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체결권을 대리인에게 맡겼는데, 그 대리인이 정작 자기 이익이나 제3자의 이익을 위해 그 권한을 써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리인이 받은 권한의 범위 안에서 계약을 맺었다면 원칙적으로 그 효과는 본인에게 그대로 귀속됩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대리인의 그런 속셈을 이미 알고 있었거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알 수 있었던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판례는 이런 경우를 '대리권 남용'이라 부르며 일정한 요건 아래 본인에 대한 효력을 부정해 왔습니다. 이 글에서는 대리권 남용이 성립하는 법적 근거와 판단기준, 그리고 실제 분쟁에서 본인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정리합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대리권 남용이란 무엇인가 — 권한 안에서 벌어지는 배임
민법 제114조는 대리인이 대리권의 범위 안에서 본인을 위한 것임을 표시하고 한 의사표시는 직접 본인에게 효력이 생긴다고 정합니다. 대리인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서명을 하는 주체이지만, 그 법률효과는 대리인이 아니라 본인에게 귀속되는 것이 대리 제도의 기본 구조입니다. 그런데 이 구조는 대리인이 '본인을 위해' 그 권한을 쓴다는 것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대리인이 형식적으로는 위임받은 권한 범위 안에서 행위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본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나 제3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상황을 강학상·실무상 '대리권 남용'이라 부릅니다.
예를 들어 부동산 처분을 위임받은 대리인이 시세보다 현저히 낮은 가격에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 넘기고 그 대금을 자기 채무 변제에 써버리는 경우, 자금 관리를 위임받은 대리인이 위임 목적과 무관하게 그 돈을 개인적으로 유용하는 경우가 전형적입니다. 이때 대리인의 행위는 대리권의 형식적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애초에 대리권이 없었던 무권대리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무권대리는 대리권 자체가 없거나 그 범위를 벗어난 행위이므로 본인의 추인이 없는 한 원칙적으로 효력이 없는 반면, 대리권 남용은 대리권이 유효하게 존재하고 그 범위 안의 행위라는 점에서 출발점이 정반대입니다. 이 구분을 명확히 해두지 않으면 대응 방법 자체를 잘못 짚게 됩니다.
원칙은 유효 — 대리제도가 동기를 묻지 않는 이유
대리권 남용이라고 해서 그 계약이 곧바로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리인에게 권한을 수여하는 행위, 즉 수권행위는 원인이 된 위임계약 등과는 별개로 독립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고, 대리행위의 하자 유무도 민법 제116조에 따라 원칙적으로 대리인을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대리인이 어떤 내심의 동기로 그 권한을 행사했는지는 대리행위의 객관적 효력과는 별개 문제로 취급되는 것이 대리 제도의 기본 원리입니다. 그렇게 설계된 이유는 명확합니다. 대리인의 속마음까지 상대방이 일일이 확인하도록 요구하면 거래의 안전이 크게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리인이 사익을 취할 의도로 계약을 체결했더라도, 상대방이 이를 전혀 몰랐고 알 수도 없었다면 그 계약은 유효하게 성립하고 본인에게 그대로 효력이 미칩니다. 본인이 입은 손해는 대리인을 상대로 한 위임계약 위반 책임 등 내부 관계에서 해결할 문제로 남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대리인의 배임적 의도를 이미 알고 있었거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알 수 있었던 상황에서도 계약의 효력을 그대로 인정해 버리면 형평에 맞지 않습니다. 이런 상대방까지 보호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판례가 예외를 인정하게 된 출발점입니다.
판례의 해법 — 민법 제107조 제1항 단서의 유추적용
대리권 남용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대표적 판결이 대법원 1987. 7. 7. 선고 86다카1004 판결입니다. 이 판결은 대리인의 행위가 대리권한의 범위 내에 있다 하더라도, 본인의 이익이나 의사에 반하여 자기 또는 제3자의 이익을 도모할 목적으로 그 권한을 행사한 경우, 상대방이 대리인의 진의를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에는 민법 제107조 제1항 단서의 유추해석상 본인은 그 행위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판시했습니다. 이후 이 법리는 대리권 남용 사건 전반에서 확립된 기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민법 제107조는 원래 '진의 아닌 의사표시'를 규율하는 조문입니다. 표의자가 진의와 다른 표시를 하면서도 스스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경우, 그 의사표시는 원칙적으로 유효하지만 상대방이 표의자의 진의 아님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에는 무효가 됩니다(제107조 제1항 단서). 판례는 이 구조를 대리 상황에 그대로 옮겨 왔습니다. 대리인이 '본인을 위한다'는 외관을 갖추고 있지만 실제 내심은 자기 이익을 향해 있다는 점에서, 표시와 진의의 괴리라는 제107조의 상황과 본질적으로 닮아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 결과 상대방의 인식 여부가 계약 효력을 가르는 결정적 기준이 됩니다.
대리인의 행위가 대리권 범위 내라 하더라도, 상대방이 그 남용 사실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다면 민법 제107조 제1항 단서를 유추적용해 본인에게 효력이 없다는 것이 확립된 판례의 입장이다.
무엇을 알았어야 하나 — 상대방의 악의·과실 판단기준
실제 분쟁에서는 상대방이 대리인의 배임적 의도를 '알았거나 알 수 있었는지'를 무엇으로 가리느냐가 관건입니다. 판례는 이를 계약 체결 당시의 객관적 사정을 종합해 판단하도록 하고 있고, 상대방의 주관적 진술만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사후에 밝혀진 사정이 아니라 거래 당시 상대방이 알 수 있었던 사정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거래조건의 이례성 — 시세보다 현저히 낮은 매매가, 통상적이지 않은 대금 지급 조건.
대리인과 상대방의 관계 — 친인척·지인 등 특수관계이거나 반복적인 거래 이력.
대금 흐름의 이상 징후 — 본인 명의 계좌가 아닌 대리인 개인 계좌로 송금을 요구하는 경우.
거래를 서두르는 정황 — 통상적인 검토 절차를 생략하도록 요구하거나 비정상적으로 신속한 처리를 요구.
이런 사정 하나만으로 곧바로 악의·과실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고,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합니다. 예컨대 시세보다 다소 낮은 가격이라는 사정만으로는 부족하지만, 여기에 대리인과 상대방의 특수관계, 대금이 본인이 아닌 제3의 계좌로 흘러간 정황까지 겹치면 상대방의 인식 가능성이 인정될 여지가 커집니다.
적용 범위 — 지배인·법정대리인의 대리행위에도 미친다
이 법리는 개인 간의 임의대리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대법원 1999. 3. 9. 선고 97다7721, 7738 판결은 상법상 지배인이 영업주 본인의 이익에 반하여 자기 또는 제3자의 이익을 도모할 목적으로 그 대리권을 행사한 경우에도, 상대방이 지배인의 진의를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에는 민법 제107조 제1항 단서의 유추해석상 영업주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지배인이 어음거래에서 회사가 아닌 자신이나 거래상대방의 이익을 위해 권한을 행사한 사안이었습니다.
법정대리인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대법원 2018. 4. 26. 선고 2016다3201 판결은 친권자가 미성년 자녀를 대리해 부동산을 처분한 사안에서, 대리권이 남용된 경우 민법 제107조 제1항 단서를 유추적용해 그 행위의 효과가 본인인 자녀에게 미치지 않는다는 기존 법리를 재확인했습니다. 임의대리든 법정대리든, 대리라는 제도가 갖는 구조적 취약점은 같기 때문에 판례가 같은 잣대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 뒤 거래한 제3자는 어떻게 되나 — 선의의 제3자 보호와 증명책임
대리권 남용으로 계약이 본인에게 효력이 없게 되더라도, 그 이후 상대방으로부터 다시 권리를 넘겨받은 제3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앞서 본 대법원 2016다3201 판결은 이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제107조 제1항 단서가 유추적용되어 무효가 된 법률관계를 기초로 새롭게 법률상 이해관계를 맺은 선의의 제3자에 대해서는 같은 조 제2항을 유추적용해 보호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즉 대리권 남용 사실을 몰랐던 전득자는 원칙적으로 그 물건이나 권리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증명책임의 소재도 중요합니다. 상대방이나 그로부터 권리를 넘겨받은 제3자가 악의였다는 사실은 계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쪽, 즉 본인이 증명해야 합니다. 단순히 '상대방이 알았을 것'이라는 정황만으로는 부족하고, 앞서 살펴본 거래조건의 이례성이나 관계, 대금 흐름 등을 구체적 증거로 뒷받침해야 법원이 무효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실제로 어떻게 판단되나 — 사례로 보는 적용 흐름
가상의 예로, 갑이 을에게 자신 소유 아파트의 매도를 위임했는데 을이 그 위임을 받은 직후 자신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병에게 시세보다 현저히 낮은 가격으로 매도하고, 매매대금 대부분을 자신의 개인 채무를 갚는 데 사용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병이 매매 당시 그 가격이 인근 시세와 크게 차이 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을과 평소 친분이 있었으며, 잔금을 갑 명의 계좌가 아니라 을 개인 계좌로 입금해 달라는 요구를 받고도 별다른 의문 없이 응했다면, 이런 사정들은 병이 을의 배임적 의도를 알았거나 알 수 있었다는 판단으로 이어질 여지가 큽니다. 이 경우 갑은 병을 상대로 매매계약이 자신에게 효력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병이 정상적인 시세로 거래에 임했고 을과 특별한 친분도 없었으며 대금 역시 갑 명의 계좌로 정상 지급되었다면, 병의 악의나 과실을 갑이 입증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을의 대리권 남용 의도와 무관하게 매매계약은 유효하게 유지되고, 갑은 을을 상대로 별도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대리권 남용이라도 상대방이 누구였고 거래 정황이 어땠는지에 따라 결론이 정반대로 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본인이 대응하려면 — 준비할 증거와 함께 검토할 절차
대리권 남용을 이유로 계약의 무효를 주장하려는 본인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악의·과실을 뒷받침할 객관적 자료를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거래 당시의 시세 자료, 대리인과 상대방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통화·메시지 내역, 계약 체결 경위를 담은 문서, 대금이 실제로 어디로 흘러갔는지를 보여주는 계좌 거래내역 등이 핵심 증거가 됩니다. 이런 자료 없이 '상대방도 알았을 것'이라는 추측만으로는 법원을 설득하기 어렵습니다.
무효가 인정되면 본인은 계약무효 확인청구와 함께 원상회복 성격의 부당이득반환청구나 소유권이전등기말소청구 등을 함께 검토하게 됩니다. 대리인에 대해서는 위임계약 위반에 따른 손해배상청구, 사안에 따라서는 업무상배임 등 형사책임 검토도 함께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고로 법무부는 2025년 2월 대리권 남용 법리를 신설 조문으로 명문화하는 민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바 있습니다. 다만 이는 아직 입법 절차가 진행 중인 단계이고, 지금 시점에서 분쟁을 다투는 기준은 여전히 위에서 살펴본 판례 법리, 즉 민법 제107조 제1항 단서의 유추적용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대리권 남용과 무권대리는 어떻게 다른가요?
A. 무권대리는 애초에 대리권이 없거나 그 범위를 벗어난 행위이고, 대리권 남용은 대리권 자체는 유효하게 있으나 그 행사 동기가 본인이 아닌 대리인 자신이나 제3자의 이익을 위한 경우입니다. 무권대리는 원칙적으로 무효이고 본인의 추인이 있어야 유효가 되지만, 대리권 남용은 원칙적으로 유효하되 상대방의 악의·과실이 있을 때만 예외적으로 무효가 됩니다.
Q. 상대방이 몰랐다면 본인은 어떤 방법으로 손해를 회복할 수 있나요?
A. 상대방이 선의·무과실이라 계약이 유효로 유지된다면, 본인은 계약 자체를 무효로 돌릴 수는 없고 대리인을 상대로 위임계약 위반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하거나, 사안에 따라 배임 등 형사책임을 검토하는 방법으로 대응하게 됩니다.
Q. 대리권 남용을 이유로 무효를 주장하려면 누가 무엇을 입증해야 하나요?
A. 상대방이 대리인의 남용 사실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다는 점은 무효를 주장하는 본인 쪽이 증명해야 합니다. 거래조건의 이례성이나 대리인과 상대방의 관계를 뒷받침하는 객관적 자료를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Q. 회사의 대표이사나 지배인이 권한을 남용한 경우에도 같은 법리가 적용되나요?
A. 네, 판례는 지배인 등 상업사용인의 대리권 남용에도 같은 법리를 적용해왔습니다. 상대방이 대리인의 배임적 의도를 알았거나 알 수 있었다면 회사(영업주)는 그 행위에 대해 책임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Q. 대리권 남용으로 무효가 된 계약을 기초로 다시 거래한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A. 그 뒤에 선의로 새롭게 권리를 취득한 제3자는 민법 제107조 제2항의 유추적용으로 보호될 수 있어, 원래의 무효를 그 제3자에게는 주장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제3자가 악의였다는 사실이 증명되면 보호받지 못합니다.
Q. 민법에 대리권 남용을 직접 규정하는 조문이 생기나요?
A. 법무부가 대리권 남용 법리를 신설 조문으로 명문화하는 민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바 있어 앞으로 입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현재는 아직 판례 법리, 즉 민법 제107조 제1항 단서의 유추적용이 실무 기준입니다.
맺음말
대리권 남용은 대리인이 위임받은 권한 범위 안에서 행위했다는 점에서 원칙적으로 유효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대리인의 배임적 의도를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경우에는 판례가 민법 제107조 제1항 단서를 유추적용해 본인에 대한 효력을 부정해 왔습니다. 지배인이나 친권자와 같은 법정대리인에게도 같은 법리가 적용되고, 이후 선의로 권리를 취득한 제3자는 별도로 보호받는다는 점까지 함께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실무적으로는 계약을 맺기 전에 상대방이 제시하는 조건이 통상적인 범위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대리인과의 관계가 석연치 않은 부분은 없는지를 미리 점검하는 것이 분쟁을 예방하는 첫걸음입니다. 특히 광교·수지 등 고액 부동산 거래가 활발한 지역에서는 대리인을 통한 처분 과정에서 이런 남용 분쟁이 드물지 않게 발생합니다. 이미 문제가 불거졌다면 상대방의 인식 가능성을 뒷받침할 자료부터 놓치지 않고 확보해 두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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