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로 고소를 당한 피의자나 그 가족들은 검찰의 형사조정 제도를 이용해 피해자와 원만히 합의하면 사건이 조용히 마무리될 것이라 기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범죄는 애초에 형사조정에 회부될 수 있는 사건 범위 자체에 들어가지 않아, 검찰에 조정을 신청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형사조정이 막혀 있다고 해서 합의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형사조정을 거치지 않는 별도의 합의 경로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성범죄가 형사조정 대상에서 제외되는 법적 근거와, 검찰 조정 대신 실제로 밟아야 하는 합의 절차를 살펴보겠습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형사조정 제도란 — 대상 사건이 법령으로 열거되어 있다
형사조정은 검사가 피의자와 범죄피해자 사이의 형사분쟁을 공정하고 원만하게 해결해 피해자가 입은 피해를 실질적으로 회복시킬 필요가 있다고 인정할 때, 당사자의 신청이나 검사의 직권으로 사건을 형사조정위원회에 회부하는 절차입니다. 범죄피해자 보호법 제41조가 그 근거 규정이고, 형사조정에 회부할 수 있는 사건의 구체적 범위는 같은 조 제2항에 따라 범죄피해자 보호법 시행령 제46조가 정합니다.
그런데 이 시행령 조문은 "웬만한 형사사건은 다 조정 대상"이라는 식으로 포괄적으로 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정에 회부할 수 있는 사건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차용금·공사대금·투자금 등 개인 간 금전거래에서 비롯된 사기·횡령·배임 등 재산범죄 고소사건, 개인 간 명예훼손·모욕·경계 침범·지식재산권 침해·임금체불 등 사적 분쟁 고소사건, 그리고 이에 준하는 것으로 검사가 판단한 사건이 그 전부입니다. 성범죄는 이 열거 항목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사기·횡령·배임 등 개인 간 금전거래에서 비롯된 재산범죄 고소사건
명예훼손·모욕·경계 침범·지식재산권 침해·임금체불 등 개인 간 사적 분쟁 고소사건
위 항목에 준하는 것으로 검사가 분쟁 해결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고소사건
형사조정은 아무 형사사건에나 적용되는 절차가 아니라, 개인 간 사적 분쟁 성격이 짙은 재산범죄·명예훼손류 사건으로 대상 자체가 법령상 한정되어 있다.
성범죄가 형사조정에서 빠지는 이유 — 사적 분쟁이 아닌 국가형벌권의 문제
형사조정 대상이 열거주의로 짜여 있는 이유는 이 제도가 원래 개인 간 채권채무나 명예 다툼처럼, 당사자끼리 금전이나 관계 조정을 통해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분쟁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범죄는 성립 자체가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중대 범죄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사적 이해관계 조율로 성격이 바뀌는 사안이 아닙니다. 재산범죄나 명예훼손처럼 손해를 금전으로 환산해 조정 테이블에 올릴 수 있는 구조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절차적으로도 형사조정은 위원회 기일에 당사자나 그 대리인이 함께 참석해 대면하거나, 서로의 연락처·주소 등 인적사항이 상대방 측에 전달될 여지가 있는 구조입니다. 성범죄 피해자에게는 이 과정 자체가 2차 피해나 보복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같은 이유로 검찰은 가정폭력범죄, 아동학대범죄처럼 피해자 보호가 특별히 필요한 사건도 원칙적으로 형사조정에 회부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범죄가 시행령의 열거 항목에서 처음부터 빠져 있는 것은 이런 제도 설계의 결과입니다.
형사조정이 안 된다고 처벌이 자동 확정되는 것도, 합의가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여기서 흔히 생기는 오해가 하나 더 있습니다. 형사조정 대상이 아니니 합의를 시도해도 소용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과거 형법 제306조는 강간·강제추행 등을 친고죄 또는 반의사불벌죄로 규정해, 피해자의 고소나 처벌 의사가 없으면 공소 자체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문은 2013년 개정으로 삭제되어, 현재 형법 제297조(강간, 3년 이상의 유기징역)와 제298조(강제추행,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 등 대부분의 성범죄는 피해자의 처벌불원 의사와 무관하게 수사·기소가 진행되는 비친고죄입니다.
즉 합의는 고소를 취소시켜 수사를 멈추는 열쇠가 아니라, 검사의 기소 여부 판단이나 법원의 양형 판단 단계에서 실질적 피해 회복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유리한 정상 자료로 작용합니다. 형사조정이라는 공식 창구가 막혀 있을 뿐, 당사자 간 합의 자체와 그 합의가 갖는 법적 의미는 그대로 살아 있다는 점을 구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합의를 형사조정 없이 어떤 경로로, 어떤 방식으로 안전하게 진행하느냐입니다.
형사조정 없이 합의를 진행하는 법 — 변호인을 통한 접촉이 원칙
형사조정위원회가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으므로, 성범죄 사건의 합의는 피의자·피고인 측 변호인이 피해자 측을 통해 개별적으로 접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때 피의자나 그 가족이 피해자에게 직접 연락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반복적인 연락이나 접근은 그 자체로 별도의 협박·강요 사건으로 번질 수 있고, 재판부에는 진정한 반성이 아니라 피해자를 압박해 합의를 얻어내려 한 정황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국선변호사가 선정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 합의 의사 타진과 협상은 피해자의 변호사를 통해서만 진행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국선변호사가 없다면 검찰이나 법원의 피해자 지원 창구를 통해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합의서에는 합의금액, 처벌불원 의사표시, 향후 접촉금지 약속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법원이 실질적 피해 회복으로 인정할 근거가 됩니다.
피해자에 대한 직접 연락·방문·문자 등은 시도하지 말 것.
피해자 측 국선변호사나 검찰·법원의 피해자 지원 절차를 통해 의사를 먼저 확인.
합의서에는 합의금액·처벌불원 의사·접촉금지 약속을 구체적으로 기재.
피해자 연락처를 몰라도 합의금을 전달하는 법 — 형사공탁 특례
합의 의사가 있어도 피해자가 연락 자체를 거부하거나 연락처를 알 수 없다면 합의금을 전달할 방법이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가 공탁법 제5조의2의 형사공탁 특례입니다. 이 조항에 따르면 피고인이 법령상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알 수 없는 경우, 그 형사사건이 계속 중인 법원 소재지의 공탁소에 변제공탁을 할 수 있습니다. 공탁서에는 피해자의 이름·주소 대신 사건이 계속 중인 법원, 사건번호, 사건명 등 피해자를 특정할 수 있는 명칭을 적는 것으로 갈음할 수 있습니다.
공탁을 마치면 공탁관이 인터넷 홈페이지 등에 관련 사항을 공고하는 방법으로 피해자에 대한 통지를 갈음할 수 있어, 피해자의 실제 인적사항이 피고인 측에 노출될 위험 없이 절차가 진행됩니다. 다만 형사공탁은 피해자가 실제로 그 돈을 수령해야 온전한 합의로 평가되는 것은 아니며, 피해자가 공탁금을 찾아가지 않더라도 법원은 피고인이 피해 회복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별도로 평가합니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의 일방적 공탁은 쌍방 합의만큼의 감경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점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형사공탁 특례는 피해자 신원을 가해자 측에 노출시키지 않으면서도 피해 회복 노력을 법원에 보여줄 수 있도록 만든, 형사조정을 대신하는 실질적인 창구다.
합의 시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 수사단계·1심·항소심
같은 합의라도 이루어지는 시점에 따라 무게가 다릅니다. 수사 단계에서 이른 시일 내 합의가 이루어지면 검사가 기소 여부를 판단할 때 기소유예 처분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미 기소되어 재판이 진행 중이라면 1심 선고 전 합의는 집행유예나 선고유예를 포함해 형량을 정하는 데 가장 큰 폭으로 반영되는 감경 요소 중 하나로 다뤄집니다.
항소심 단계에서 뒤늦게 합의가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감경 요소로 고려되기는 하지만, 1심에서 이미 형량이 정해진 뒤이므로 그 폭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항소심 합의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며, 양형기준상 실질적 피해 회복 여부는 각 심급마다 별도로 평가되는 대표적인 감경 인자이므로, 어느 단계에 있든 진행 가능한 시점에 시도할 가치가 있습니다.
실무 유의점 — 무리한 합의 시도가 오히려 불리해지는 경우
합의를 서두르려는 마음에 피해자나 그 가족에게 반복적으로 연락하거나, 제3자를 동원해 압박성 발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행위는 별도의 협박죄·강요죄로 추가 입건될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재판부에 진지한 반성이 아니라 피해자를 회유해 처벌을 면하려는 태도로 비쳐 오히려 양형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합의는 어디까지나 피해자 측이 응할 의사가 있을 때 변호인을 통해 진행되는 것이지, 밀어붙여서 받아내는 절차가 아닙니다.
합의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이때는 형사공탁으로 피해 회복 노력을 보여주는 한편, 진술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재범 방지를 위한 구체적 조치(상담·치료 이력 등)를 자료로 준비해 재판에 성실히 임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응입니다. 합의 여부와 별개로 사건의 사실관계와 법적 쟁점을 정리하는 작업은 초기 단계부터 병행해야 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성범죄 사건인데 검찰에 형사조정을 신청하면 받아들여지나요?
A. 원칙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형사조정에 회부할 수 있는 사건은 범죄피해자 보호법 시행령 제46조가 재산범죄·명예훼손 등 사적 분쟁 유형으로 열거해두었고, 성범죄는 그 열거 항목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Q. 형사조정이 안 된다면 합의 자체가 불가능한 것인가요?
A. 아닙니다. 형사조정이라는 공식 절차만 이용할 수 없을 뿐이고, 변호인을 통한 개별 합의와 그에 따른 양형상 이익은 그대로 존재합니다. 다만 접촉 경로와 절차를 신중하게 밟아야 합니다.
Q. 피해자에게 직접 연락해서 합의를 시도해도 되나요?
A. 권하지 않습니다. 직접적이고 반복적인 연락은 별도의 협박·강요 문제로 번질 수 있고, 재판부에는 피해자를 압박한 정황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피해자 측 변호사나 검찰·법원의 지원 절차를 통해야 합니다.
Q. 피해자 연락처를 몰라 합의금을 전달할 방법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요?
A. 공탁법 제5조의2에 따른 형사공탁 특례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피해자의 인적사항 대신 사건번호 등을 기재해 법원 소재지 공탁소에 공탁하면, 피해자 신원을 노출하지 않고도 피해 회복 노력을 남길 수 있습니다.
Q. 합의하면 처벌을 완전히 피할 수 있나요?
A. 대부분의 성범죄는 친고죄가 폐지되어 피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수사·기소가 진행되는 비친고죄이므로, 합의만으로 공소권이 소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실질적 피해 회복으로 인정되어 기소 여부와 양형에 유리하게 반영될 수 있습니다.
Q. 1심에서 합의를 못 했는데 항소심에서 뒤늦게 합의해도 의미가 있나요?
A.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1심에서 이미 형이 정해진 뒤라 감경 폭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경향이 있을 뿐, 실질적 피해 회복 여부는 각 심급에서 별도로 평가되는 요소이므로 시도할 가치가 있습니다.
맺음말
성범죄는 형사조정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른 채 검찰의 조정 절차만 기다리다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형사조정이라는 창구가 없다고 해서 합의의 길 자체가 막힌 것은 아니며, 변호인을 통한 접촉과 형사공탁 특례라는 별도의 경로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다만 성범죄는 피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수사·기소가 이루어지는 비친고죄인 만큼, 합의를 처벌을 피하는 수단이 아니라 실질적 피해 회복의 증거로 접근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수원지검 관할 사건을 비롯해 경기남부 지역에서 성범죄 고소를 당한 경우, 어느 단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합의를 시도할지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접촉 방식 하나로 오히려 불리한 정황이 추가될 수 있는 만큼, 합의를 진행하기 전에 절차부터 정확히 점검해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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