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은 무섭고, 그냥 따로 사는 건 불안하고.…"
요즘 이런 고민 끝에 '졸혼'을 선택하려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인터넷에서 졸혼계약서 양식을 내려받아 작성해도 되는지 궁금해하시죠. 얼마 전에도 한 의뢰인이 휴대폰으로 캡처한 졸혼계약서 양식을 보여주며 물었습니다.
"이대로 써도 괜찮을까요?"
양식 자체는 깔끔했습니다. 이름과 날짜만 적으면 바로 사용할 수 있는 형태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분에게 가장 중요한 내용은 빠져 있었습니다. 그분은 오랫동안 전업주부였고, 집과 예금 대부분이 배우자 명의였습니다. 그런데 계약서에는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문장만 있을 뿐, 앞으로 재산을 어떻게 보호할지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그분께 드린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따로 살기 시작하면, 지금 배우자 명의로 되어 있는 재산은 누가 지켜줍니까?"
그 순간 그분의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인터넷 양식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비로소 보였기 때문입니다.
■ 공증을 받아도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둘이 합의해서 사인하고 공증까지 받으면 다 효력이 생기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계약서의 효력은 공증 여부보다 어떤 내용을 약정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도 간섭하지 않는다.', '부정행위를 해도 문제 삼지 않는다.' 같은 조항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민법 제103조가 금지하는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반하는 법률행위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부에게는 서로 성실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는데, 이를 미리 없애거나 면제하는 약속은 법원이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즉, 계약서에 적혀 있고 공증까지 받았더라도 해당 조항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졸혼계약서는 감정적인 약속을 적는 문서가 아니라,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를 담는 문서가 되어야 합니다.
▶ 예를 들어
별거와 동거의무 면제에 관한 합의
생활비 부담 방법
재산 관리와 사용 방법
향후 발생할 분쟁 해결 절차
등은 충분히 검토해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 내 상황에 따라 계약 내용은 달라집니다
문제는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내용'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같은 졸혼이라도 누구는 재산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누구는 생활비가 문제이며, 누구는 합의 자체가 잘되지 않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 전업주부이고 재산 대부분이 배우자 명의라면
이 경우에는 특히 신중해야 합니다. 계약서만 작성한 채 별거를 시작하면, 배우자가 재산을 처분하거나 이전하더라도 뒤늦게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별거를 시작하기 전에 일정 재산을 미리 이전받거나, 재산을 어떻게 관리할지 계약서에 구체적으로 반영하는 방안을 함께 검토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 서로 의견이 잘 맞지 않는다면
단순히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으로 끝내기보다 법원의 조정절차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조정을 통해 합의 내용을 조서로 남겨 두면, 이후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보다 강한 법적 대응이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 비용이 왜 이렇게 차이 날까요?
졸혼계약서를 검색해 보면 어떤 곳은 수십만 원, 어떤 곳은 수백만 원의 비용을 안내합니다. 같은 계약서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비교적 저렴한 경우는 대부분 기존 양식에 당사자 정보만 넣어 완성하는 수준입니다. 이후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그 계약 내용 자체를 설계해 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실질적인 보호를 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비용이 더 드는 경우에는 단순히 문서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 현재 재산 구조를 분석하고, ✔️ 향후 분쟁 가능성을 검토하며, ✔️ 위약금이나 손해배상 조항을 설계하고 ✔️ 세금 문제까지 함께 검토하는 과정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부동산이나 큰 금액의 재산 이전이 예정되어 있다면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는 일정 금액(현재 기준 6억 원)까지 증여세 공제가 가능하지만, 그 범위를 넘거나 거래의 성격에 따라 세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졸혼 중 재산 이전은 이혼 시 재산분할과 동일하게 취급되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사전에 변호사와 세무사의 검토를 함께 받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에
우리는 종종 관계의 끝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정리하고 싶어 합니다. 이혼은 부담스럽고, 졸혼은 계약서 한 장이면 될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감정보다 먼저 남는 것은 생활비, 재산, 세금, 그리고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장치입니다. 그래서 저는 의뢰인들에게 항상 같은 말씀을 드립니다.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에 한 번은 멈춰서 내용을 확인해 보십시오.
배우자가 먼저 가져온 계약서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계약이 정말 공정한지, 나에게 불리한 조항은 없는지, 법적으로 효력이 있는 내용인지 한 번은 전문가의 검토를 받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졸혼은 이혼이 아니라서 가볍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가족법과 재산, 세금이 함께 얽혀 있는 법률 문제입니다. 처음 상담 한 번을 아끼려다 나중에 훨씬 큰 손해를 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도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끝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임은지 변호사
✔대한변호사협회 등록 이혼 전문 변호사
✔대한변호사협회 등록 가사법 전문 변호사
✔서울가정법원 국선보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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