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자는 말을 믿고 성관계를 가졌는데, 알고 보니 애초에 결혼할 생각도 여력도 없었던 경우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이런 상황에서 혼인빙자간음죄로 상대방을 형사고소할 수 있었지만, 이 조항은 이미 형법에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아무 방법이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형사처벌과는 다른 경로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일까요. 이 글에서는 혼인빙자간음죄가 왜 폐지됐는지, 지금도 형사처벌이 가능한 예외적인 경우는 어떤 것인지, 형사처벌이 안 될 때 남는 민사상 구제수단은 무엇인지 정리합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혼인빙자간음죄란 무엇이었나 — 형법 제304조의 원래 모습
과거 형법 제304조는 "혼인을 빙자하여 음행의 상습없는 부녀를 기망하여 간음한 자"를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정하고 있었습니다. 이 조항은 처음부터 여성만을 보호대상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남녀평등 논란이 있었고, '음행의 상습없는 부녀'라는 표현 자체가 여성의 정조를 처벌의 전제로 삼는다는 비판을 꾸준히 받아왔습니다. 요건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혼인을 빙자하거나 그에 준하는 위계를 사용할 것, 그로 인해 상대방이 착오에 빠질 것, 그 착오 상태에서 간음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실제 재판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진 쟁점은 '성관계 당시 결혼할 의사가 정말로 없었는지'였습니다. 결혼할 의사나 능력이 전혀 없으면서 결혼을 약속해 성관계를 가진 경우, 상대방이 그 약속을 믿고 응했다는 인과관계가 인정되면 유죄가 선고됐습니다. 반대로 결혼 의사는 있었지만 이후 사정이 바뀌어 파혼에 이른 경우는 애초에 기망이 아니었으므로 처벌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 구분, 즉 '애초의 기망'과 '이후의 변심'을 가르는 기준은 지금 살펴볼 폐지 이후의 논의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혼인빙자간음죄의 핵심은 성관계 당시 결혼할 의사가 애초에 없었는지였고, 이후 마음이 바뀐 파혼과는 법적으로 전혀 다르게 취급됐다.
왜 사라졌나 —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과 형법 개정
헌법재판소는 2009. 11. 26. 2008헌바58, 2009헌바191(병합) 결정에서 형법 제304조 중 혼인빙자간음 부분이 헌법 제37조 제2항의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해 위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결정의 핵심은, 이 조항이 처벌 대상이 되는 상대방(주로 남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및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한다는 것입니다. 성인 사이의 성행위는 원칙적으로 개인의 자기결정에 맡겨야 할 사적 영역인데, 결혼하겠다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국가가 형벌을 동원해 개입하는 것은 그 제한의 정도가 지나치다고 본 것입니다.
이 위헌결정에 따라 형법 제304조는 2012. 12. 18. 개정으로 완전히 삭제됐습니다. 그 결과 결혼을 약속하며 성관계를 가진 뒤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는, 상대방을 형사고소하더라도 처벌할 근거 조항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됐습니다. 수사기관에 고소장을 접수하더라도 혐의없음(죄가안됨) 처분으로 종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이는 '결혼 약속 불이행'만을 문제 삼는 경우의 얘기이고, 뒤에서 살펴보듯 사안에 따라서는 여전히 형사·민사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통로가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형사처벌되는 예외 — 위계간음죄가 적용되는 대상
혼인빙자간음죄가 없어졌다고 해서 '기망에 의한 간음'을 처벌하는 조항이 형법에서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형법 제302조는 미성년자 또는 심신미약자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를 처벌하고, 형법 제303조는 업무·고용 등의 관계로 자신의 보호나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해 위계 또는 위력으로 간음한 경우를 처벌합니다. 그러나 두 조항 모두 적용대상이 제한돼 있습니다. 302조는 상대방이 미성년자이거나 심신미약자일 것을 요구하고, 303조는 상사와 부하직원처럼 실제 보호·감독관계가 존재할 것을 요구합니다. 서로 대등한 성인이 사적으로 만나 결혼을 약속받고 성관계를 가진 경우는 이 어느 요건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결혼 상대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이라면, 결혼 의사를 속였다는 사정만으로 302조나 303조를 적용해 형사처벌을 구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상대방이 지적장애나 정신질환 등으로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확인되고, 그 상태를 이용해 결혼을 빙자했다면 302조 적용 여지가 남습니다. 이 경우에도 심신미약 상태를 뒷받침할 진단서나 관련 자료가 함께 제출돼야 실제 처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형법 제302조 — 미성년자·심신미약자를 대상으로 위계·위력으로 간음 시 처벌.
형법 제303조 — 업무·고용 등 보호·감독관계 하에서 위계·위력으로 간음 시 처벌.
대등한 성인 간 결혼 빙자 성관계 — 위 두 조항 모두 적용이 어려움.
재산을 편취했다면 별개의 죄 — 결혼사기와 형법상 사기죄
혼인빙자간음죄가 없어졌다고 해서 결혼을 빙자한 모든 행위가 처벌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결혼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예단비·예물비·혼수비용·전세자금 등 금전을 받아 챙긴 경우라면, 성관계 여부와는 별개로 형법 제347조 사기죄가 성립할 수 있습니다. 사기죄는 기망행위로 상대방을 착오에 빠뜨리고, 그 착오 상태에서 처분행위(돈을 건네는 행위)를 하게 하며, 그 결과 재산상 손해가 발생했을 것을 요건으로 합니다. 판례는 대체로 성행위 자체는 사기죄가 보호하는 '재산상 이익'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아왔으므로, 성관계만 있었던 경우는 사기죄로 다루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명목으로 금전이 오갔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실제로 처음부터 결혼할 의사나 경제적 능력이 없으면서 결혼을 전제로 돈을 받아낸 사안은 흔히 '결혼사기'라는 이름으로 형사처벌됩니다. 이때 수사기관과 법원이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돈을 받을 당시 결혼할 의사와 능력이 실제로 있었는지입니다. 상대방에게 이미 배우자가 있었거나, 갚을 수 없는 채무를 감춘 채 결혼자금 명목으로 돈을 받았다면 편취의 고의를 강하게 뒷받침하는 사정이 됩니다. 반대로 결혼을 진지하게 준비하다가 이후 다른 이유로 파혼한 경우라면, 그 사이 오간 금전은 혼인 준비 비용 정산 문제일 뿐 사기죄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성관계만 있었던 경우 — 성행위는 재산상 이익이 아니어서 사기죄 성립이 어려움.
결혼 명목 금전(예단비·혼수비용·생활자금 등) 편취 — 사기죄 검토 대상.
판단 기준 — 돈을 받을 당시 결혼 의사·능력이 실제로 있었는지.
성관계 자체는 사기죄가 보호하는 재산상 이익이 아니지만, 결혼을 명목으로 건넨 금전은 별개의 재산범죄로 다뤄질 수 있다.
형사처벌이 안 돼도 남는 길 — 민법상 불법행위 손해배상
형사처벌 조항이 없다고 해서 아무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민법 제750조는 고의 또는 과실로 위법하게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에게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을 지웁니다. 처음부터 결혼할 의사가 전혀 없으면서도 결혼을 약속해 상대방을 믿게 하고, 그 신뢰를 이용해 성관계를 가진 뒤 일방적으로 관계를 정리했다면, 이는 상대방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인격권을 침해하는 위법행위로 평가될 여지가 있습니다. 이 경우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를 민법 제751조에 근거해 청구하는 민사소송이 가능합니다.
다만 이 청구가 받아들여지려면 단순히 '결혼이 성사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관계 당시 상대방에게 결혼할 의사나 능력이 애초에 없었다는 점, 그리고 그 사실을 감춘 채 결혼을 약속해 성관계에 이르게 했다는 인과관계를 원고 쪽에서 입증해야 합니다. 연애 감정으로 만나 진지하게 교제하다가 성격 차이나 집안의 반대 등으로 헤어진 경우는, 애초에 기망이 없었으므로 손해배상 청구가 받아들여지기 어렵습니다. 결국 혼인빙자간음죄가 형벌로 다루던 문제를, 지금은 손해배상이라는 민사적 방식으로 다루게 된 셈입니다.
형사처벌 조항이 사라졌다고 곧바로 아무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 기망을 입증하면 민법상 불법행위 손해배상 청구로 다툴 여지가 남는다.
상대방에게 이미 배우자가 있었다면 — 간통죄 폐지와 남은 구제수단
결혼을 빙자한 사안 중에는 상대방이 사실은 이미 배우자가 있으면서 미혼인 것처럼 속인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과거라면 이런 관계가 간통죄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간통죄를 처벌하던 형법 제241조 역시 헌법재판소 2015. 2. 26. 2009헌바17 등(병합) 결정으로 위헌 판단을 받아 폐지됐습니다. 따라서 상대방이 배우자가 있다는 사실을 속였다는 이유만으로 형사고소를 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합니다.
다만 민사적으로는 다른 경로가 남아 있습니다. 배우자가 있는 사람과 부정행위를 한 상대방(상간자)에 대해서는, 그 배우자가 혼인관계 파탄에 따른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이 확립된 실무의 태도입니다. 이는 속아서 관계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배신당한 배우자가 제기하는 청구입니다. 반대로 배우자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속아서 관계를 맺은 사람 입장에서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상대방의 기망행위를 근거로 한 별도의 불법행위 손해배상 청구를 검토할 수 있습니다. 두 청구는 청구권자와 근거가 다른 별개의 절차이므로 혼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실제로 대응한다면 — 증거 확보와 절차 선택
혼인빙자 성관계 문제를 실제로 다투려면 먼저 어떤 절차를 택할지부터 정해야 합니다. 결혼 명목으로 오간 금전이 있다면 사기죄 고소를 검토하고, 금전 없이 성관계와 신뢰 침해만 문제 된다면 처음부터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를 준비하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어느 쪽이든 핵심은 상대방이 애초에 결혼할 의사나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자료입니다.
실무적으로 도움이 되는 자료는 결혼을 약속하는 내용의 문자메시지·카카오톡 대화, 상견례나 예식장·웨딩플래너 계약 등 결혼 준비를 진행한 정황, 결혼자금 명목으로 오간 계좌이체 내역, 그리고 상대방이 이미 배우자가 있었거나 결혼할 형편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 등입니다. 이런 자료가 쌓일수록 '단순 변심'이 아니라 '애초의 기망'이었다는 점을 뒷받침하기가 수월해집니다. 형사 고소든 민사소송이든 진행 전에 확보된 증거의 수준을 먼저 냉정하게 점검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결혼 약속이 담긴 문자·카카오톡 대화 캡처.
상견례·예식장 계약·웨딩플래너 상담 등 결혼 준비 정황.
결혼자금 명목 계좌이체·현금 지급 내역.
상대방의 혼인관계·경제상황을 뒷받침하는 자료.
자주 묻는 질문
Q. 혼인빙자간음죄가 폐지됐는데도 결혼을 속인 상대방을 형사고소할 수 있나요?
A. 성인 사이의 합의된 성관계라면 결혼 의사를 속였다는 사정만으로는 처벌할 형법 조항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결혼 명목으로 금전을 받아 편취했다면 사기죄로, 상대방이 미성년자·심신미약자이거나 보호·감독관계에 있었다면 위계간음죄로 형사처벌될 수 있습니다.
Q. 결혼 준비 비용을 이미 다 썼는데 파혼당했다면 돌려받을 수 있나요?
A. 결혼 준비 과정에서 정당하게 지출된 비용은 파혼에 책임이 있는 쪽에 손해배상으로 청구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처음부터 결혼할 의사가 없었던 기망인지, 진지하게 준비하다가 사정이 바뀐 것인지에 따라 청구 근거와 범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Q. 상대방이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배우자가 저를 고소할 수 있나요?
A. 간통죄가 폐지된 지금은 형사처벌 대상이 아닙니다. 다만 배우자는 부정행위를 이유로 상간자에게 위자료를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이는 속아서 관계를 맺었는지 여부와 별개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Q. 위계간음죄로 고소하려면 어떤 점을 입증해야 하나요?
A. 상대방이 미성년자이거나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상태를 이용한 위계나 위력이 있었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대등한 성인 사이의 관계에는 이 조항이 적용되기 어렵습니다.
Q. 손해배상을 청구하려면 반드시 형사고소를 먼저 해야 하나요?
A. 아닙니다. 형사고소와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는 별개의 절차이므로 형사 절차 없이 곧바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다만 형사 수사 과정에서 확보된 자료가 민사소송에서 증거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아 병행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Q. 단순히 헤어졌다는 사정만으로도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나요?
A. 받기 어렵습니다. 진지하게 교제하다가 성격 차이 등으로 헤어진 경우는 애초에 기망이 없었으므로 불법행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결혼할 의사나 능력이 없었다는 사정이 별도로 입증돼야 합니다.
맺음말
혼인빙자간음죄는 2009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과 2012년 형법 개정을 거쳐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 결과 결혼을 약속하며 성관계를 가진 뒤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는 상대방을 형사처벌할 방법이 원칙적으로 없습니다. 다만 결혼 명목으로 금전을 편취했다면 사기죄로, 상대방이 미성년자나 심신미약자였다면 위계간음죄로 여전히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고, 그마저도 해당하지 않는다면 민법상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 청구라는 별개의 경로가 남아 있습니다.
결국 핵심은 상대방이 성관계 당시 결혼할 의사나 능력이 애초에 없었다는 사실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느냐입니다. 대화 기록이나 결혼 준비 정황, 금전 거래 내역처럼 객관적인 자료가 있는지에 따라 형사·민사 어느 절차로든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으므로, 절차를 선택하기 전에 확보 가능한 자료부터 정리해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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