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만으로는 끝나지 않습니다
퇴사한 직원이 채 몇 주도 지나지 않아, 걸어서 오갈 수 있는 거리에 같은 업종 간판을 올렸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가 있습니다. 인사 담당자라면 한 번쯤 마주치는 상황입니다. 계약서 서랍을 열어 경업금지 조항을 다시 확인하고, "이걸로 막을 수 있겠다"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먼저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서명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효력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이전에, 애초에 금지 의무 자체가 발생했는지부터 다투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무는 애초에 발생했는가
대법원은 퇴직 후 전직이 금지되는 의무를 인정하려면 그러한 의무를 명시적으로 부과하는 규정이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하고, 위반 시 퇴직금을 반환하겠다는 취지의 각서만으로는 전직을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규정이 없어 경업금지의무가 부과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실무에서 흔히 쓰이는 "위반 시 반환한다" 형태의 문구는 그 자체로 경업을 금지하는 규정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의무 발생이 확인되더라도, 대법원은 경업금지약정이 근로자의 직업선택의 자유와 근로권 등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경우 민법 제103조에 따라 무효라고 보고, 보호할 가치 있는 회사의 이익(고객관계·영업상 신용 포함), 근로자의 퇴직 전 지위, 제한 기간·지역 및 대상 직종, 대가의 제공 여부, 퇴직 경위, 공공의 이익이라는 여섯 가지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합니다.
이 여섯 가지 사정은 회사가 직접 주장·증명해야 합니다. 실제로 법원은 보호할 가치 있는 이익의 존재, 적정한 대가 지급, 공공이익 침해 여부, 영업비밀 침해 위험성이라는 네 항목 모두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약정을 무효로 판단한 사례가 있습니다. 약정서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회사에 유리하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효보다 제한해석이 먼저입니다
문언대로는 과도해 보이는 약정이라도, 법원은 곧바로 무효로 처리하기보다 회사의 영업비밀과 근로자의 직업선택 자유를 비교형량해 합리적 범위 내로 제한 해석하는 방법을 먼저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무상 유효하다고 인정되는 기간은 통상 6개월에서 3년 사이이고, 1년 정도를 인정한 사례가 가장 많습니다.
약정이 무효이거나 없는 경우에도 부정경쟁방지법에 따른 전직금지 청구 경로가 남아 있습니다. 다만 이 경로의 금지기간은 퇴직일이 아니라 영업비밀 취급 업무에서 실제로 이탈한 시점을 기준으로 산정되므로, 회사가 예상한 기간보다 짧아질 수 있습니다. 한편 퇴사자가 본인 명의가 아닌 배우자나 제3자 명의로 사업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며 동종 영업을 하는 경우도 약정 위반으로 인정되고, 그 회사까지 의무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대가는 별도로 특정돼야 합니다
여섯 가지 요소를 순서대로 대조해야 합니다. 대가는 급여에 포함되어 있었다거나 퇴직자 처우 프로그램이 있었다는 주장만으로는 부족하고, 해당 근로자에게 실제로 적용된 별도 명목·별도 금액으로 특정되어야 인정됩니다. 위반 시 전액 반환을 정한 위약금 조항은 위약벌인지 손해배상 예정인지, 금액이 과도한지가 별도로 다투어질 수 있는 지점이고, 근로기준법 제20조와의 관계도 함께 검토 대상입니다. 영업비밀을 지득할 수 있는 지위에 있던 근로자에 대한 경업금지는 정면으로 유효하다고 인정되어 온 사안도 있으므로, 모든 경업금지 조항이 무효로 귀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약정서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약정이 실제로 효력을 갖는다는 것은 별개입니다. 계약서에 더해 대가 지급 내역, 비밀관리 이력까지 갖추어져야 실제 대응이 가능합니다.
계약서보다 먼저 볼 것
경업금지 약정의 효력은 계약서 문구만으로 단정할 수 없고, 의무 발생 여부부터 여섯 가지 사정과 입증책임 구조까지 함께 따져야 결론이 나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법률 검토가 필요합니다. 각서에 금지 규정이 명시되어 있는지 불분명한 경우, 대가 지급 여부가 불분명한 경우, 개업 명의와 실질 운영자가 다른 경우입니다. 사안에 따라 대응 방식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구체적인 검토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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