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을 만들어 위탁판매업체에 맡기고, 팔린 만큼만 정산받기로 하는 계약은 소규모 제조업체나 온라인 셀러 사이에서 흔한 거래 구조입니다. 문제는 물건이 실제로 팔렸는데도 위탁판매업체가 "정산 시스템 점검 중", "매입처 정산이 먼저"라는 식으로 이유를 대며 정산금 지급을 계속 미루는 경우입니다. 몇 달치 정산 내역을 요구해도 명확한 계산서 하나 받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가면, 팔린 물건은 이미 남의 손에 있는데 정작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특히 위탁판매업체가 여러 공급업체의 물건을 한꺼번에 취급하는 구조라면, 자금 사정이 어려워질수록 먼저 밀리는 것이 공급업체에 대한 정산금인 경우가 많습니다.
먼저 전체를 짚어보겠습니다: 위탁매매 구조에서 정산금을 누구에게 어떻게 청구해야 하는가
위탁판매는 법적으로 상법상 위탁매매에 해당합니다. 위탁매매인이 자기 명의로, 그러나 위탁자(공급업체)의 계산으로 물건을 파는 구조입니다(상법 제101조). 여기서 핵심은 매매계약의 당사자가 어디까지나 위탁매매인과 매수인이라는 점입니다. 공급업체인 위탁자는 계약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오직 위탁매매인과의 내부관계에서 정산을 받을 뿐입니다.
이 구조를 모르면 흔히 두 가지를 혼동합니다. 첫째, "매수인이 대금을 안 냈다"는 위탁매매인의 설명을 그대로 믿고 물러서는 경우입니다. 둘째, 위탁매매인이 이미 매수인으로부터 돈을 받아 놓고도 이런저런 사정을 대며 정산을 미루는 경우입니다. 두 경우는 법적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 전자는 상법이 정한 위탁매매인의 고유 책임(이행담보책임) 문제이고, 후자는 애초에 위탁매매인 자신의 채무불이행이자 경우에 따라 형사책임까지 문제되는 사안입니다. 어느 쪽인지부터 구분해야 이후 대응이 정확해집니다.
공급업체 입장에서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위탁매매인이 매수인에게 실제로 물건을 인도했는지, 대금을 수령했는지 여부입니다. 이 두 가지가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정산이 안 되고 있다면 위탁매매인이 받은 돈을 넘겨주지 않고 있는 것이므로 대응은 신속하고 단호해야 합니다.
법은 이렇게 판단합니다: 이행담보책임과 위탁물의 귀속, 정산 거부가 형사책임으로 번지는 지점
상법은 위탁매매인에게 이행담보책임을 지웁니다. 제105조는 "위탁매매인이 위탁자를 위하여 매매를 한 경우에는 상대방이 채무를 이행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위탁매매인이 위탁자에 대하여 이를 이행할 책임이 있다"고 정합니다. 즉 매수인이 대금을 안 냈더라도, 다른 약정이나 관습이 없는 한 위탁매매인은 그 사정을 이유로 정산을 거부할 수 없고 자기 책임으로 위탁자에게 정산금을 지급해야 합니다. "매수인이 돈을 안 냈으니 나도 못 준다"는 항변은 원칙적으로 통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위탁자 보호를 위한 무과실책임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실무에서 더 자주 문제되는 쪽은 오히려 다른 경우입니다. 위탁매매인이 매수인으로부터 대금을 이미 받았으면서도 위탁자에게 넘기지 않는 경우인데, 이때는 이행담보책임이 아니라 위탁매매인 본인의 정산의무·인도의무 위반이 문제입니다. 상법 제104조는 위탁매매인이 위탁받은 매매를 한 때에는 지체 없이 계약의 요령과 상대방의 주소·성명을 통지하고 계산서를 제출하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계산서 제출 요구에 응하지 않거나 애매한 답변만 반복한다면, 그 자체로 이미 상법상 의무 위반입니다.
여기서 짚어야 할 또 하나의 구조가 상법 제103조(위탁물의 귀속)입니다. 위탁매매인이 위탁받아 판 물건에 관하여 취득한 채권(매수인에 대한 대금채권)이나 그 대금 자체는, 위탁자와 위탁매매인·위탁매매인의 채권자 사이의 관계에서는 위탁자에게 귀속된 것으로 봅니다. 이 규정의 실익은 위탁매매인이 자금난에 빠졌을 때 드러납니다. 대법원도 위탁매매인이 위탁매매로 취득한 채권을 제3자에게 담보로 양도한 사안에서, 위탁자에 대한 관계에서는 무권리자가 남의 채권을 양도한 것이어서 양수인이 선의취득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위탁자에게는 효력이 없다고 판시했습니다(대법원 2011. 7. 14. 선고 2011다31645 판결). 위탁매매인이 정산해야 할 돈을 다른 채권자에게 먼저 돌려막았다 하더라도, 그 처분이 공급업체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정산 거부가 단순한 채무불이행을 넘어 형사책임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법원은 위탁판매인이 위탁물을 판매하고 받은 돈은 원칙적으로 위탁자의 소유에 속하므로, 이를 함부로 소비하거나 인도를 거부하면 횡령죄가 성립한다고 판시해 왔습니다(대법원 1990. 3. 27. 선고 89도813 판결). 다만 판매대금에서 비용·수수료 등을 공제한 뒤 이익을 분배하기로 하는 등 대금 처분에 관한 별도 약정이 있는 계약이라면, 정산관계가 구체적으로 밝혀지기 전까지는 곧바로 횡령죄가 성립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같은 판례의 태도입니다. 계약서에 수수료·비용 공제 방식이 얼마나 명확히 정해져 있는지가 형사 대응의 성패를 가르는 지점입니다.
정산금 채권의 소멸시효도 짚어야 합니다. 위탁매매 계약은 상행위에 해당하므로, 정산금 채권은 원칙적으로 상사채권으로 5년의 소멸시효가 적용됩니다(상법 제64조). 당사자 한쪽에만 영업으로서의 상행위성이 인정되는 경우, 즉 위탁매매인 쪽에만 상행위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5년이 적용됩니다. 지연손해금은 상행위로 인한 채무이므로 연 6%의 상사법정이율이 적용되고(상법 제54조), 지급명령이나 소송을 제기해 상대방에게 송달된 다음 날부터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연 12%로 올라갑니다.
구체적인 숫자로 보면 체감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밀린 정산금이 3,000만 원인 상태에서 3개월간 지급이 미뤄지다가 지급명령을 신청해 2개월 뒤 상대방에게 송달됐고, 다시 2개월 만에 확정됐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송달 전 3개월(연 6%) — 약 45만 원
송달 후 확정까지 2개월(연 12%) — 약 60만 원
합계 — 5개월 사이 105만 원이 원금과 별도로 발생
액수가 크지 않아 보여도 정산이 늦어질수록 이 금액은 계속 누적되고, 무엇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위탁매매인의 자금 사정이 더 악화되어 회수 자체가 어려워질 위험이 커집니다.
김상훈 변호사의 대응, 이렇게: 계산서 제출 요구부터 가압류·형사 고소까지 단계별 전략
정산금 미지급이 확인됐다면, 다음 순서로 대응합니다.
계산서·판매내역 제출을 서면으로 요구 — 상법 제104조에 근거해 계약의 요령, 매수인 정보, 정산 내역이 담긴 계산서 제출을 내용증명으로 요구합니다. 이미 여러 차례 구두로 요청했는데도 응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후 소송·고소에서 위탁매매인의 의무 위반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됩니다.
내용증명으로 정산 기한과 금액을 특정 — 언제까지 얼마를 정산해야 하는지, 응하지 않을 경우 법적 절차로 나아간다는 점을 명확히 밝혀 발송합니다. 판매 확인이 되는 발주서·거래명세표·매출 정산 화면 캡처 등 뒷받침 자료를 함께 정리해 두어야 이후 절차에서 입증이 쉬워집니다.
지급명령 또는 정산금청구소송 — 판매 사실과 미정산 금액에 다툼의 여지가 거의 없다면 지급명령이 빠르고 비용도 적습니다. 다만 위탁매매인이 비용·수수료 공제 방식을 두고 다툴 것으로 예상되면 처음부터 소송으로 진행하는 편이 시간을 아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단계에서 상법 제105조의 이행담보책임을 함께 주장해, 매수인의 대금 미지급을 이유로 한 항변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합니다.
재산 상황이 불안하면 가압류부터 — 위탁매매인이 다른 공급업체에도 정산을 미루고 있거나 폐업 조짐이 보이는 등 자력이 불안한 정황이 있다면, 본안 판단을 기다리지 말고 예금채권·매출채권 등에 대한 가압류를 먼저 신청해 재산을 묶어 두어야 합니다. 상법 제103조에 따라 위탁매매로 취득한 채권 자체가 위탁자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취급되는 만큼, 그 채권의 소재를 파악해 가압류 대상으로 특정하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임의소비 정황이 뚜렷하면 형사 고소 병행 — 계약서에 비용·수수료 공제나 이익분배에 관한 별도 약정이 없는데도 위탁매매인이 이미 받은 대금을 다른 용도로 써버린 정황이 뚜렷하다면 횡령 고소를 함께 검토합니다. 형사 절차는 압박 수단이자 동시에 사실관계 확인 수단이 되어 민사 정산에도 속도가 붙는 경우가 많습니다.
망설이는 사이, 시간은 불리해집니다: 계산서부터 받아내야 하는 이유
위탁판매 정산금 문제에서 가장 위험한 태도는 "곧 정산해 주겠지"라며 계산서 한 장 없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위탁매매인의 자금 사정이 나빠질수록 회수는 더 어려워지고, 계산서·판매내역 없이 시간만 흐르면 정확한 미정산 금액을 특정하는 것부터 힘들어집니다.
정산이 늦어지고 있다면 계산서 제출부터 서면으로 요구하시고, 이행담보책임과 위탁물 귀속 법리를 근거로 한 회수 절차를 함께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법률 문제는 초기 대응이 중요합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김상훈 변호사에게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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