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시효 항변, 안 따질 듯 행동한 채무자에게는 신의칙이 막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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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시효 항변, 안 따질 듯 행동한 채무자에게는 신의칙이 막아선다 

강대현 변호사

돈을 빌려주고 오랫동안 받지 못하다가, 채무자가 "형편이 풀리면 곧 갚겠다"는 말을 반복하기에 소송을 미뤄왔던 채권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소를 제기하자 채무자가 소멸시효가 이미 완성됐다며 항변하는 경우, 이 항변은 늘 받아들여질까요. 민법은 채무자에게 시효완성을 주장할 권리를 주지만, 그 권리를 정당하게 쓰지 않고 채권자를 안심시켜 놓고 뒤늦게 시효 뒤에 숨는 경우까지 보호하지는 않습니다. 이 글에서는 소멸시효 항변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막혀 허용되지 않는 경우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리고 이 법리와 자주 혼동되는 시효이익 포기 법리가 최근 대법원 판례로 어떻게 달라졌는지 짚어보겠습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소멸시효 항변, 원칙은 채무자의 정당한 권리

민법 제162조 제1항은 채권은 10년간 행사하지 아니하면 소멸시효가 완성한다고 정합니다. 오래된 채권관계를 언제까지고 살려두면 증거가 흩어지고 당사자의 법률관계가 불안정해지므로, 일정 기간 권리를 행사하지 않은 채권자보다 그 상태를 신뢰한 거래질서를 보호하겠다는 것이 이 제도의 취지입니다. 그래서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권에 대해 채무자가 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정당한 권리행사이고, 법원도 이를 존중합니다.

다만 시효가 저절로 채권자를 완전히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민법 제168조는 청구, 압류·가압류·가처분, 승인을 시효중단 사유로 정해두고 있어서, 채권자가 소를 제기하거나 지급명령을 신청하거나 채무자로부터 채무를 승인받으면 그때까지 진행된 시효기간은 리셋되고 새로 진행됩니다. 문제는 채권자가 이런 공식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채무자의 말과 태도만 믿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경우입니다. 이때 채무자가 나중에 태도를 바꿔 시효완성을 주장하면 어떻게 되는지가 이 글의 핵심 질문입니다.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권에 대해 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정당한 권리행사이지만, 그 정당성은 채무자가 신의성실의 원칙을 지켰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신의칙과 권리남용금지 — 소멸시효 항변도 예외는 아니다

민법 제2조는 제1항에서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고, 제2항에서 권리는 남용하지 못한다고 정합니다. 이 조항은 민법 전체를 관통하는 대원칙이어서 소멸시효 항변권의 행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대법원 2002. 10. 25. 선고 2002다32332 판결은 이 원칙을 소멸시효 사건에 적용해, 채무자가 다음과 같은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고 명확히 판시했습니다.

  • 채무자가 시효완성 전에 채권자의 권리행사나 시효중단을 불가능 또는 현저히 곤란하게 한 경우

  • 채무자가 그러한 시효중단 조치가 불필요하다고 채권자로 하여금 믿게 하는 행동을 한 경우

  • 객관적으로 채권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던 경우

  • 시효완성 후 채무자가 시효를 원용하지 아니할 것 같은 태도를 보여 권리자로 하여금 그렇게 신뢰하게 한 경우

  • 채권자 보호의 필요성이 크고, 같은 조건의 다른 채권자는 변제를 받는 등 채무이행 거절을 인정하면 현저히 부당하거나 불공평한 경우

채무자의 소멸시효 항변권 행사도 신의성실의 원칙과 권리남용금지 원칙의 지배를 받는다 — 대법원 2002다32332 판결이 정리한 다섯 가지 유형 중 하나에 해당하면 항변이 배척될 수 있다.

"시효를 안 따질 듯 행동한 채무자" — 신뢰유발형이 실무의 핵심

위 다섯 유형 중 실무에서 가장 자주 다투어지는 것이 채무자가 시효를 원용하지 않을 것처럼 행동해 채권자의 신뢰를 만든 경우입니다. 여기 해당하는 전형적인 행동으로는 이자만 반복해서 일부 지급하는 것, "곧 정리해서 갚겠다"는 취지의 지급각서나 분할변제 약정서를 작성하는 것, 채권자와 장기간 채무조정 협상을 이어가며 합의서 초안을 주고받는 것, 채권자의 독촉에 채무 자체를 부인하지 않고 사정만 봐달라고 요청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채권자에게 '굳이 소송까지 갈 필요는 없겠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그 인상을 믿은 채권자는 시효중단 조치를 미루게 됩니다.

대법원 1997. 12. 12. 선고 95다29895 판결은 이 유형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사건에서 채무자는 단기소멸시효기간이 지나기 전 적극적으로 채권자에게 소 제기 등 시효중단 조치가 불필요하다고 믿게 하고, 채무자 측의 행정적 구제절차가 끝날 때까지 청구를 미루도록 유인했습니다. 채권자는 그 절차를 충실히 밟고 기다린 뒤 상당한 기간 내에 소를 제기했는데, 채무자는 그 절차를 오래 끌면서 한때는 청구를 인용했다가 오류 있는 재심결정으로 뒤집은 다음, 이번에는 단기소멸시효를 원용해 채무이행을 거절했습니다. 대법원은 이러한 채무자의 태도가 현저히 부당하다며, 그 소멸시효 항변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채무자가 시효중단 조치를 불필요하다고 믿게 하고 절차 종료까지 기다리게 유인한 뒤 시효를 원용하는 것은, 대법원이 실제로 권리남용을 인정한 대표적인 행동 유형이다.

판단기준 — 법원이 실제로 무엇을 보는가

신의칙 위반은 예외적으로만 인정되는 법리이기 때문에, 법원은 이를 쉽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먼저 채무자의 언동이 단순한 인사치레나 막연한 사과 수준을 넘어, 채권자로 하여금 실제로 소 제기나 압류 같은 조치가 필요 없다고 믿을 만큼 구체적이었는지를 봅니다. "언젠가는 갚겠지"라는 채권자의 막연한 기대만으로는 부족하고, 지급각서나 분할변제 약정, 반복된 일부 변제처럼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채권자가 그 언동을 실제로 신뢰해 권리행사를 미뤘다는 인과관계, 그리고 그 신뢰가 합리적이었는지를 따집니다. 채권자가 특별한 이유 없이 스스로 소송 제기나 지급명령 신청을 게을리한 사정까지 신의칙이 대신 구제해 주지는 않습니다. 즉 신의칙 위반이 인정되려면 채무자 쪽의 적극적인 유인·기망에 가까운 언동이 있어야 하고, 채권자의 단순한 소극적 태만은 이 법리로 구제받기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채무자가 그 태도를 번복하고 시효를 원용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현저히 부당한 결과를 낳는지를 형평의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합니다.

최근 판례 변화 — 시효이익 포기 추정과 신의칙 항변제한은 다르다

실무에서는 위 신의칙 법리와 별개로,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일부 갚았으니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자주 활용됐습니다. 민법 제184조 제1항은 소멸시효의 이익을 미리 포기하지 못한다고 정하는데, 반대로 시효완성 후에는 그 이익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반대해석입니다. 그동안 대법원은 1967년 판례 이래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하면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한다는 법리를 오랫동안 유지해왔습니다.

그런데 대법원 2025. 7. 24. 선고 2023다240299 전원합의체 판결이 58년 만에 이 추정 법리를 폐기했습니다. 대법원은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채무를 승인하는 것은 경험칙상 오히려 이례적이고, 단순한 관념의 통지에 불과한 채무승인과 시효완성의 이익을 받지 않겠다는 효과의사가 필요한 시효이익 포기는 성질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일부 변제나 채무 승인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시효이익을 포기했다고 당연히 추정할 수 없고, 채권자가 채무자의 인식과 포기 의사를 더 구체적인 사정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이 변화가 채권자에게 불리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시효이익 포기 법리와 앞서 살펴본 신의칙에 의한 항변권 제한 법리는 이번 전원합의체 판결과 무관하게 별개로 존재합니다. 포기의 효과의사까지는 증명하지 못하더라도, 채무자의 언동으로 채권자가 시효를 원용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조치를 미뤘다는 사정만 증명하면 신의칙으로 항변을 막을 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다만 이는 손쉬운 추정에 기대던 종전 실무보다 개별 사안의 구체적 사정을 훨씬 엄격하게 심사해야 하는 예외적 법리이므로, 입증의 부담은 이전보다 커졌다고 봐야 합니다.

시효완성 후 채무 승인만으로 시효이익 포기를 추정하던 58년 판례는 폐기됐지만, 채무자의 언동으로 채권자가 시효 원용을 믿지 않게 된 사정을 별도로 증명하면 신의칙에 의한 항변제한은 여전히 가능하다.

구체적 적용 예시 — 증거의 질이 결과를 가른다

2015년에 5천만원을 빌려주고 변제기가 2016년으로 지난 채권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채무자가 그 이후 명절마다 안부 전화를 걸어 "형편이 풀리면 갚겠다"는 취지의 말만 반복했다면, 이는 구체성이 떨어지는 사교적 언행에 가까워 채권자가 이를 근거로 신의칙 위반을 주장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채권자가 별다른 조치 없이 10년을 흘려보냈다면 2026년경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볼 여지가 큽니다.

반면 채무자가 2020년 무렵 "매달 이자만이라도 갚겠다"며 실제로 서너 차례 일부 금액을 송금하고, 그 송금과 함께 "나머지도 정리되는 대로 갚겠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종전이라면 이 사실만으로 시효이익 포기가 추정됐겠지만, 2025년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에는 그 추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다만 이 문자메시지와 반복된 송금이라는 구체적 언동이 채권자로 하여금 소 제기가 필요 없다고 믿게 했다는 사실관계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채권자로서는 시효이익 포기 대신 신의칙에 의한 항변제한을 주장하는 쪽으로 논리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결국 문자메시지, 계좌이체 내역, 통화 녹음, 지급각서처럼 채무자의 언동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자료를 얼마나 확보해두었는지가 소송의 승패를 가르게 됩니다.

실무 유의점 — 채권자와 채무자가 각각 준비할 것

채권자 입장에서는 채무자의 말만 믿고 시효기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가장 위험합니다. 채무자가 "곧 갚겠다"고 할 때마다 이를 문자메시지나 녹취, 서면 승인서 형태로 남겨 민법 제168조의 시효중단 사유인 승인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신의칙에 의한 항변제한은 법원이 매우 예외적으로만 인정하는 최후의 수단이지, 애초에 기대어야 할 원칙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 채무자의 지급 약속은 구두가 아니라 문자·서면으로 받아 승인의 증거로 남길 것

  • 협상이 길어지더라도 소멸시효 완성이 임박하면 지급명령이나 소 제기로 공식적인 시효중단 조치를 별도로 취할 것

  • 일부 변제를 받았다면 그 시점과 경위, 함께 오간 대화 내용을 기록해둘 것

채무자 입장에서는 반대로, 소멸시효가 완성됐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 섣불리 "곧 갚겠다"는 확답을 반복하거나 일부라도 지급하는 것이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언동이 시효이익 포기나 신의칙 위반의 근거로 활용될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애매하게 대응하기보다는 자신의 채무 상태와 시효 완성 여부를 먼저 정확히 확인하고, 필요하면 법률 조언을 받아 입장을 명확히 정리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채무자가 "곧 갚겠다"고 말만 한 것도 신의칙 위반이 되나요?

A. 단순한 사교적 언행이나 막연한 약속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채권자가 구체적으로 신뢰해 소 제기나 압류 같은 조치를 미룰 만큼 지급각서, 분할변제 약정, 반복된 일부 변제처럼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언동이 있어야 법원이 신의칙 위반을 인정합니다.

Q. 소멸시효 완성 후 채무자가 일부 갚으면 이제 시효이익 포기로 인정 안 되나요?

A. 2025년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일부 변제 등 채무 승인 사실만으로 시효이익 포기를 당연히 추정할 수는 없게 됐습니다. 다만 승인 당시 정황상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도 명확히 그 이익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고 볼 사정이 있다면 여전히 포기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Q. 신의칙으로 시효항변을 막는 것과 시효이익 포기는 뭐가 다른가요?

A. 시효이익 포기는 채무자가 완성된 시효의 이익을 받지 않겠다는 효과의사가 있어야 성립하는 반면, 신의칙에 의한 항변 제한은 채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 언동으로 채권자의 정당한 신뢰를 형성한 객관적 사정만으로도 인정될 수 있어 증명 방식이 다릅니다.

Q. 채권자가 소송을 늦춘 게 채무자 말만 믿었기 때문이라면 항상 구제받나요?

A. 그렇지 않습니다. 법원은 채무자의 언동이 실제로 소 제기 등을 불필요하다고 믿게 할 만큼 구체적이었는지, 그 신뢰가 합리적이었는지를 엄격히 따지며, 채권자가 스스로 시효중단 조치를 게을리한 사정까지 폭넓게 구제해 주지는 않습니다.

Q. 시효 중단을 확실히 하려면 어떤 조치를 해두어야 하나요?

A. 민법이 정한 청구(소 제기, 지급명령 등), 압류·가압류·가처분, 채무자의 서면 승인 중 하나를 확보해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하며, 구두 약속만 믿고 시효기간을 넘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Q. 채무자 입장에서 시효완성 후 절대 하면 안 되는 행동이 있나요?

A. 시효완성 사실을 인지한 상태에서 이자 일부를 지급하거나 곧 갚겠다는 취지의 확답을 반복하는 것은 시효이익 포기나 신의칙 위반으로 이어질 여지가 있으므로, 애매한 언행보다는 법적 조언을 받아 입장을 명확히 정리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맺음말

소멸시효 항변은 원칙적으로 채무자의 정당한 권리이지만, 채무자가 시효를 원용하지 않을 것처럼 행동해 채권자의 신뢰를 만들어놓고 뒤늦게 태도를 바꾸는 경우까지 보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신의칙 법리는 법원이 매우 엄격하게 심사하는 예외적 구제수단이고, 2025년 전원합의체 판결로 시효이익 포기 추정 법리까지 변경되면서 채권자가 어떤 법리로, 어떤 증거로 항변을 막을지 이전보다 더 정교하게 구성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결국 채무자의 언동이 구체적이었는지, 채권자가 그 언동을 실제로 신뢰해 권리행사를 미뤘는지, 그 결과가 현저히 부당한지를 사안마다 따져봐야 하는 문제입니다. 수원과 경기남부에서도 오래된 채권을 둘러싼 소멸시효 다툼이 드물지 않게 발생하는 만큼, 시효완성이 임박했거나 이미 지났다고 판단되는 채권이 있다면 섣불리 대응하기 전에 법률 조언을 받아보시길 권합니다.

의뢰인을 위한 최선의 전략을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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