은 성립했을까요. 민법의 일반 법리는 침묵을 승낙으로 보지 않습니다. 새 청약에 대해 상대방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는 승낙의 의사표시가 있다고 할 수 없고, 승낙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청약은 상당한 기간 안에 승낙이 없으면 효력을 잃습니다(민법 제529조). 그래서 상인이 아닌 사이거나 거래 이력이 없는 상대방 사이에서는 침묵이 계약 불성립으로 정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상인 사이의 거래입니다. 상법 제53조는 상인이 상시 거래관계에 있는 자로부터 그 영업부류에 속한 계약의 청약을 받은 때에는 지체없이 낙부의 통지를 발송해야 하고, 이를 해태한 때에는 승낙한 것으로 본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수년째 같은 부품을 반복 납품해 온 협력업체가 단가 인상을 담은 회신을 보냈는데 발주 회사 담당자가 메일을 확인만 하고 답을 미뤘다면, 이 규정이 적용되어 새 조건으로 계약이 성립했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습니다. 민법으로는 불성립인 상황이 상법으로는 성립이 되는 것이어서, 발주자 쪽이 더 조심해야 하는 지점입니다.
청약을 받은 쪽이 상인일 것 — 회사나 개인사업자처럼 자기 명의로 영업 거래를 하는 주체.
청약자와 상시 거래관계에 있을 것 — 일회성 거래가 아니라 반복적·계속적으로 거래해 온 관계.
그 청약이 받은 상인의 영업부류에 속한 계약일 것 — 재판매용 상품을 사들이는 유통업자처럼 구매가 영업 자체에 속하면 충족하기 쉽고, 제조업체의 원자재 구매처럼 영업을 뒷받침하는 거래는 이 요건이 다투어질 수 있음.
지체없이 낙부의 통지를 발송하지 않았을 것 — 수락이든 거절이든 통지 없이 상당 기간이 지난 경우.
그래서 상시 거래하는 협력업체의 변경 회신은 방치하지 말고, 수락하든 거절하든 서면으로 곧바로 통지해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조문이 요구하는 것은 낙부 통지의 발송이므로 메일이나 문자, 발주 시스템 메시지로 즉시 남겨 두면 승낙 간주를 막을 수 있습니다. 거절 통지 한 통이 나중에 새 조건으로 계약이 성립했다는 주장을 차단하는 증거가 됩니다.
민법에서는 침묵이 승낙이 아니지만, 상시 거래하는 상인 사이에서는 지체 없이 낙부 통지를 하지 않으면 상법 제53조에 따라 승낙한 것으로 본다.
물품을 만들어 보냈다면 — 의사실현과 묵시적 승낙
변경 회신 뒤에 서류상의 승낙이 없더라도, 행동으로 계약이 성립하는 길이 있습니다. 민법 제532조는 청약자의 의사표시나 관습에 의하여 승낙의 통지가 필요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승낙의 의사표시로 인정되는 사실이 있는 때에 계약이 성립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의사실현에 의한 계약성립). 발주 거래에서는 별도 회신 없이 물품이 오가며 계약이 이행되는 관행이 흔해 이 규정이 문제되기 쉽습니다. 이때 승낙으로 인정되는 사실은 새 청약을 받은 발주자 쪽의 행위여야 합니다.
여기서 자주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수급자가 변경한 조건대로 제작을 마치고 물품을 발송한 것은 수급자 자신의 새 청약을 이행하려는 준비일 뿐, 발주자의 승낙이 아닙니다. 계약 성립 여부는 발주자가 변경된 조건을 알면서 물품을 검수해 수령하고 사용했는지, 변경된 단가에 맞춘 세금계산서를 받고 대금을 지급했는지 같은 발주자 측 사정에서 갈립니다. 변경 내용을 알고도 이의 없이 받아들인 정황이 쌓이면 묵시적 승낙이 인정될 수 있고, 그 경우 계약 내용은 발주서가 아니라 수급자가 제시한 개당 1,350원·10월 25일 납기입니다.
발주자 담당자가 변경된 단가·납기를 알면서 메신저나 메일로 "진행해 주세요"라고 답한 경우 — 승낙 인정 가능성이 높음.
변경 내용을 알고 물품을 검수·수령해 자기 공정에 투입하거나 재판매한 경우 — 승낙 정황으로 작용.
변경된 단가에 맞춘 세금계산서를 이의 없이 받고 대금을 지급한 경우 — 승낙 정황으로 작용.
수령 시 "발주서 단가 기준으로만 정산" 같은 이의를 서면으로 남긴 경우 — 승낙으로 보기 어려움.
변경 회신이 발주자에게 전달·인식된 적 없이 창고 입고만 이루어진 경우 — 승낙 의사를 인정하기 어려움.
이 다툼은 결국 증거 싸움입니다. 변경 회신의 발송·도달 기록(이메일 원본, 발주 시스템 로그), 이후 오간 메신저 대화, 검수서와 입고 확인서, 세금계산서 발행 금액, 대금 지급 내역이 모두 승낙 여부를 가르는 자료가 됩니다. 이 자료를 분쟁이 커지기 전에 정리해 두는 쪽이 유리합니다.
새 청약을 받은 쪽이 변경 내용을 알면서 이의 없이 물품을 받아 쓰고 대금을 치렀다면, 서면 승낙이 없어도 승낙의 의사표시로 인정되는 사실이 있다고 볼 여지가 커진다.
성립 여부를 가르는 판단 기준 — 세 장면으로 보는 결론
법원이 발주서 회신 분쟁에서 계약 성립을 가릴 때는 누가 어떤 의사표시를 했는지를 순서대로 따라갑니다. 먼저 발주서가 확정적인 청약이었는지, 다음으로 회신이 변경 없는 승낙인지 조건을 고친 회신인지, 그다음으로 조건을 고친 회신에 대해 발주자가 승낙했는지를 살핍니다. 서면상 승낙이 없다면 마지막으로 이행 경과에서 승낙의 의사가 드러나는지를 봅니다.
1단계 — 발주서가 품목·수량·단가·납기를 확정적으로 담은 청약이었는가.
2단계 — 회신이 발주서 내용을 그대로 받았는가, 조건을 붙이거나 변경했는가(변경이면 새 청약).
3단계 — 새 청약에 대해 발주자가 명시적으로 승낙했는가, 회신 기한이나 상당한 기간이 지났는가.
4단계 — 명시적 승낙이 없다면 상법 제53조가 적용되는 상인 간 상시 거래인가.
5단계 — 그것도 아니라면 발주자의 수령·검수·대금 지급에서 묵시적 승낙이 드러나는가.
첫 번째 장면입니다. 수급자가 "단가 1,350원, 납기 10월 25일로 조정해야 진행 가능합니다"라고 회신했고, 발주자는 "검토하겠습니다"라고 답한 뒤 연락이 끊겼으며 수급자도 제작에 착수하지 않았습니다. 명시적 승낙도 이행 경과도 없으므로 계약은 성립하지 않았고, 수급자의 새 청약은 상당한 기간이 지나면 실효됩니다(제529조). 양쪽 모두 상대방에게 계약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다만 두 회사가 상시 거래관계라면 앞서 본 상법 제53조가 별도로 문제됩니다.
두 번째 장면입니다. 같은 상황에서 발주자의 구매 담당자가 메신저로 "그 단가와 납기로 진행해 주세요"라고 답했다면 발주자의 승낙이 있으므로 그 시점에 수급자가 제시한 조건대로 계약이 성립합니다. 세 번째 장면입니다. 수급자가 "발주서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납기는 가능하면 며칠 늦춰 주시길 부탁드립니다"라고 회신했다면 승낙을 확정한 채 요청만 덧붙인 것이라 변경이 아니고, 발주서 조건으로 계약이 성립합니다. 같은 납기가 언급되었더라도 조건으로 내걸었는지, 요청으로 덧붙였는지에 따라 결론이 정반대가 됩니다.
성립 여부는 회신의 제목이 아니라 내용과 이후의 행동이 정한다 — 조건으로 건 변경은 새 청약이고, 승낙을 확정한 채 덧붙인 요청은 희망사항이다.
계약이 성립하지 않았는데 이미 제작·납품했다면 — 신뢰손해와 부당이득
계약이 성립하지 않았다면 계약에 기한 대금청구나 채무불이행 손해배상은 할 수 없습니다. 수급자가 변경 회신 뒤 원자재를 구입하고 제작까지 마쳤더라도 발주자가 변경 조건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개당 1,350원의 대금을 청구할 계약상 근거가 없습니다. 이때 검토하는 경로가 계약교섭의 부당한 중도파기에 따른 불법행위 책임과 부당이득 반환입니다. 두 경로는 요건과 회복 범위가 서로 다릅니다.
대법원 2003. 4. 11. 선고 2001다53059 판결이 정립하고 대법원 2024. 10. 25. 선고 2023다258658 판결이 다시 확인한 법리에 따르면, 계약교섭의 부당한 중도파기는 불법행위(민법 제750조)를 구성할 수 있고 그 손해배상의 범위는 계약이 유효하게 체결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입은 신뢰손해입니다. 일방이 교섭 단계에서 계약이 확실하게 체결되리라는 정당한 기대를 부여했고, 상대방이 그 신뢰에 따라 행동했으며,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 체결을 거부했다는 사정이 필요합니다. 신뢰손해는 계약이 이행되었다면 얻었을 이윤이 아니라 그 신뢰 때문에 지출한 비용, 예컨대 원자재 구입비와 금형·설비 준비비, 제작 인건비 같은 항목입니다.
다만 발주자가 수급자의 변경 조건을 거절할 자유는 계약자유의 영역이라 거절 자체는 위법하지 않습니다. 위법성이 인정되려면 발주자가 "그 조건으로 하겠으니 준비해 달라"고 하는 등 계약이 확실하다는 신뢰를 준 뒤에 상당한 이유 없이 돌아섰다는 사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변경 회신에 아무 반응이 없었는데 수급자가 혼자 제작한 비용은, 신뢰를 준 사실이 없어 회수하기 어렵습니다. 발주자가 물품을 수령해 실제로 사용했다면 법률상 원인 없이 이익을 얻은 것이므로 민법 제741조에 따라 그 이익의 반환을 청구할 수 있고, 앞서 본 묵시적 승낙 주장과 예비적으로 함께 내세울 수 있습니다.
계약이 서지 않았다면 청구할 수 있는 것은 약정 대금과 이윤이 아니라, 교섭 파기가 위법할 때의 신뢰손해나 발주자가 실제로 얻은 이익의 반환이다.
회신 전후 실무 유의점 — 해외 거래처라면 결론이 갈리는 지점
조건을 고쳐 회신해야 한다면 그 회신이 수정 제안임을 문서에 분명히 적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아래 단가와 납기로 조정한 안을 제안드리며, 귀사의 확정 회신을 받은 때 계약이 성립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처럼 쓰고 회신 기한을 함께 적어 두면, 승낙기간이 정해진 청약이 되어 기한이 지나면 효력이 사라집니다(제528조 제1항). 확정 회신을 받기 전에 원자재를 선발주하거나 제작에 들어가는 것은 발주자가 거절하면 그 비용을 회수하기 어려운 위험을 스스로 지는 일입니다. 부득이 먼저 착수해야 한다면 계약이 성립하지 않더라도 착수 비용은 발주자가 부담한다는 서면 합의를 먼저 받아 두는 편이 안전합니다.
변경 회신을 받은 발주자는 수락하든 거절하든 서면으로 지체 없이 밝혀 두어야 합니다. 상시 거래 상대라면 상법 제53조의 승낙 간주를 막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물품이 도착했을 때는 검수서나 입고 확인서에 "발주서 조건 기준 수령, 변경 조건 미승낙"처럼 이의 문구를 남겨 묵시적 승낙 주장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변경 조건을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그 뜻을 명확히 회신해 성립 시점과 내용을 확정해 두는 편이 나중의 다툼을 줄입니다.
해외 거래처와의 발주라면 결론을 국내법만으로 정할 수 없습니다. 영업소가 서로 다른 협약 가입국에 있는 당사자 사이의 물품매매에는 당사자가 배제하지 않는 한 국제물품매매계약에 관한 국제연합 협약이 적용되고, 그 제19조는 승낙에 추가나 변경이 있으면 청약의 거절이면서 반대청약이 된다고 정합니다. 대금, 대금지급, 물품의 품질과 수량, 인도의 장소와 시기에 관한 변경은 청약 조건을 실질적으로 변경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어, 단가와 납기를 고친 회신은 협약에서도 반대청약이 되고 이 글의 결론과 같습니다. 반면 청약 조건을 실질적으로 변경하지 않는 사소한 변경은 청약자가 부당한 지체 없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한 변경된 조건으로 계약이 성립하는 구조라 국내법과 결과가 갈립니다. 그래서 해외 거래처와 주고받는 발주서에서는 협약 적용을 배제하는 조항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회신은 수정 제안임을 밝히고 확정 회신을 받은 뒤 착수하며, 받은 쪽은 지체 없이 수락·거절을 통지하고 수령 시 이의를 남겨야 한다.
자주 묻는 질문
Q. 회신에서 "단가만 조금 조정 부탁드립니다"라고 했는데도 새 청약이 되나요?
A. 문장 자체보다 승낙을 확정했는지, 조정을 조건으로 걸었는지가 기준입니다. "이 단가가 아니면 진행이 어렵다"는 취지라면 조건을 붙인 회신이므로 민법 제534조에 따라 새 청약이 됩니다. 반대로 발주서대로 진행하겠다고 확정한 뒤 조정을 부탁만 했다면 희망사항 표시로 해석됩니다. 단가는 계약의 핵심 조건이므로 애매한 표현으로 회신하는 것 자체를 피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Q. 변경 회신을 보낸 뒤 발주자가 답이 없는데 먼저 제작을 시작해도 되나요?
A. 확정 회신이 없는 동안에는 계약이 성립하지 않은 상태라, 그사이 들어간 제작비는 발주자가 거절하면 돌려받기 어렵습니다. 신뢰손해 배상은 발주자가 계약이 확실하다는 기대를 준 사실이 있어야 인정되는데, 무응답은 그 사실이 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만 상시 거래 상대라면 발주자의 무응답이 상법 제53조에 따른 승낙 간주가 되는지를 따져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착수 전에 서면으로 확정 회신을 받아 두는 것이 가장 확실합니다.
Q. 발주자가 변경 회신을 무시하고 원래 발주서대로 납품하라고 독촉하면 따라야 하나요?
A. 변경 회신으로 종전 발주서는 실효되었으므로, 발주서만으로는 원래 조건대로 납품할 계약상 의무가 생기지 않습니다. 발주자의 독촉은 원래 조건으로 계약하자는 새 청약에 해당하고, 수급자가 승낙해야 계약이 섭니다. 다만 두 회사 사이에 기본거래계약이 있고 발주·변경 절차에 관한 조항이 있다면 그 조항이 우선하므로 계약서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Q. 변경한 단가로 납품했는데 발주자가 받아가고 대금은 원래 단가로만 준다면요?
A. 발주자가 변경된 조건을 알면서 이의 없이 물품을 수령해 사용했다면, 묵시적 승낙으로 변경 단가의 계약이 성립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발주자가 수령 시 원래 단가 기준으로만 정산하겠다는 이의를 남겼다면 승낙으로 보기 어렵고, 이 경우에는 발주자가 얻은 이익의 반환을 구하는 부당이득 청구를 검토하게 됩니다. 변경 회신의 도달 기록과 검수·입고 자료가 승패를 가르므로 미리 확보해 두어야 합니다.
Q. 발주서에 "회신이 없으면 발주서 조건에 동의한 것으로 봄"이라고 적혀 있으면 어떻게 되나요?
A. 청약자가 일방적으로 적은 문구만으로 상대방의 침묵을 승낙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법리입니다. 두 회사가 기본거래계약에서 그런 조항에 미리 합의했다면 그 조항이 효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이 문구가 있어도 조건을 고쳐 회신했다면 그 회신에는 제534조가 적용되어 새 청약이 되고 발주서는 실효됩니다. 결국 문구가 사전 합의에 근거했는지가 관건입니다.
Q. 해외 거래처와 주고받은 발주서도 같은 결론인가요?
A. 단가와 납기를 고친 회신은 국제물품매매계약에 관한 국제연합 협약 제19조에서도 청약 조건의 실질적 변경으로 규정되어 반대청약이 됩니다. 결론은 같아도 근거가 국내 민법이 아니라 협약이라는 점이 다르고, 협약은 영업소가 서로 다른 가입국의 당사자 사이 물품매매에 적용되되 당사자가 배제할 수 있습니다. 포장이나 통지 방법 같은 부수 조건은 결과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해외 발주서에서는 협약 배제 조항과 준거법 조항을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맺음말
발주서의 단가와 납기를 고쳐 회신하면 그 회신은 승낙이 아니라 새 청약이고, 종전 발주서는 실효됩니다(민법 제534조, 대법원 2000다17834 판결). 이후 계약이 서려면 발주자의 명시적 승낙, 상법 제53조에 따른 승낙 간주, 발주자 측 이행 행위에서 드러나는 묵시적 승낙 가운데 하나가 있어야 합니다. 이 세 경로가 모두 없다면 계약은 불성립이고, 이미 들어간 비용은 신뢰손해나 부당이득의 요건을 따로 갖춰야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실무에서는 회신 문서 한 장이 발주 관계 전체의 법적 지위를 바꿔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신하는 쪽은 수정 제안임을 밝히고 확정 회신을 받은 뒤 착수하고, 받은 쪽은 지체 없이 수락이나 거절을 통지하며 수령할 때 이의를 남겨야 합니다. 시흥 시화·정왕 공단처럼 납품 거래가 이어지는 지역에서 사업을 하신다면, 변경 회신이 오간 시점부터 계약이 성립했는지를 함께 점검해 보시길 권합니다.
조력이 필요하시면 강대현 대표변호사에게 연락주십시오. 신속히 도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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