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 이후 발생한 성범죄 사건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알코올 블랙아웃과 패싱아웃입니다.
실무에서 이 두 개념은 자주 혼용되지만, 법적으로는 같은 의미로 취급되지 않습니다. 특히 준강간·준강제추행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단순히 “기억을 못 한다”는 수준이었는지, 아니면 정상적인 판단능력과 대응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였는지가 사건의 핵심 쟁점이 됩니다.
대법원 2021. 2. 4. 선고 2018도9781 판결은 이 부분을 매우 정교하게 정리한 판결입니다. 이 판결은 준강제추행죄의 보호법익, 심신상실·항거불능의 의미, 알코올 블랙아웃과 패싱아웃의 구별, 그리고 음주 성범죄 사건에서 법원이 어떤 기준으로 상태를 판단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설시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위 판결을 중심으로, 알코올 블랙아웃과 패싱아웃이 법적으로 어떻게 구별되는지, 그리고 성범죄 사건에서 왜 이 구별이 중요한지 정리해보겠습니다.
1. 먼저 사실관계부터 간단히 보겠습니다
이 사건의 사실관계를 먼저 짧게 정리하겠습니다.
피해자는 18세, 피고인은 28세였고, 두 사람은 사건 전 서로 알지 못하던 사이였습니다. 피해자는 짧은 시간 동안 평소 주량을 넘는 술을 마신 뒤 노래방에서 나왔고, 이후 처음 만난 피고인과 함께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CCTV상 피해자는 완전히 쓰러진 채 업혀 이동하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다른 방 문을 열고 들어가거나,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고, 상당히 취한 상태로 보였습니다.
그 후 피해자는 피고인과 모텔에 들어갔고, 경찰이 객실에 도착했을 당시 상의는 전부 벗겨진 상태, 하의는 치마만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습니다. 피해자의 속바지와 팬티는 피고인의 주머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원심은 피해자가 걷고 계단을 오르내렸으며 이름도 대답했다는 점 등을 들어 심신상실 상태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보아 무죄를 선고했지만, 대법원은 이를 파기했습니다.
대법원은 블랙아웃 가능성만으로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을 쉽게 부정해서는 안 되고, 사건 전후의 정황 전체를 살펴 피해자가 실제로 정상적인 판단능력과 대응능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를 따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2. 준강제추행죄의 보호법익은 무엇인가
먼저 이 판결은 준강제추행죄의 보호법익을 분명히 했습니다.
대법원은 준강제추행죄는 정신적·신체적 사정으로 인해 성적인 자기방어를 할 수 없는 사람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는 범죄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적 자기결정권은 원치 않는 성적 관계를 거부할 권리, 즉 소극적인 성적 자기결정권입니다.
즉 이 범죄는 단지 완전히 의식을 잃은 사람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판단과 자기방어가 어려운 상태의 사람을 상대로 한 성적 침해를 처벌하기 위한 규정이라는 것입니다.
3. 심신상실과 항거불능의 의미
대법원은 이 판결에서 준강간·준강제추행의 핵심 개념도 다시 정리했습니다.
심신상실이란
정신기능의 장애로 인해 성적 행위에 대한 정상적인 판단능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항거불능이란
심신상실 이외의 원인으로 심리적 또는 물리적으로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경우를 말합니다.
그리고 대법원은 더 나아가, 피해자가
깊은 잠에 빠져 있거나
술이나 약물 때문에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었거나
완전히 의식을 잃지는 않았더라도 정상적인 판단능력과 대응·조절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
였다면, 준강간 또는 준강제추행에서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에 해당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법원은 단순히 “눈을 뜨고 걸었는가”만 보지 않습니다. 핵심은 정상적 판단과 대응이 가능했는지입니다.
4. 알코올 블랙아웃이란 무엇인가
대법원은 의학적 개념으로서의 알코올 블랙아웃을 비교적 정확히 설명했습니다.
알코올 블랙아웃은 짧은 시간에 다량의 술을 마셔 혈중알코올농도가 급격히 올라갈 때, 기억형성 과정에 장애가 생겨 특정 시점에 있었던 일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당시 일정한 행동은 했을 수 있지만 나중에 그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블랙아웃은 기억 형성의 문제이지, 반드시 그 시점에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블랙아웃 상태에서 대화를 하거나 걸을 수도 있고, 외형상 일정한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실무에서는 피고인 측에서 자주
“피해자는 의식이 있었고, 단지 나중에 기억을 못 하는 것뿐이다”
라는 취지로 블랙아웃을 주장합니다.
5. 패싱아웃이란 무엇인가
반면 패싱아웃은 다릅니다.
대법원은 패싱아웃을 알코올의 최면·진정 작용으로 인해 수면에 빠지는 의식상실 상태로 설명했습니다.
즉 패싱아웃은 단순한 기억장애가 아니라, 의식을 상실하거나 사실상 의식이 없는 상태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따라서 피해자가 술에 취해 잠든 상태, 깨우기 어려운 상태, 의식이 흐려져 정상적 반응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면 이는 심신상실을 인정할 수 있는 강한 사정이 됩니다.
정리하면,
블랙아웃은 기억장애 중심 개념이고,
패싱아웃은 의식상실 중심 개념입니다.
이 둘은 실무상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6. 블랙아웃이면 곧바로 준강제추행이 부정되는가
이 판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의식상실 상태는 아니고 나중에 기억을 못 한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블랙아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즉, 외형상 걸었다거나, 이름을 말했다거나, 잠깐 반응했다는 사정만으로
“정신이 멀쩡했고 단지 기억만 없는 상태였다”
고 쉽게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대법원은 다음과 같은 점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음주량과 음주 속도
술을 마신 뒤 경과 시간
평소 주량
평소 음주 후 기억장애 경험 여부
CCTV와 목격자가 본 상태와 언동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
만나게 된 경위
성적 접촉이 이루어진 장소와 방식
피해자의 연령, 경험, 성에 대한 인식 정도
피해자의 심리적·정서적 상태
피고인의 진술이 합리적인지
사건 이후 양측의 반응
이처럼 법원은 단순히 “걸을 수 있었다”는 한 장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건 전후 전체 흐름 속에서 실제로 판단능력과 대응능력이 남아 있었는지를 봅니다.
7. 대법원이 이 사건에서 문제 삼은 부분
대법원은 원심이 피해자의 단편적인 외형만 보고 심신상실을 부정한 점을 문제 삼았습니다.
원심은 피해자가
계단을 걸어 올라갔고
혼자 서 있었고
이름을 말했다
는 점을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런 장면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기록상 피해자는
짧은 시간 동안 다량의 술을 마셨고
구토를 했으며
일행과 소지품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처음 만난 남성과 함께 모텔에 갔으며
경찰이 왔는데도 옷이 벗겨진 상태로 다시 잠들 정도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고
평소 술에 취해 옷을 벗고 자는 습관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객관적 정황을 보면, 단지 단편적으로 걷거나 이름을 말했다는 사실만으로 정상적 판단능력과 자기방어능력이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입니다.
8. 왜 이 판결이 중요한가
이 판결은 음주 성범죄 사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실무에서는 피해자가 완전히 업혀 가거나 혼수상태여야만 심신상실이 인정된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즉 피해자가
완전히 의식을 잃지 않았더라도
알코올 영향으로 의사를 형성할 능력이나 저항력이 현저히 저하되었다면
이는 항거불능에 해당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또한 이 판결은 피고인 측에서 흔히 주장하는
“블랙아웃일 뿐이다”
라는 방어 논리에 대해, 법원이 훨씬 정교한 심리를 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의학 용어를 어떻게 붙이느냐가 아니라,
범행 당시 피해자가 실제로 성적 자기방어를 할 수 있는 상태였는지입니다.
9. 마무리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알코올 블랙아웃은 기억형성 장애로 인한 기억상실 상태이고,
패싱아웃은 술로 인해 수면에 빠지는 의식상실 상태입니다.
그리고 준강간·준강제추행 사건에서는 단순히 블랙아웃이라는 말만으로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법원은
피해자의 음주량과 주량
당시 CCTV와 목격 정황
피해자와 피고인의 관계
함께 모텔 등에 가게 된 경위
피고인 진술의 합리성
사건 이후의 반응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 피해자가 범행 당시 정상적인 판단능력과 대응능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결국 이 판결이 말하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걸을 수 있었는지, 이름을 말했는지 같은 단편적인 모습만으로는 부족하고, 사건 전체 흐름 속에서 피해자의 실제 상태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주 성범죄 사건은 이 점을 놓치면 사실인정이 크게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법리와 정황을 함께 정밀하게 검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로톡의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콘텐츠 내용에 대한 무단 복제 및 전재를 금지하며, 위반 시 민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