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 상대방의 명함에 '사장'이라고 적혀 있으면, 그 사람이 회사를 대표해 계약할 권한이 있다고 믿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정작 법인등기부를 떼어보면 대표이사는 따로 있고, 명함 속 '사장'은 대표권이 전혀 없는 임원이거나 심지어 이사도 아닌 직원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과 계약을 맺은 뒤 문제가 생기면 회사는 "대표권 없는 사람과 계약한 것이니 무효"라고 주장하고 싶어 하지만, 상법은 오히려 그 반대의 결론을 낼 때가 많습니다. 대표권이 있는 것으로 오인될 만한 직함을 회사가 사용하도록 두었다면, 그 외관을 믿고 거래한 상대방을 회사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표현대표이사 제도가 무엇이고, 어떤 요건에서 회사 책임이 인정되거나 반대로 부정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표현대표이사란 — 상법 제395조가 만든 예외
회사를 대표할 권한은 원칙적으로 대표이사에게만 있습니다. 상법 제389조 제1항에 따라 대표이사는 이사회 결의(정관에 따라서는 주주총회 결의)로 선정되고, 그 성명과 주소가 등기부에 등재되어야 대외적으로 회사를 대표할 수 있는 지위가 확정됩니다. 이 원칙만 따진다면 대표이사가 아닌 사람과 계약한 상대방은 계약의 효력을 회사에 주장할 수 없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실제 거래 현장에서는 상대방이 계약 상대의 등기부를 일일이 확인하지 않고, 명함이나 회사가 내부적으로 부여한 직함만 보고 거래를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문제는 회사 스스로 대표이사가 아닌 사람에게 '사장', '부사장', '전무', '상무' 같은 직함을 관행적으로 부여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영업 편의나 대외 신뢰도를 위해 실무상 이런 직함을 쓰게 하면서도, 정작 등기부에는 대표이사로 올리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가 터지면 회사는 "그 사람에게는 대표권이 없었다"고 항변하려 하지만, 상법 제395조는 이 항변이 통하지 않는 경우를 규정합니다. 조문은 "사장, 부사장, 전무, 상무 기타 회사를 대표할 권한이 있는 것으로 인정될 만한 명칭을 사용한 이사의 행위에 대하여는 그 이사가 대표권이 없는 경우에도 회사는 선의의 제3자에 대하여 그 책임을 진다"고 정합니다.
상법 제395조는 대표권이 없는 이사가 회사를 대표할 권한이 있는 것으로 인정될 만한 명칭을 사용해 한 행위라도, 그 외관을 믿은 선의의 제3자에게는 회사가 책임을 지도록 정한 규정이다.
표현대표이사 책임이 성립하는 요건 — 외관·귀책사유·선의
표현대표이사 책임이 인정되려면 세 가지 요건이 함께 갖춰져야 합니다. 판례는 이 제도의 취지를, 대표이사가 아닌 이사가 외관상 대표권이 있는 것으로 인정될 만한 명칭을 사용하여 거래하고 그 외관에 회사의 귀책사유가 있는 경우, 그 외관을 믿은 선의의 제3자를 보호해 상거래의 신뢰와 안전을 도모하려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요건 하나라도 빠지면 회사 책임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외관의 존재 — '사장', '부사장', '전무', '상무' 등 대표권이 있는 것으로 인정될 만한 명칭을 실제로 사용했을 것.
회사의 귀책사유 — 회사가 그 명칭 사용을 명시적으로 또는 묵시적으로 승인했을 것.
제3자의 선의 — 거래 상대방이 그 사람에게 대표권이 없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
제3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없을 것(판례가 추가로 요구하는 요건).
이 중 실무 분쟁에서 가장 자주 다투어지는 지점은 두 번째 요건, 즉 회사의 귀책사유입니다. 명칭을 실제로 썼다는 사실이나 상대방이 몰랐다는 사실은 비교적 명확하게 확인되는 반면, "회사가 그 명칭 사용을 승인했다고 볼 수 있는가"는 정황 증거를 놓고 다투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음 항목에서 이 승인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짚어보겠습니다.
명칭사용을 묵시적으로 승인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회사의 귀책사유는 반드시 대표이사가 서면으로 "그 사람에게 사장 직함을 써도 좋다"고 승인한 경우에만 인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판례는 명시적 승인뿐 아니라 묵시적 승인도 귀책사유로 인정합니다. 명함을 회사 명의로 제작해 지급하거나, 조직도와 사내 이메일 서명에 그 직함을 사용하도록 방치하거나, 계약서·품의서 결재라인에 그 직함으로 서명하도록 관행적으로 두었다면, 회사가 명칭 사용을 알면서도 제지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묵시적 승인이 인정될 수 있습니다.
다만 묵시적 승인도 '회사가 알 수 있었고 제지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는 사정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그 직원이 사내에서 스스로를 '사장'이라 자칭하고 다녔다는 사정만으로는 부족하고, 대표이사나 이사회 등 회사의 의사결정권자가 그 명칭 사용을 인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지, 실제로 그 직함으로 대외 거래를 반복해 온 관행이 있었는지가 함께 검토됩니다. 이 판단이 왜 엄격한지는 다음 항목에서 다루는 반대 사례를 보면 분명해집니다.
임의로 명칭을 참칭한 경우 — 회사가 책임을 벗어나는 지점
회사의 승인 없이 직원이 스스로 명함을 만들어 '이사'나 '사장'을 자칭하고 거래한 경우까지 회사가 책임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법원 1995. 11. 21. 선고 94다50908 판결은 회사가 표현대표자의 명칭 사용을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 승인한 경우에 한해 상법 제395조의 책임이 인정되고, 회사의 승인 없이 임의로 명칭을 참칭한 자의 행위에 대하여는 비록 그 명칭 사용을 알지 못하고 제지하지 못한 점에 회사의 과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회사의 책임으로 돌려 선의의 제3자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할 수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이 판례가 실무에 주는 함의는 명확합니다. 회사가 그 명칭 사용을 전혀 몰랐고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도 있지 않았다면, 설령 결과적으로 관리 소홀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더라도 표현대표이사 책임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방 영업소 직원이 본사 승인 없이 독단적으로 명함에 '상무'라는 직함을 새겨 거래처와 계약을 맺었고, 본사가 그 직함 사용 사실 자체를 몰랐다면, 상대방은 표현대표이사 책임을 근거로 회사에 계약 이행을 요구하기 어렵습니다. 이 경우 상대방은 오히려 그 직원 개인을 상대로 무권대리인의 책임(민법상 표현대리 또는 무권대리 규정)을 별도로 검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제3자의 중과실 — 선의였다고 다 보호받지는 않는다
상대방이 대표권 없음을 몰랐다는 사정만으로 항상 보호받는 것도 아닙니다. 판례는 선의였더라도 상대방에게 중대한 과실이 있으면 회사 책임을 부정합니다. 중과실이란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 사람의 행위가 대표권에 기한 것이 아니라는 사정을 알 수 있었는데도, 만연히 대표권에 기한 행위라고 믿어 거래통념상 요구되는 주의의무를 현저히 위반한 경우를 말합니다. 단순한 부주의(경과실)와는 구분되는 개념으로, 중과실이 인정되면 선의였다는 사정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실무에서 중과실이 문제 되는 전형적인 장면은, 계약 규모가 상당히 큼에도 법인등기부등본조차 확인하지 않았거나, 계약서에 법인 인감이 아닌 개인 도장이 찍혀 있는데도 이를 그대로 넘기거나, 계약 상대가 정식 위임장이나 법인인감증명서 제시를 거부했는데도 별다른 의심 없이 계약을 체결한 경우입니다. 이런 정황이 겹치면 법원은 상대방에게 최소한의 확인 의무를 게을리한 중과실이 있다고 보아 회사 책임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확인 방법 — 계약 전 법인등기부등본에서 대표이사 성명을 직접 대조.
고액 계약일수록 위임장·법인인감증명서 제시를 요구.
계약서 날인이 법인 인감인지 개인 도장인지 확인.
대표권 없음을 알 수 있는 정황(직함과 실제 업무 불일치 등)을 무시하지 않을 것.
이사 자격이 없는 직원에게도 적용되는가 — 적용범위의 확장
상법 제395조의 문언은 '이사'가 표현적 명칭을 사용한 경우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분쟁에서는 애초에 이사로 선임된 적조차 없는 평직원에게 회사가 '이사'나 '사장' 같은 직함을 붙여준 경우도 흔합니다. 문언만 놓고 보면 이런 사람은 애초에 '이사'가 아니므로 상법 제395조가 적용될 여지가 없다고 볼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립된 판례의 입장은 다릅니다. 이사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도 회사가 사장·부사장 등 대표권이 있는 것으로 인정될 만한 명칭의 사용을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승인했다면, 상법 제395조가 유추적용되어 회사가 선의의 제3자에게 책임을 진다는 것이 판례의 확립된 태도입니다. 이는 상법 제395조가 보호하려는 것이 '이사라는 신분' 자체가 아니라 '대표권이 있는 것으로 믿게 만든 외관'이라는 점에서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결론입니다. 이사 등기가 되어 있는지, 이사회 구성원인지는 상대방이 거래 당시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이사 자격 유무로 회사 책임의 성립 여부를 가르는 것은 제도의 취지에 맞지 않습니다.
실제 분쟁에서 다투는 지점 — 계약서·명함·직인이 갖는 증거가치
표현대표이사 소송에서는 결국 '회사의 귀책사유'와 '상대방의 선의·무중과실'을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 싸움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사 쪽에서 책임을 벗어나려면 그 명칭 사용을 몰랐거나 승인한 적이 없다는 점을, 상대방 쪽에서 회사 책임을 물으려면 회사가 그 명칭 사용을 알면서도 방치했거나 적극적으로 부여했다는 점을 각각 입증해야 합니다.
이때 핵심 증거로 쓰이는 자료들이 있습니다. 회사가 발급한 명함과 그 발급 경위, 사내 조직도나 인사발령 문서상 직함 표기, 이메일 서명이나 결재 문서에 사용된 직함, 계약서에 사용된 직인이 법인 인감인지 여부, 그리고 그 직함을 사용한 사람이 이전에도 반복적으로 유사한 거래를 대외적으로 진행해 온 관행이 있었는지가 함께 검토됩니다. 계약대금이 회사 계좌로 입금되었는지, 아니면 개인 계좌로 흘러갔는지도 회사의 실질적 관여 여부를 판단하는 유력한 정황이 됩니다.
회사 명의로 제작·지급된 명함 및 그 경위.
사내 이메일 서명·결재 문서·조직도상 직함 표기.
계약서에 찍힌 인감이 법인 인감인지 개인 도장인지.
그 사람이 종전에도 같은 직함으로 대외 거래를 반복해 온 관행 유무.
계약대금 입금 계좌가 법인 계좌인지 개인 계좌인지.
표현대표이사 리스크를 막기 위한 조치
회사 입장에서는 대표권 없는 임직원에게 대외적으로 대표권을 오인시킬 수 있는 직함을 부여하는 관행 자체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득이 '사장'이나 '부사장' 같은 직함을 대외 영업용으로 써야 한다면, 계약 체결이 필요한 업무에는 반드시 대표이사 명의의 별도 위임장을 함께 발급하고, 그 직함만으로는 계약 체결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거래처에 사전 고지하는 절차를 마련해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명함 발급 대장을 관리하고, 퇴사자나 직함이 변경된 임직원의 명함·이메일 서명이 방치되지 않도록 정리하는 것도 실무적으로 중요합니다.
거래 상대방 입장에서는 계약 규모가 클수록 상대의 직함을 그대로 믿지 말고 법인등기부등본으로 대표이사를 직접 확인하는 절차를 관행화해야 합니다. 위임장이나 법인인감증명서를 요구하는 것이 번거롭게 느껴질 수 있지만, 뒤늦게 회사가 대표권 없음을 이유로 계약의 효력을 다투기 시작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상대방에게 돌아옵니다. 계약 체결 전 최소한의 확인 절차를 갖추는 것이 분쟁을 예방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표현대표이사와 계약하면 항상 회사가 책임지나요?
A. 아닙니다. 회사가 그 명칭 사용을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승인한 경우에만 책임이 인정됩니다. 회사의 승인 없이 임의로 명칭을 참칭한 경우에는 회사가 그 사용 사실을 몰라 제지하지 못한 데 과실이 있더라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Q. 이사가 아닌 평사원이 '이사' 명함을 쓰면 회사가 책임지나요?
A. 판례는 이사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도 회사가 그 명칭 사용을 승인했다면 상법 제395조가 유추적용되어 책임을 인정한다는 입장입니다. 제도의 취지가 '이사 신분'이 아니라 '대표권이 있는 것으로 믿게 만든 외관'을 보호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Q. 계약 상대방이 등기부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중과실이 되나요?
A. 소액의 통상적인 거래에서는 등기부 미확인 자체만으로 곧바로 중과실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계약 규모가 크거나 대표권을 의심할 만한 정황이 있었는데도 확인하지 않았다면 중과실이 인정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Q. 회사가 뒤늦게 '그 사람은 대표권이 없었다'고 주장하면 계약이 무효가 되나요?
A. 표현대표이사 요건이 충족되면 그 계약은 회사에 유효하게 귀속되고, 회사는 나중에 대표권이 없었다는 사정을 들어 계약의 효력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요건 중 하나라도 갖추지 못했다면 결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Q. 회사가 표현대표이사 책임을 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대표권이 있는 것으로 오인될 명칭 부여 자체를 자제하거나, 부여하더라도 계약 체결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명확히 고지하고 명함·직인 사용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합니다. 관행적으로 방치해 온 직함 사용이 있다면 조기에 정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Q. 표현대표이사 책임을 물으려면 소송에서 무엇을 입증해야 하나요?
A. 상대방은 명칭 사용 사실, 회사의 명시적·묵시적 승인, 자신의 선의(중대한 과실 없음)를 증명해야 합니다. 명함, 계약서, 이메일 서명, 인감 사용 내역 등 회사 내부 문서가 핵심 증거가 됩니다.
맺음말
표현대표이사 제도는 대표권 유무를 등기부로만 판단하기 어려운 거래 현실을 반영해, 외관을 믿고 거래한 선의의 제3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회사가 명칭 사용을 승인했는지, 상대방이 그 사실을 몰랐고 확인 의무를 게을리하지 않았는지에 따라 책임의 성립 여부가 갈리는 만큼, 어느 한쪽 사정만으로 결론을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수원·화성·시흥 등 경기남부 산업단지에 자리한 중소기업들은 영업 편의를 위해 이사 등기가 없는 직원에게도 '이사'·'부장' 이상의 대외 직함을 관행적으로 부여하는 경우가 많아, 표현대표이사 관련 분쟁이 실제로 자주 발생합니다. 계약 체결 전 상대방의 대표권을 확인하는 절차를 갖추거나, 회사 내부적으로 직함 부여와 계약 체결 권한을 명확히 분리해 두는 것이 분쟁을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의뢰인을 위한 최선의 전략을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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