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는 입주민들이 잘 모르는 큰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장기수선충당금입니다. 엘리베이터를 교체하고, 외벽을 도색하고, 배관을 바꾸는 날을 대비해 매달 조금씩 쌓아두는 돈이죠. 세대수가 어느 정도 되는 단지라면 억 단위로 불어나는 게 보통입니다. 문제는 이 돈이 "언젠가 쓸 돈"이라는 점입니다. 당장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으니까요.
오늘 소개할 사건의 피고인은 대구의 한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었습니다. 전임 회장에게서 장기수선충당금 계좌를 인계받았는데, 그 통장을 손에 쥔 지 넉 달 만에 첫 인출이 시작됩니다. 2014년 9월 은행 창구에서 2,500만 원. 그리고 이듬해 말까지 열한 번에 걸쳐 총 1억 3,084만 원을 꺼내 생활비 등으로 써버렸습니다.
재판에서는 다툴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횡령 사건은 의외로 법리 다툼이 단순한 경우가 많습니다. 통장 거래내역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도 그랬습니다. 금융거래정보 회신, 출금전표, 송금 신청서가 차곡차곡 쌓였고, 피고인도 범행을 대부분 인정했습니다. 장기수선충당금은 용도가 법으로 정해진 돈이고, 회장은 그 돈을 "업무상 보관하는 사람"이니, 개인 용도로 꺼내 쓰는 순간 업무상횡령죄가 성립합니다. 여기까지는 교과서 그대로입니다.
진짜 볼거리는 양형에 있습니다
이 판결에서 변호사인 제 눈길을 끈 건 형량이 정해지는 과정입니다. 횡령 액수가 1억 원을 넘으면 양형기준상 유형이 한 단계 올라갑니다. 이 사건은 제2유형(1억~5억 원)에 해당했고, 게다가 피고인에게는 동종 전과까지 있었습니다. 피해자인 입주자대표회의와 합의도 되지 않았죠. 조건만 보면 실형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그림입니다.
그런데 결론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었습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피고인이 1억 1,391만 원가량이 들어 있는 예금계좌를 피해자 측에 통째로 인계해서, 피해 대부분이 실제로 회복되었다는 점입니다. 법원은 이를 "상당 부분 피해 회복"이라는 특별감경인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서 실무의 중요한 감각 하나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합의서라는 종이가 없어도, 돈이 실제로 돌아갔다면 법원은 그것을 무겁게 봐준다는 것. 형사사건에서 "합의가 안 됐으니 끝났다"고 절망할 일도, 반대로 "합의만 버티면 실형 보낼 수 있다"고 안심할 일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결국 양형의 중심에는 형식이 아니라 실질적인 피해 전보가 있습니다.
입주민이라면, 그리고 임원이라면
이런 사건은 사실 구조가 만들어 냅니다. 회장 한 사람이 도장 하나로 억대의 돈을 꺼낼 수 있는 계좌 구조, 그 자체가 사고의 예고편입니다. 인출에 복수의 결재가 필요하도록 통장을 설계하고, 회계감사와 지자체 감사 청구 제도를 활용하는 것만으로도 상당 부분 예방이 됩니다. 그리고 이미 돈이 새어 나간 정황이 보인다면, 금융거래내역은 수사기관을 통해서만 온전히 확보되는 경우가 많으니 고민만 하다 시간을 보내기보다 빠르게 형사 절차를 여는 것이 회수의 지름길입니다.
아파트의 돈은 주인이 수백 명이라서, 역설적으로 아무도 주인이 아닌 것처럼 취급되곤 합니다. 이 판결은 그 빈틈이 어떻게 범죄가 되고, 또 어떻게 수습되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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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랜드로 | 부동산 전문 변호사 신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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