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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강제추행 등

선의가 강제추행죄가 된날 

유수빈 변호사

무죄

기억나지 않는 밤, 그 빈칸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회식 후 강제추행 혐의, 교육이수조건부 기소유예까지

군 간부 강제추행 사건, 검사 출신 변호사가 직접 겪은 이야기

"변호사님, 저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그가 내 앞에서 처음 꺼낸 말이었다.

목소리는 떨렸고, 문장 끝이 흐려졌다.

기억이 없다는 말은 변명처럼 들리기 쉽지만, 그의 얼굴에는 변명보다 두려움이 더 크게 담겨 있었다.

그는 20대 초반의 A씨였다.

군 간부로 복무하고 있었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지 얼마 되지 않은 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같은 부대 선임으로부터 강제추행 혐의를 받게 되어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사건의 시작은 부대 회식이었다.

동료들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노래방까지 자리가 이어졌다.

A씨는 그날 술을 상당히 많이 마셨다.

다음 날 아침, 같은 부대 선임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날 밤 신체 접촉이 있었다는 항의였다.

A씨는 그 순간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선임이 아무 이유 없이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리고 얼마 뒤, 강제추행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기억의 빈칸은 "모른다"로 채워지지 않는다

나는 A씨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기억이 없다는 건 그 밤이 백지로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수사기관은 그 백지를 비워두지 않아요.

피해자 진술, 함께 있던 사람들의 진술, 당시 정황으로 그 빈칸을 채웁니다.

A씨가 채우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의 기록으로 채워지는 겁니다."

"기억이 안 나니까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하는 것은 가장 위험한 대응이다.

기억이 없다는 사실이 곧 혐의가 없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형법 제298조 (강제추행)】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강제추행죄는 법정형이 가볍지 않은 범죄다.

또한 현재 강제추행죄는 친고죄가 아니다. 피해자와 합의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사건이 자동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합의는 수사기관과 법원이 처분과 형을 정할 때 참작하는 중요한 사정이지만, 사건을 없애주는 열쇠는 아니다.

다툴 사건인가, 선처를 구할 사건인가

강제추행 사건을 처음 맡으면 나는 가장 먼저 갈림길을 확인한다.

이 사건이 사실관계를 다퉈야 하는 사건인지, 아니면 책임을 인정하고 선처를 구해야 하는 사건인지다.

이 갈림길에서 방향을 잘못 잡으면 이후의 모든 노력이 엇나간다.

A씨의 사건에서는 피해자의 진술이 구체적이었고, 당시 정황도 그 진술과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A씨 스스로도 기억이 없을 뿐,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면으로 부인하기보다 진정한 반성과 피해 회복에 집중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A씨는 조사 과정에서 이런 태도를 끝까지 유지했다.

"제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상대방이 그렇게 느꼈다면 제 잘못을 무겁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검사 시절 수많은 사건 기록을 보며 알게 된 것이 있다.

피해자를 탓하거나 "술 때문이었다"고만 말하는 피의자의 진술은 반성으로 읽히지 않는다.

술을 마신 것도 결국 본인의 선택이었다. 그 선택 이후의 결과까지 책임지겠다는 태도가 기록에 남아야 한다.

직접 건네는 사과가 두 번째 상처가 될 수 있다

기소유예를 기대하려면 피해 회복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사건에서는 형사조정 절차를 통해 피해자와 정식으로 합의를 진행했다.

A씨는 처음에 선임에게 직접 찾아가 다시 사과하고 싶어 했다.

나는 그것을 막았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반복해서 사과 메시지를 보내거나 만나자고 요청하면, 피해자에게는 그것이 압박으로 느껴질 수 있다.

진심에서 나온 사과라도 2차 피해나 합의 강요로 오해받을 수 있다.

더구나 같은 부대라는 관계는 그 부담을 더 크게 만든다.

그래서 모든 절차는 변호인을 통해, 형사조정이라는 공식 절차 안에서 진행했다.

결국 피해자는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 의사표시는 검찰이 처분을 결정할 때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합의서 한 장이 곧 기소유예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합의 이후에도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반성문 한 장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보여줘야 한다

【형사소송법 제247조 (기소편의주의)】

검사는 「형법」 제51조의 사항을 참작하여 공소를 제기하지 아니할 수 있다.

【형법 제51조 (양형의 조건)】

형을 정함에 있어서는 다음 사항을 참작하여야 한다.

  1. 범인의 연령, 성행, 지능과 환경

  2. 피해자에 대한 관계

  3. 범행의 동기, 수단과 결과

  4. 범행 후의 정황

기소유예는 검사가 이 사정들을 종합해 "이 사람은 재판에 넘기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할 때 내려지는 처분이다.

그러니 검사에게 보여줘야 할 것은 사건 하나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 전체다.

나는 A씨와 함께 자료를 하나씩 정리했다.

A씨가 초범이라는 점, 평소 성실하게 생활해 왔다는 점을 담았다.

가족과 동료들이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모았다.

향후 자영업을 준비하며 사회에서 다시 건실하게 살아가려는 계획도 정리했다.

반성문, 탄원서, 생활기록, 상장, 가족관계 자료, 인생계획서를 따로따로 내지 않았다.

하나의 흐름으로 묶었다.

그 흐름이 말하고자 한 것은 단 하나였다.

"이 사람은 처벌보다 교육과 교정으로 충분히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다."

양형 자료는 많이 내는 것보다 사건의 방향에 맞게 엮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검찰의 판단은 "교육이수조건부 기소유예"였다

검찰은 A씨가 초범이고, 잘못을 인정하며 반성하고 있으며, 피해자와 합의가 이루어진 점을 고려했다.

피해 정도가 비교적 중하지 않았다는 점, 성폭력 재범방지교육을 성실히 이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점도 함께 반영되었다.

그 결과 A씨는 교육이수조건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사건은 정식 재판으로 넘어가지 않았고, 형의 선고도 없었다.

그러나 이 결과는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첫 조사에서의 진술 방향, 공식 절차를 통한 피해자와의 합의, 방향에 맞게 정리한 반성 자료, 그리고 구체적인 재범 방지 계획이 맞물렸기에 가능했다.

그 밤의 빈칸은 A씨가 사건 이후 보여준 태도와 노력으로 채워진 것이다.

강제추행 혐의를 받고 있다면, 이것부터 확인하라

① 첫 조사 전에 반드시 변호사와 사건의 방향을 정하라.

다툴 사건인지, 선처를 구할 사건인지에 따라 첫 진술이 완전히 달라진다.

첫 진술은 이후 모든 판단의 기준점이 된다.

② 기억이 없다면 "모른다"로만 버티지 마라.

기억이 없다는 말은 무혐의를 뜻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 부분과 인정할 부분을 구분해 신중하게 진술해야 한다.

③ 피해자에게 직접 연락하지 마라.

반복적인 사과 메시지나 만남 요청은 2차 피해나 합의 강요로 오해받을 수 있다.

합의는 변호인을 통해, 형사조정 등 공식 절차 안에서 진행하는 것이 안전하다.

④ 형사처분 이후의 신분상 불이익까지 함께 준비하라.

군인, 공무원, 교사처럼 신분이 중요한 직업이라면 형사처분과 별도로 징계 절차가 진행될 수 있다.

기소유예를 받았다고 해서 징계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므로, 처음부터 두 절차를 함께 보고 대응해야 한다.

술은 기억을 지우지만, 책임까지 지우지는 않는다

처분 결과를 전해 들은 날, A씨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날 밤은 끝내 기억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뒤로 제가 한 일은 평생 기억할 것 같습니다."

나는 그 말이 이 사건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기억나지 않는 밤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그러나 그 밤의 빈칸을 부인과 침묵으로 남겨둘지, 책임과 회복으로 채울지는 온전히 본인의 선택이다.

A씨는 후자를 택했고, 그 선택이 그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었다.

강제추행 혐의로 조사 연락을 받았다면, 혼자 판단하지 말고 첫 조사 전에 대응 방향부터 신중하게 점검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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