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시효가 다 지난 채무라도 채무자가 그중 일부를 갚으면, 그 순간부터 시효완성의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보아 나머지 채무까지 되살아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대법원은 오랫동안 이 법리를 그대로 유지해 왔고, 그 때문에 시효가 끝난 빚을 독촉받다가 별생각 없이 몇만 원이라도 입금한 채무자가 뒤늦게 전액을 다시 갚아야 하는 처지에 몰리는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25년 7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이 오래된 법리를 정면으로 뒤집었습니다. 이제는 일부를 갚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시효이익을 포기했다고 단정할 수 없고, 그 변제가 어떤 사정에서 이뤄졌는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 새로운 기준입니다. 이 글에서는 무엇이 달라졌는지, 그리고 실제 상황에서 이 기준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법무법인 도모 강대현 대표변호사
시효이익 포기란 무엇인가 — 시효완성 전후로 갈리는 법적 의미
소멸시효는 채권자가 권리를 일정 기간 행사하지 않으면 그 권리를 더는 강제할 수 없게 만드는 제도입니다. 채권의 종류에 따라 일반채권은 민법 제162조에 따라 10년, 상사채권은 상법 제64조에 따라 5년, 이자·급료처럼 정기로 발생하는 채권이나 병원 진료비 등은 민법 제163조·제164조에 따라 3년 또는 1년의 단기시효가 적용됩니다. 시효기간이 지나면 채권은 별도의 재판 없이도 소멸하고, 채무자는 이를 이유로 이행을 거절할 수 있는 지위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민법 제184조 제1항은 "소멸시효의 이익은 미리 포기하지 못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이 조항을 반대로 읽으면, 시효가 완성되기 전에는 채무자가 시효 이익을 포기할 수 없지만 완성된 후에는 포기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시효완성 전 채무자가 빚의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는 민법 제168조 제3호의 '승인'으로서 진행 중이던 시효를 중단시켜 시효기간이 처음부터 다시 흐르게 할 뿐이지만, 시효완성 후의 '포기'는 이미 확정적으로 얻은 시효의 이익을 채무자 스스로 내려놓는 것이어서 법적 효과가 전혀 다릅니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시효완성 후 일부 변제라는 같은 행위를 두고도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시효완성 전의 '승인'은 시효를 중단시키는 관념의 통지에 불과하지만, 시효완성 후의 '포기'는 채무자가 이미 얻은 법적 이익을 스스로 내려놓는 의사표시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부 변제하면 시효이익 포기 — 60년 가까이 유지된 옛 법리
대법원은 오랫동안,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았는지 구체적으로 따지지 않고도 시효완성 후 채무를 일부 변제하거나 채무의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를 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사실상 추정해 왔습니다. 이 법리 아래에서는 채무자가 시효가 끝난 사실조차 모른 채 추심 전화를 받고 얼마간이라도 입금하면, 그 즉시 원래 채무 전액에 관해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취급되어 소멸했어야 할 채무가 통째로 되살아나는 결과가 반복됐습니다.
이런 옛 법리가 오래 유지된 배경에는 거래의 안전과 채권자의 신뢰를 보호해야 한다는 고려가 있었습니다. 채무자가 스스로 갚겠다는 태도를 보였다면 그 상대방인 채권자로서는 채무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추심 현장에서는 이 법리가 정반대 방향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부업체나 채권추심업체가 이미 시효가 끝난 오래된 채권을 사들인 뒤, 채무자에게 시효완성 사실은 알리지 않은 채 소액이라도 갚으라고 압박해 일부 변제를 받아내고, 그 한 번의 입금을 근거로 전액에 대한 시효이익 포기를 주장하며 다시 추심에 나서는 방식으로 이 법리를 악용하는 사례가 실무에서 문제로 지적돼 왔습니다.
2025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오래된 법리를 뒤집다
대법원 2025. 7. 24. 선고 2023다240299 전원합의체 판결은 시효완성 후 채무자가 채무를 일부 변제하거나 승인하는 행위를 했다는 사정만으로 곧바로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는 없다고 판시하며, 오랫동안 유지돼 온 위 법리를 변경했습니다. 대법원은 그 이유로 먼저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는 개념부터 다르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채무승인은 소멸시효 완성 여부와 무관하게 채무자가 자신에게 채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관념의 통지에 불과한 반면, 시효이익의 포기는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도 그로 인해 얻은 법적 이익을 받지 않겠다는 효과의사가 있어야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대법원은 이어 옛 법리가 경험칙에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채무자가 일부라도 갚는 행위를 했다고 해서 그가 정확히 그 시점에 시효가 이미 완성됐다는 사실까지 인식하고 있었으리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으며, 오히려 시효완성 여부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추심에 응하는 경우가 더 흔하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시효이익의 포기는 한번 이뤄지면 채무자에게 채무 전액을 다시 부담시키는 중대한 불이익을 낳으므로, 그 인정 요건을 함부로 완화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근거로 들었습니다. 결국 이번 판결로 시효완성 후 일부 변제나 승인 행위가 있었다는 사정은, 시효이익 포기를 곧바로 뒷받침하는 사정이 아니라 그중 하나의 참고자료로 그 위상이 낮아진 셈입니다.
시효완성 후 일부 변제나 채무승인이 있었다는 사정만으로는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없다는 것이 2023다240299 전원합의체 판결의 핵심이다.
새 기준으로 무엇을 보나 — 변제의 동기와 경위
일부 변제 사실만으로 포기를 추정할 수 없다면, 법원은 이제 무엇을 근거로 포기 여부를 판단할까요. 이번 판결의 취지에 따르면 채무자가 변제 당시 시효완성 사실을 실제로 인식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런 인식 아래 채무 전액을 이행하겠다는 의사로 일부를 갚은 것인지를 변제의 동기와 경위 등 구체적 사정을 종합해서 살펴야 합니다. 단순히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간 사실 하나만 두고 결론을 내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실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함께 고려될 수 있습니다. 채권자나 추심업체가 채무자에게 시효완성 사실을 알리지 않고 독촉만 한 정황이 있는지, 채무자가 변제 당시 채무 액수나 이자 계산을 놓고 다투거나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는지, 변제가 소액에 그쳤는지 아니면 상당 부분에 이르는 금액이었는지, 채무자가 서면으로 채무를 승인하거나 분할 상환 약정서를 작성하는 등 명확한 의사표시를 남겼는지 등입니다. 이런 사정들이 쌓일수록 단순 승인을 넘어 포기의 효과의사가 있었다고 볼 여지가 커집니다.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정황이 있는지.
변제가 추심 압박에 못 이긴 소액 입금인지, 스스로 채무 전액 이행 의사를 밝히며 이뤄진 것인지.
분할 상환 약정서 등 서면으로 채무 존재와 이행 의사를 명확히 남겼는지.
변제 이후 채무자가 곧바로 시효완성을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했는지, 아니면 아무런 이의 없이 계속 상환했는지.
예를 들어 채무자가 추심업체로부터 "지금 갚지 않으면 재산을 압류하겠다"는 취지의 연락만 받고, 정확한 채무 액수나 시효 경과 여부를 안내받지 못한 채 당장의 압박을 피하려고 10만 원을 입금한 경우를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런 정황이라면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인식한 상태에서 채무 전액을 이행하려는 의사로 갚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반면 채권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먼저 고지하고, 채무자가 이를 인지한 상태에서 "그래도 갚겠다"며 매달 일정액을 상환하기로 약정했다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그래도 포기로 인정될 수 있는 경우 — 명확한 의사표시가 남았을 때
이번 판결이 시효이익 포기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채권자와 협의해 분할 상환 계획서를 작성하고 그에 따라 일부를 갚기 시작했다면, 그 서면 자체가 시효완성을 알고도 채무 전액을 이행하겠다는 효과의사를 뒷받침하는 유력한 자료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채무자가 상담이나 협상 과정에서 "시효가 지난 것은 알지만 신용 문제도 있고 하니 갚겠다"는 취지로 명확히 밝히고 그에 따라 변제했다면, 이는 단순한 일부 변제를 넘어 포기의 의사표시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채무자가 시효완성 여부를 전혀 언급받지 못한 채 추심 전화나 문자로 독촉만 받고, 채무 액수도 정확히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단 급한 대로 소액을 입금한 경우라면 사정이 다릅니다. 이런 정황에서는 변제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시효완성을 인식하고 그 이익을 포기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결국 핵심은 변제라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에 이르게 된 '맥락'이 시효완성 인식과 포기 의사를 뒷받침하느냐에 있습니다.
채권자 입장에서 달라지는 입증 부담과 회수 전략
채권자로서는 이번 판결로 회수 전략을 다시 짜야 합니다. 예전에는 시효완성 후라도 채무자에게서 일부라도 받아내면 그것으로 시효이익 포기가 사실상 인정돼 나머지 채권을 계속 추심할 근거가 확보됐지만, 이제는 그 정도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채권자가 시효이익 포기를 주장하려면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인식한 상태에서 채무 전액을 이행할 의사로 변제했다는 점까지 구체적 사정으로 뒷받침해야 하고, 이 부분은 시효이익 포기를 주장하는 채권자 쪽에서 증명해야 하는 사항으로 다뤄집니다.
따라서 채권자는 단순히 소액 입금을 받는 데 그치지 말고, 채무자에게 시효완성 사실을 명확히 고지한 뒤 그럼에도 갚겠다는 의사를 서면이나 녹취 등 남는 형태로 확보해두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분할 상환 약정서에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 있다는 문구를 명시적으로 넣거나, 상담 과정에서 채무자의 인식과 의사를 구체적으로 기록해두는 방식이 실무에서 더 요구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절차 없이 이뤄진 소액 변제만으로는 향후 분쟁에서 시효이익 포기를 인정받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특히 오래된 채권을 헐값에 사들여 추심하는 채권매입업체 입장에서는 이번 판결의 영향이 더 큽니다. 시효완성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독촉만으로 받아낸 소액 변제는 더 이상 전액 회수의 근거가 되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무리한 추심보다는 채무자와의 협상 과정을 문서로 남기는 절차 정비가 우선 과제가 됐습니다.
채무자 입장에서 대응 — 이미 일부를 갚았다면
이미 시효가 지난 빚의 일부를 갚아버린 채무자라도 곧바로 전액을 포기한 것으로 단정하고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변제 당시 시효완성 사실을 안내받지 못했다는 점, 추심 연락을 받고 급하게 소액만 입금했을 뿐 채무 전액을 이행하겠다는 명확한 의사표시를 한 적이 없다는 점 등을 구체적으로 정리해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자메시지, 통화 내용, 입금 경위를 뒷받침할 자료를 확보해두면 이후 채권자가 시효이익 포기를 주장할 때 이를 반박하는 근거가 됩니다.
다만 시효완성 전에 이미 채무를 승인하는 행위(예: 이자 지급, 채무 확인서 작성 등)를 했다면 이는 앞서 살펴본 '포기'가 아니라 시효 중단 사유에 해당해 시효기간이 그 시점부터 다시 진행된다는 점은 이번 판결과 무관하게 그대로 유지됩니다. 자신의 변제나 승인 행위가 시효완성 전이었는지 후였는지부터 날짜를 정확히 따져보는 것이 대응의 출발점입니다. 판단이 애매한 사안이라면 채무 발생일, 최종 변제일, 시효완성 예상 시점을 정리한 자료를 가지고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시효완성 후 일부를 갚으면 이제 시효이익 포기와 전혀 무관한가요?
A.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2023다240299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로는 일부 변제 사실 하나만으로 포기를 추정하지 않고, 변제 당시 시효완성 사실을 인식했는지와 채무 전액을 이행할 의사가 있었는지 등 구체적 사정을 함께 따집니다.
Q.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요?
A. 채무승인은 시효완성 여부와 무관하게 채무 존재를 인정하는 관념의 통지로, 시효완성 전이라면 시효를 중단시키는 효과만 있습니다. 시효이익 포기는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 그 법적 이익을 받지 않겠다는 효과의사가 필요한 별개의 개념입니다.
Q. 이미 일부를 갚았는데 시효완성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하면 인정되나요?
A. 몰랐다는 사정은 시효이익 포기를 부정하는 데 유리한 사정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주장만으로 자동 인정되는 것은 아니고, 추심 경위·변제 금액·이의 제기 여부 등 여러 사정을 함께 살펴 법원이 종합적으로 판단합니다.
Q. 채권자 입장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요?
A. 소액 입금 하나에 의존하기보다, 채무자에게 시효완성 사실을 명확히 알린 뒤에도 갚겠다는 의사를 서면이나 기록으로 남기는 절차를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절차 없이는 향후 분쟁에서 시효이익 포기를 인정받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Q. 시효완성 전에 이자를 갚거나 채무확인서를 써준 경우도 이번 판결과 관련이 있나요?
A. 그 경우는 시효완성 전 '승인'으로 시효를 중단시키는 별개의 문제이며, 이번 전원합의체 판결이 다룬 시효완성 후의 '포기' 문제와는 구분됩니다. 다만 자신의 행위가 완성 전이었는지 후였는지는 날짜를 정확히 확인해야 합니다.
Q. 이미 확정된 과거 사건에도 이번 판례 변경이 적용되나요?
A. 이미 판결이 확정된 사건은 원칙적으로 재심 사유가 없는 한 그대로 유지됩니다. 다만 아직 진행 중이거나 새로 다투게 되는 사건에서는 이번에 변경된 법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맺음말
소멸시효가 완성된 뒤 채무 일부를 갚았다는 사정만으로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단정하던 시대는 2025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끝났습니다. 이제는 그 변제가 어떤 인식과 의도에서 이뤄졌는지가 핵심이 됐고, 이는 채권자와 채무자 모두에게 이전과는 다른 대응을 요구합니다. 채권자는 막연한 소액 회수에 만족하지 말고 채무자의 인식과 의사를 명확히 남겨야 하고, 채무자는 자신이 갚았던 경위와 당시 상황을 정확히 정리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결국 채무 발생일과 시효완성 시점, 변제가 이뤄진 정확한 날짜와 경위를 하나하나 따져야 판단이 가능한 영역입니다. 시효가 지난 것으로 보이는 빚을 두고 이미 일부를 갚았거나 앞으로 추심 연락을 받게 될 상황이라면, 자신의 상황을 정리해 상담을 받아보시길 권합니다.
조력이 필요하시면 010-3432-1451 강대현 대표변호사에게 연락주십시오. 신속히 도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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