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의 소멸시효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오히려 채무자로부터 소장을 먼저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채무자가 시효완성을 노려 채무부존재확인의 소나 청구이의의 소를 먼저 걸어오는 것입니다. 이때 채권자가 그저 소송에 끌려다니며 소극적으로 방어만 하면 시효는 그대로 완성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판례는 이런 상황에서 피고로서 응소하는 행위 자체도 시효를 중단시키는 재판상 청구가 될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이 글에서는 응소가 어떤 요건 아래에서 시효중단 효력을 갖는지, 그 효력이 정확히 언제부터 발생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재판상 청구란 무엇인가 — 원고만의 무기가 아니다
민법 제168조 제1호는 소멸시효의 중단사유 중 하나로 '청구'를 규정하고, 제170조 제1항은 그중에서도 재판상의 청구가 시효를 중단시킨다고 정합니다. 여기서 재판상 청구를 흔히 채권자가 원고가 되어 소를 제기하는 모습으로만 떠올리기 쉽습니다. 소장을 접수하고 그것이 상대방에게 송달되면 그 시점에 시효가 멈춘다는 구조는 실무에서도 가장 많이 쓰이는 시효중단 방법입니다.
그러나 소멸시효 제도의 취지를 생각하면 반드시 원고의 소제기만이 재판상 청구인 것은 아닙니다. 시효제도는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으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는데, 소송에서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다투는 사람은 결코 권리 위에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관점에서 판례는 원고의 소제기 외에도 시효를 중단시킬 수 있는 별도의 국면을 인정해 왔고, 그중 하나가 바로 다음 항목에서 살펴볼 응소행위입니다.
청구 — 재판상 청구(소제기), 최고 등으로 이행을 요구하는 행위.
압류·가압류·가처분 — 강제집행이나 보전처분을 통해 권리를 실현하려는 행위.
승인 — 채무자가 채무의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
소멸시효 제도는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으려는 데 취지가 있으므로, 소송에서 적극적으로 권리를 다투는 사람에게까지 시효완성의 불이익을 줄 이유는 없다.
응소도 재판상 청구다 — 92다47861 전원합의체 판결의 법리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것이 대법원 1993. 12. 21. 선고 92다47861 전원합의체 판결입니다. 이 사건은 채무자가 채권자를 상대로 채무부존재확인의 소를 제기하자, 채권자가 피고로 응소해 대여금 채권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적극적으로 다툰 사안이었습니다. 대법원은 민법 제168조 제1호, 제170조 제1항이 정한 재판상 청구에는 권리자가 원고가 되어 소송물인 권리를 주장하는 경우뿐 아니라, 시효를 주장하는 자가 원고가 되어 소를 제기한 데 대해 피고로서 응소하여 그 소송에서 적극적으로 권리를 주장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진 경우도 포함된다고 판시했습니다.
이 전원합의체 판결이 갖는 의미는 명확합니다. 재판상 청구를 오로지 원고의 소제기 행위로만 좁게 해석하면, 채무자가 먼저 소를 걸어와 채권자를 피고 자리에 세우는 것만으로 채권자의 시효중단 수단을 봉쇄해 버리는 결과가 생길 수 있습니다. 대법원은 이런 불합리를 막기 위해 응소도 재판상 청구의 한 유형으로 끌어안은 것이고, 이후 이 법리는 여러 후속 판결을 통해 요건과 효력발생시점이 구체화되며 실무에 정착했습니다.
시효를 주장하는 자가 원고가 되어 소를 제기한 데 대해 피고로서 응소하여 그 소송에서 적극적으로 권리를 주장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진 경우도 재판상 청구에 해당한다 — 대법원 92다47861 전원합의체 판결.
응소로 시효를 중단시키기 위한 두 가지 요건
다만 응소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곧바로 시효중단 효력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판례가 요구하는 첫 번째 요건은 적극적인 권리주장입니다. 단순히 답변서에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는 취지만 적어 원고 주장을 소극적으로 부인하는 정도로는 부족하고, 자신에게 그 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관계를 구체적으로 내세워 다투어야 합니다. 예컨대 채무부존재확인소송에서 채권자가 단순히 "채무가 존재한다"고 짧게 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여 일자·금액·변제약정·미변제 사실 등을 구체적으로 주장해야 이 요건을 충족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요건은 그 권리주장이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채권자가 아무리 적극적으로 권리를 주장했더라도 법원이 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채권자가 패소한다면 응소로 인한 시효중단 효력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즉 응소에 의한 시효중단은 사후적으로 그 소송의 결과를 지켜봐야 확정되는 구조입니다. 이 두 요건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함께 충족되어야 하므로, 답변서·준비서면 작성 단계에서부터 승소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권리관계를 촘촘하게 정리해 제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건 1 — 단순 부인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구체적 사실관계로 적극 주장할 것.
요건 2 — 그 권리주장이 해당 소송에서 받아들여질 것(패소하면 중단효 불인정).
참고 — 채무자가 반드시 소멸시효 완성을 원인으로 소를 제기한 경우가 아니어도 무방.
응소로 시효를 중단시키려면 소극적으로 청구기각만 구해서는 안 되고,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그 주장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중단의 효력이 발생하는 시점 — 판결 확정일이 아니다
응소로 시효중단이 인정된다면 그 효력은 언제부터 생기는 것일까요. 대법원 2010. 8. 26. 선고 2008다42416, 42423 판결은 이 지점을 명확히 정리했습니다. 이 판결은 응소행위로 인한 시효중단의 효력은 피고가 현실적으로 권리를 행사하여 응소한 때에 발생한다고 판시했습니다. 소송이 확정되기까지 수년이 걸리더라도, 최종 판결이 선고·확정된 시점이 아니라 채권자가 답변서나 준비서면을 통해 실제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 시점을 기준으로 시효중단 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이 판시가 실무에 주는 함의는 큽니다. 소멸시효 완성이 임박한 시점에 소장을 송달받았더라도, 그 즉시 답변서에서 적극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면 그 시점에 시효 진행이 멈춥니다. 반대로 응소는 했지만 별다른 실질적 주장 없이 시일을 끌다가 뒤늦게 권리주장을 담은 준비서면을 낸다면, 시효중단의 기준시점도 그만큼 늦춰질 수 있습니다. 결국 소장을 받은 직후 첫 답변서를 어떻게 구성하느냐가 시효중단 시점을 좌우하는 셈입니다.
소가 각하·취하돼도 구제받는 길 — 민법 제170조 제2항의 유추적용
민법 제170조 제1항은 재판상 청구라도 소송이 각하·기각·취하되면 원칙적으로 시효중단의 효력이 없다고 정합니다. 그렇다면 채권자가 열심히 응소해 권리를 주장했는데, 그 소송이 관할위반이나 소취하 등의 사유로 본안 판단 없이 끝나버리면 응소의 노력이 전부 물거품이 되는 것일까요. 대법원 2008다42416 판결은 이 경우에도 구제의 길을 열어두었습니다. 응소해 권리를 주장했으나 소가 각하되거나 취하되는 등으로 본안에서 그 권리주장에 관한 판단 없이 소송이 종료된 경우, 민법 제170조 제2항을 유추적용해 그때부터 6개월 이내에 재판상 청구 등 다른 시효중단 조치를 취하면 최초 응소 시로 소급해 시효중단 효력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이 유추적용은 응소한 채권자를 원고와 동등하게 보호하려는 취지입니다. 원고가 소를 제기했다가 각하·취하되어도 6개월 내 재소하면 최초 소제기 시로 소급해 시효중단이 유지되는데, 이미 적극적으로 권리를 다툰 응소인에게만 이 구제수단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형평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소급효는 6개월이라는 기간을 넘기면 인정되지 않으므로, 응소했던 소송이 본안 판단 없이 종료되었다면 그 사실을 확인한 즉시 별도의 소제기나 압류·가압류 등 조치를 서둘러야 합니다.
응소한 소송이 각하·취하 등으로 본안 판단 없이 종료된 경우가 대상.
종료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재판상 청구·압류·가압류·가처분 중 하나를 취해야 함.
기간 내 조치하면 최초 응소 시점으로 소급해 시효중단 효력 인정.
실무에서 자주 나타나는 장면 — 채무부존재확인소송에 응소하는 경우
실제로 이 법리가 문제 되는 전형적인 장면은 대여금 채권을 둘러싼 다툼입니다. 채무자 B가 소멸시효 완성이 임박했거나 이미 완성됐다고 보고 채권자 A를 상대로 채무부존재확인의 소를 제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A가 그저 소송을 지켜보기만 하거나 형식적인 답변서만 내고 만다면, B가 승소해 채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인판결이 확정되고 A는 시효중단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채권을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A가 답변서 단계에서부터 대여 일자와 금액, 변제기 약정, B가 아직 갚지 않았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증거와 함께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B의 청구를 기각한다면, 이 응소행위 자체가 재판상 청구로 인정되어 A가 처음 답변서를 제출한 시점에 시효가 중단됩니다. 이후 B가 여전히 돈을 갚지 않으면 A는 이 판결을 발판 삼아 별도의 대여금 청구소송이나 강제집행 절차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결국 채무자가 먼저 소를 걸어온 상황이 채권자에게는 오히려 시효를 확실히 중단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적용범위는 넓다 — 시효완성 자체를 다투는 소송이 아니어도 된다
응소로 인한 시효중단이 인정되려면 채무자가 반드시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이유를 내세워 소를 제기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법원 2008다42416 판결은 채권자의 응소행위에 대한 시효중단 효력이, 채무자가 소멸시효 완성을 원인으로 소를 제기하거나 해당 소송이 아닌 전소송·다른 소송에서 같은 권리주장을 한 경우에만 인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명확히 했습니다. 즉 채무자가 계약해제나 손해배상채무 부존재 등 다른 명목으로 소를 제기했더라도, 그 소송 안에서 채권자가 응소해 자신의 채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면 시효중단 효력이 인정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채권자 입장에서 중요한 실익이 있습니다. 채무자가 어떤 명목의 소를 걸어오든, 그 소송 안에서 자신의 채권 존재와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투기만 하면 시효중단이라는 부수적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런 폭넓은 적용범위를 믿고 응소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고, 앞서 살펴본 두 요건, 즉 적극적 권리주장과 그 주장의 인용이라는 기준은 어떤 소송 유형에서든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시효중단 주장은 언제까지 할 수 있나 — 사실심 변론종결 전까지
응소행위를 했다고 해서 법원이 자동으로 시효중단 효과를 인정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민사소송의 변론주의 원칙상 당사자가 시효중단 사실을 주장해야 법원이 이를 판단하는데, 대법원 2008다42416 판결은 이 시효중단 주장을 반드시 응소 시점에 함께 할 필요는 없고 소멸시효기간이 만료된 이후라도 사실심 변론종결 전이라면 언제든 할 수 있다고 판시했습니다(대법원 2003. 6. 13. 선고 2003다17927, 17934 판결도 같은 취지).
이는 소송 초기에 시효중단 문제를 미처 짚지 못했던 채권자에게도 상당한 여지를 남겨줍니다. 소송이 진행되던 중 상대방이 뒤늦게 소멸시효 완성을 항변으로 내세우는 경우, 채권자는 그 시점에서도 과거 자신의 응소행위를 근거로 이미 시효가 중단됐다는 재항변을 사실심 변론이 끝나기 전까지 제기할 수 있습니다. 다만 상고심에서는 새로운 사실주장이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으므로, 이 재항변은 1심이나 항소심 단계에서 준비서면으로 명확히 정리해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응소만 하면 자동으로 시효가 중단되나요?
A. 아닙니다. 단순히 소송에 응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고, 답변서나 준비서면에서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하며 그 주장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져야 시효중단 효력이 인정됩니다. 소극적으로 원고 청구기각만 구하는 경우에는 인정되기 어렵다는 것이 판례의 태도입니다.
Q. 시효중단의 효력은 정확히 언제 발생하나요?
A. 판결이 확정된 때가 아니라 피고가 현실적으로 권리를 행사해 응소한 때 발생한다는 것이 대법원 판례의 입장입니다. 소송이 오래 걸리더라도 최초로 적극적인 권리주장을 담은 서면을 제출한 시점을 기준으로 소급해 판단합니다.
Q. 응소했던 소송이 각하되거나 취하되면 시효중단 효력은 없어지나요?
A. 본안 판단 없이 소송이 끝난 경우라도, 그로부터 6개월 안에 재판상 청구 등 다른 시효중단 조치를 취하면 민법 제170조 제2항이 유추적용되어 최초 응소한 시점으로 소급해 시효중단 효력이 인정됩니다. 다만 6개월을 넘기면 이 소급효는 인정되지 않으므로 기간 관리가 중요합니다.
Q. 채무자가 시효완성을 이유로 소를 제기한 경우에만 응소로 시효를 중단시킬 수 있나요?
A. 그렇지 않습니다. 채무자가 소멸시효 완성을 원인으로 소를 제기하지 않았더라도, 그 소송에서 채권자가 응소해 권리를 적극 주장하고 받아들여지면 시효중단 효력이 인정될 수 있습니다. 소송의 명목상 청구원인보다 응소 과정에서 실제로 권리를 다투었는지가 중요합니다.
Q. 답변서 제출 당시 시효중단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면 나중에라도 주장할 수 있나요?
A. 가능합니다. 시효중단 주장은 응소 시점에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심 변론종결 전이라면 소멸시효기간이 지난 뒤에도 할 수 있다는 것이 판례입니다. 다만 변론주의 원칙상 당사자가 이를 주장하지 않으면 법원이 직권으로 인정해 주지는 않으므로 준비서면으로 명확히 정리해 두어야 합니다.
Q. 응소로 시효를 중단시키려면 어떤 자료를 준비해야 하나요?
A. 채권의 발생 원인과 액수, 변제기, 미변제 사실 등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계약서·차용증·문자메시지 등 증거자료를 답변서·준비서면 단계부터 함께 제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권리주장이 막연하면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시효중단 효력 자체가 부정될 수 있습니다.
맺음말
소멸시효가 임박한 상태에서 채무자로부터 소장을 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권리를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판례는 응소도 재판상 청구가 될 수 있다고 인정하고 있고, 그 효력은 판결 확정일이 아니라 실제로 권리를 주장한 시점으로 소급됩니다. 다만 이 효력은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권리주장과 그 주장의 인용이라는 두 요건을 충족해야 하고, 소가 각하·취하된 경우에는 6개월이라는 별도의 기한도 관리해야 합니다.
결국 관건은 소장을 받은 초기 단계에서 답변서를 얼마나 구체적이고 촘촘하게 작성하느냐입니다. 수원지법을 비롯한 법원에서 진행되는 대여금·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은 답변서 제출 기한이 촉박한 경우가 많으므로, 소장을 받았다면 시효 계산과 대응 방향부터 서둘러 점검해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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